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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07)화 (107/292)

107화 

하. 라크시스는 망치로 두들겨 맞은 사람처럼 깨달음을 얻었다. 웃는지 우는지 가늠할 수 없는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다, 손에 들린 은발을 바라보길 반복하더니 입꼬리를 파르르 떨어댔다.

‘…이봐, 괜찮아?’

‘괜찮습니다. 그 어느 순간보다 괜찮고말고요.’

아스타는 그런 라크시스에게서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을 엿보았다. 라크시스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래로 돌아간 레이디 시아 켈튼은 저와 언제 다시 만난다고 했습니까?’

요르문은 한숨을 푹 쉬었다.

“하……. 내 알 바야?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 때도 내내 행사에 참석 안 하고 누님이 나타날 인부 쉼터에만 처박혀 있었다고. 대공에게 대신 둘러대느라 얼마나 고생했었는데.”

“하하. 그래요, 정말 고생하셨네요.”

루드윅은 영혼 없이 요르문을 토닥였다. 축 처져있던 요르문이 루드윅을 흘겨보았다.

“루드윅 자네는 그걸 위로라고 해주는 거야?”

그러나 루드윅은 가뿐하게 무시하고 레오나를 향해 돌아섰다. 어느새 요르문을 다루는 방법을 깨우치게 된 루드윅이었다.

“이제 저 두 사람을 불러볼까요? 백작님도 할 일이 많으실 텐데. 하루 종일 성 구경만 부탁드릴 순 없잖아요.”

“루드윅!”

레오나는 그 광경을 보며 배꼽을 잡고 깔깔거렸다. 뒤따라오던 두 연인을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자자, 로드 켈튼은 진정하시고. 거기 느림보 둘! 집주인이 계속 두 사람 기다리는 거 안 보이나? 너무 둘이서만 붙어있는 거 아니야?”

라크시스와 아웅다웅하던 시아가 화들짝 놀라 라크시스에게서 빠져나왔다.

“죄송해요! 지금 가요!”

그러나 라크시스가 한발 빨랐다. 빠져나간 손을 순식간에 다시 제 팔에 얹어 에스코트하는 모양새로 시아와 슬쩍 팔을 맞댔다.

“라크! 또!”

“같이 갑시다. 어차피 저도 갈 건데.”

또다시 투닥거림이 시작되었다. 성을 구경시켜 주려면 한참 걸리겠군. 레오나는 보좌관을 불러 업무를 하루 더 미루도록 지시했다.

【 진짜 괴담 】

“세상에, 이게 다…….”

시아는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그저 감탄했다.

고성의 정원은 기억과 전혀 달라져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만큼이나 뾰족하던 잔디는 없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부드럽게 우거진 수만 송이의 튤립이었다. 무늬를 내다 실패했는지 노란 튤립 사이로 분홍빛 튤립과 붉은 튤립이 얼룩처럼 곳곳에 모여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자연스러운 맛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알록달록 물든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의 뒤뜰에 계속 머물고 싶게 했다.

“할아버지가 직접 심으셨대. 물론 그 후엔 정원사의 손길을 많이 탔지만.”

정원사가 영주와 손님 일행을 보고 모자를 벗으며 고개를 숙였다. 에드먼드 3세의 명으로 애지중지 가꿔진 튤립은 그 옛날, 정원 일에 서툰 왕이 심어둔 모습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

“쉬는 날이면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끌고 백작령으로 내려오셨다지. 어머니가 그러시길, 할아버지가 엄청 불평했다고 했어.”

눈에 훤했다.

그날 이후의 아스타와 에드먼드가.

어릴 적 왕비궁의 정원을 망쳐놓던 철부지 왕자와 말괄량이 소백작이.

만일 에드먼드의 어머니가 살아있었다면 아스타의 지휘 아래 이 많은 튤립을 심는 아들을 보고 웃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아 일행은 고성에서 이틀 정도를 머물며 귀빈 대접을 받았다. 켈튼가의 별장에서 주인 일행이 갑자기 사라졌다며 경찰에 신고한 바람에 중간에 잠시 소동이 있었던 것을 빼곤 무탈하게 시간을 보냈다.

뒤바뀐 과거로 인해 시아 일행이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의 괴담을 찾아 한밤중에 성에 숨어들었던 사건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무스 경찰 측에 납치나 실종이 아니라, 잠시 초대를 받아 고성에 갔던 것이라 해명하면서 시아는 새삼스레 씨즐턴이 아닌 다무스에도 별장을 지어놓은 켈튼가의 재력에 감탄했다.

시아 일행은 슈테른베슈테크를 떠나서도 곧장 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누님, 꼭 이렇게까지 걸어야 해요?”

“좋잖아. 바뀐 다무스를 감상하는 거.”

지금 그들 일행이 걷고 있는 곳은 과거 씨즐턴에 도착했을 때 괴담의 근원지를 찾아 돌아다니던 고즈넉한 중세의 마을이었다.

낮은 지붕 위로 고개 내민 굴뚝에선 옛 방식으로 피운 불이 모락모락 연기를 뿜고 있었다. 벽을 따라붙은 황동 파이프와 마정석 보일러실이 유일하게 이곳이 마도 시대라는 것을 증명했다.

가파른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짚단을 엮어 만든 검을 들고 뛰어다니며 놀았다. 검은 마법사를 물리친 사자 백작을 흉내 내는 놀이였다.

악마 숭배자인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는 이제 없었다. 멀리 점처럼 보이는 절벽 끝의 고성도 주인 잃고 버려진 흉물이 아니라 세기의 사랑 이야기가 얽혀 유명해진 튤립 성으로 불리고 있었다.

산등성이에 평화로운 바람이 불었다. 석회암 지대에 자리한 오랜 마을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시간과 함께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시아는 빛바랜 슈트 케이스를 달랑달랑 흔들며 가볍게 경사를 걸어 내려갔다. 백삼십 년 전에 두고 온 탓에 홀로 세월을 맞아버린 마법 가방이었다.

시아가 미소 지었다.

“넌 궁금하지 않아? 집사 론다니의 아들이라던 할아버지 말이야. 아버지가 악마 숭배자의 성에서 일했다는 이유로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분.”

“누님도 너무 무르세요. 저 괴담 수집가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면 오늘 안에 집에 못 갈걸요.”

“잠깐 들렀다 가는 건데 뭐.”

“거봐요, 로드 켈튼. 레이디 켈튼도 궁금해하시는걸요!”

고성에 얽힌 괴담을 알려주었던 론다니의 아들을 찾아가 보자고 했던 건 루드윅의 의견이었다. 괴담이 사라진 현재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다나.

요르문은 귀찮다며 반대했지만 시아가 루드윅에게 동조해 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 라크시스는 그저 시아를 묵묵히 따랐다. 바뀐 과거 때문에 원래 시대가 엉망이 되었다며 괴로워하던 시아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시간 여행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사람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면, 시아가 그나마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었다.

“그냥 레오나 슈테른베슈테크에게 물어보면 될 것을. 옛 집사의 집안 사정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아이참, 로드 켈튼도 낭만 없으시네. 이런 게 시간 여행의 묘미잖아요!”

요르문은 핀잔 조로 대꾸했다.

“자네는 누가 보면 시간 여행을 수백 번 한 줄 알겠어.”

“수백 번 못하니까 더 그렇죠. 그 고생을 하면서 과거를 바꾸어놨는데, 어르신이 우리가 바꾼 과거 덕분에 행복하게 사셨다고 말씀하시는 걸 직접 들으면 얼마나 감동이겠어요!”

“말이나 못 하면. 그래, 마음대로 해.”

그 고생을 같이 했기 때문인지 어느새 루드윅과 꽤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의 호기심과 입방정도 이젠 웃어넘길 사이가 된 것 같았다.

역사가 바뀌어도 전통을 고수하던 방식은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다무스의 거리는 씨즐턴이던 시절의 모습과 거의 비슷하게 남아있었다. 관광객들을 위한 표지판이나 상가의 간판이 달라졌을 뿐, 루드윅이 챙겨온 씨즐턴의 지도를 따라가도 큰 불편함이 없을 정도였다.

“아, 저기네요.”

“하하, 저 준비 다 됐습니다.”

루드윅은 넥타이를 고쳐매며 어깨를 쫙 폈다. 그의 명함에는 갈리프도흐 소속 고고학자이자 신화학자라는 활자가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론다니의 아들을 찾는 일의 명목은 학술 연구를 위한 조사였다. 괴담 관련 일엔 머리가 평소보다 비상하게 돌아가는 루드윅이었다.

루드윅은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사람 눈높이 부근에 달린 작은 창 너머로 노인의 실루엣이 왔다 갔다 했다.

노크를 듣고 나타난 사람은 그때의 할아버지가 아닌, 처음 보는 중년의 여인이었다.

루드윅은 당황했다.

“누구쇼?”

“아, 그. 어르신, 실례하겠습니다. 저희는 이런 사람인데, 혹시 여기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안 계십니까?”

“제구욱? 참 멀리서도 왔네 그려. 그런데 번지수가 잘못됐어. 이 집엔 댁이 말하는 지긋하신 할아버지 안 계신다우.”

문간에 달린 창문으로 눈만 내밀던 여인은 가느다란 눈으로 명함을 보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얼핏 봤을 뿐인데도 인상이 익숙했다. 이들 일행이 찾아왔던 노인과 닮아있었다. 시아는 라크시스를 돌아보았다.

“설마.”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좀 됐다우. 일단 안으로 들어와요. 차라도 한 잔 대접할 테니.”

쭈뼛거리며 들어간 집은 포근하고 안락했다. 응접실로 들어가려는데 동글동글한 시선이 느껴졌다. 계단 난간을 따라 쪼르르 모여든 아이들이 갑작스러운 손님이 신기한지 구경하고 있었다.

“인사하렴, 얘들아. 제국에서 오신 학자님들이란다.”

“우와아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오!”

한스, 넌 앰버 코 좀 닦아주렴. 에단, 너는 단추 똑바로 잠가 입고. 네에! 아이들은 응접실 주변을 맴돌다가 이내 다시 뛰어다니며 놀았다.

응접실 안엔 작은 테이블과 벽난로가 있었다. 시아는 벽을 따라 걸려있는 크고 작은 초상화와 장식장 위의 액자들을 천천히 훑다가, 흑백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노인을 발견했다.

시아 일행이 다시 만나려 했던 그때의 할아버지였다. 중세풍의 더블릿에 풍성하게 부푼 소매가 인상적이었다. 이런 옷은 사진기가 발명되기 한참 전 시대에나 입었던 것이었다.

아마 고성의 집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옛 방식으로 입고 찍은 거겠지. 그것만으로도 시아는 안심했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으니, 아버지가 입던 옷을 입고 사진을 찍었을 테니까.

다행이야, 정말. 시아가 액자를 쓸어보며 구경하자 어느새 라크시스가 곁으로 다가와 서있었다.

벽난로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고즈넉하게 들려왔다. 시아는 배시시 웃었다.

“하긴 그때도 나이가 꽤 들어 보이셨죠? 괴담을 알려주던 할아버지 말이에요.”

젊은 론다니와 세월을 맞은 론다니. 흑백 사진에 두 집사의 모습이 아련하게 겹쳐 보인다.

“아쉽겠군요.”

“괜찮아요. 이걸로 충분해요.”

때마침 여인이 차를 내왔다. 차와 도기로 유명한 나라답게 하얀 찻잔과 주전자엔 마을 장인들이 손수 그린 덩굴무늬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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