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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06)화 (106/292)
  • 106화 

    왜 갑자기 이런 어색한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오늘따라 유독 이러는 것 같은데. 차라리 재수 없게 굴면서 평소대로 장난이라도 쳤으면 좋겠다.

    사흘 동안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을 때도 격하게 반응하더니. 아닌가, 그건 그냥 환자 걱정하는 보호자 마음과 비슷한 거였을까.

    하지만 아까 식사 때는 분명 달랐다. 아무리 장난이라지만 직접 썰어주고 먹여준다고? 라크시스의 성격대로라면 시종을 시켜 환자를 위한 음식을 내어오라고 했을 것이다. 남의 접시에 나이프를 대는 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예의가 아니란 걸 아는 귀족이니 더더욱.

    “라크. 있잖아요.”

    “네. 말씀하시죠.”

    그가 고요히 시아를 기다렸다. 바라보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녀가 대답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보석을 닮은 푸르고 아름다운 눈동자에 그녀의 모습이 오목하게 담겨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르문이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네. 평소였다면 누님, 거리면서 진작 날 찾았을 텐데.

    레오나가 은근하게 웃고 있었다. 그들을 부르려는 루드윅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혀를 끌끌 찬다.

    확실히 오늘은 뭔가 달랐다. 모든 사람들이, 특히 라크시스가. 둔한 나조차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정도로.

    그는 언제부터 날 이렇게 보고 있었을까.

    유성우가 떨어지던 백삼십 년 전부터?

    아니면 그전부터?

    시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혼자만의 착각이면 그것도 무척이나 민망한 일이었으니까.

    “…아니에요. 그냥 불러봤어요.”

    “혹시 제가 불편합니까?”

    “네? 아뇨! 불편할 리가요.”

    사실 불편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불편했다. 이상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건 라크시스인데, 왜 자신이 그의 시선을 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라크가 싫은 건 아니었다. 단지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맹렬하게 고민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아는 라크시스를 쳐다보지도 않고 앞으로만 뚜벅뚜벅 걸었다. 라크시스는 그런 시아의 손발이 같은 편끼리 움직이는 걸 발견했다.

    “아, 라크. 그러고 보니 제가 미궁에서 봉인을 찾았던 것 같은…….”

    “시아.”

    듣기 좋은 울림이 머리를 뒤흔든다. 괜히 의식하고 나니까 유난히 부드럽게 들리는 것 같았다. 길쭉한 손가락이 은근슬쩍 그녀의 손아귀로 파고들었다.

    아무리 손까지 예쁜 남자라고는 하지만, 남자는 남자인 모양이지. 벌어진 마디 사이로 힘줄이 도드라져 있다.

    그러고 보니 나, 라크의 손을 이렇게 잡아봤던 적이 또 있었네. 고성의 지하 감옥에서 횃불에 닿을까 봐 라크가 자리를 바꿔줬을 때.

    시아는 무심결에 라크시스의 손바닥을 만지작거렸다. 와, 굳은살 하나 없네. 고생 한번 안 하고 자란 귀족은 다 이러려나.

    청량한 웃음소리가 꽃망울 터지듯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니 라크시스가 보기 드물게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방대한 마력 때문이지요. 역설적이게도 그 때문에 총을 잡거나 고삐를 쥐면 마디의 여린 살에 상처가 자주 납니다.”

    그가 이토록 즐거워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혹 제 손이 마음에 드십니까?”

    으아아! 시아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얼른 손을 내팽개쳤다. 코 속도 뜨겁고 입 안도 뜨겁고 눈알도 뜨겁다. 잔뜩 열이 오른 상태로 라크시스를 지나쳐 부리나케 걷고 있으니 뒤에서 그가 붙잡았다.

    “시아, 제가 싫습니까?”

    싫냐고?

    시아는 그대로 뒤를 돌아보았다.

    라크시스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던가.

    버림받은 강아지, 아니 은여우가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고상한 얼굴 탓에 동물보단 뭐랄까, 고전 소설에 나올법한 비운의 도련님처럼 보였지만.

    “싫다뇨. 제가 라크를 왜 싫어하겠어요.”

    왜, 왜! 그런 걸 갑자기 왜 물어보는데! 겉으론 웃고 있지만 시아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호들갑의 요정이 비명을 지르며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기분이다.

    라크시스는 기껏 벌려놓은 거리가 무색할 만큼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 제가 불편하신 거군요.”

    “불편한 게 아니라고 했잖, 아. 어, 음…….”

    그의 그림자가 머리 위로 동그랗게 드리워졌다. 왠지 거짓말을 해선 안 될 것만 같았다.

    “…네. 사실 조금요, 아니 아주 조금이요.”

    시아는 라크시스를 흘긋 올려다보았다. 슬퍼하는 건지 서운해하는 건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평소보다 좀 많이 가까운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게 막 싫다는 건 아니고……. 후, 모르겠어요. 그냥 미안해요, 라크.”

    상처받았을까? 사실 친한 친구 사이에서 친밀의 표시로 했던 말들이었는데, 내가 혼자 오해하고 피해서 기분이 나빴으려나.

    그때였다.

    “하긴 저도 이런 제 자신이 낯설긴 한데.”

    라크시스는 제 턱을 매만지며 능청스럽게 중얼거렸다.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에, 전혀 다른 태도다. 원래의 재수 없고, 장난기 다분한 라크시스 옌이었다.

    “설마, 또 절 놀린…….”

    “이런. 제가 당신을 놀린 것처럼 보였나 보군요.”

    갑자기 시아의 팔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이내 단단한 팔뚝 위에 안착하더니, 무도회에서 에스코트를 받는 것처럼 팔과 팔이 겹쳐 들었다.

    “앞으론 이런 제게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완벽한 신사로 되돌아온 라크시스가 태연하게 말했다.

    “물론 그렇게 놀라는 것도 나름대로 좋아합니다만. 매번 제게 놀라는 것도 힘들지 않겠습니까.”

    가시죠, 레이디. 라크시스는 시아의 걸음을 여유롭게 리드했다.

    그러는 그의 귀 끝도 아주 조금, 붉어져 있었다.

    * * *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네. 아주 그냥 좋아죽지 그래?”

    “왜요, 좋잖아요. 그간 고대 마법사님 때문에 고생 좀 하셨다면서요.”

    루드윅은 실실거리면서 아직 따라오려면 한참 먼 시아와 라크시스를 구경했다. 레오나의 고성 안내보다 두 배는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티격태격하면서도 꼭 달라붙어 있는 모습은 정말이지 풍문 속 연인 그 자체였다.

    레오나도 흐뭇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왜, 뭐 때문에 고생했는데?”

    요르문은 진절머리를 쳤다.

    “아, 제발 그만 물어보라고! 짝사랑하던 여자를 못 잊어서 술에 약에 아주 그냥 찌들어 살던 놈 챙기느라 그간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나 해?”

    “이젠 그 과거가 아예 사라진 셈이잖아요. 이번 생엔 레이디 켈튼을 만나자마자 그랬다면서요.”

    루드윅은 요르문에게서 캐낸 과거를 은근한 몸짓으로 재연했다.

    ‘당신이 시아 켈튼이군요.’

    ‘누구, 세요……? 절 아세요?’

    시아 켈튼이 처음 아르카나 중앙역에 나타났던 날, 요르문은 라크시스에게 끌려와 그녀가 도착할 인부 쉼터에 있었다. 유난히 잘 차려입고 나타난 라크시스는 이렇게 말했었지.

    ‘이제부터 알아가면 되겠지요. 자, 일어나요.’

    요르문은 강제로 스며든 새로운 기억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레오나가 핀잔주듯 대꾸했다.

    “이번 생이라니, 누가 보면 할머니처럼 여러 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줄 알겠어.”

    “차라리 새로 태어났으면 좋겠네. 고생했던 기억도, 저 놈이 연애질하는 걸 지켜봐야만 했던 기억도 죄다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레오나가 낄낄거렸다. 루드윅은 움찔거리는 입을 주체하지 못하고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 사람들이 지금 약 올리나. 요르문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문득 레오나에게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 옛날의 라크시스 옌은 사실 아무것도 못 봤잖아. 중세로 시간 여행을 온 미래의 자신도, 미래의 레이디 켈튼도 말이야.”

    더블릿이 아닌 마도 시대풍의 코트에, 대충 맨 크라바트 차림의 그녀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며 꺼냈다. 자그마한 유리병에 담긴 긴 은발 한 가닥이었다.

    “고작 이 머리카락 하나로 그리워하던 여자가 레이디 켈튼이란 걸 어떻게 확신했을까?”

    레오나는 할머니가 들려주었던 옛이야기를 떠올렸다.

    ‘라크시스 옌이 왔었다구요?’

    ‘그래. 미래에서 온 이방인이 아닌,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었던 제국의 라크시스 옌이 다무스에 왔었단다.’

    아스타는 주름진 입으로 홀홀 웃었다. 뜨거운 우유를 호호 불어 식혀서 제게 건네주던 할머니는 도무지 냉혈의 사자 같지 않았다.

    ‘고대 마법사라더니, 확실히 뭔가 다르긴 달랐나 보지. 레이디 켈튼이 원래 시대로 돌아간 직후에 곧장 날 찾아와서는 대체 자기에게 무슨 짓을 했냐며 따져 묻더구나.’

    난데없는 물음에도 그 당시의 아스타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은발의 고대 마법사는 자신이 얼마 전 자신과 같은 마력을 강렬하게 느끼곤 어떤 물건을 받았으며, 곧장 그 물건의 출처를 쫓아 이곳까지 왔다고 했다.

    ‘아무 짓도 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도 도통 믿질 않았지. 그가 장난치지 말라고 화를 내면서 내게 내민 물건을 봤는데, 나도 참 당황스러웠단다.’

    그가 내민 것은 아스타가 시아에게 입혀주었던 망토에 달린, 슈테른베슈테크의 문장이 선명하게 양각된 금단추였다.

    ‘와, 정말요? 레이디 켈튼은 내내 다무스에서만 머물렀던 사람이잖아요. 제국에서 온 할머니 시대의 라크시스 옌은 그걸 어떻게 갖고 있었던 거래요?’

    ‘그야 모르지. 그건 나도 아직까지 궁금한 부분이란다.’

    아스타는 중세의 라크시스에게 미래에서 온 이방인과 자신이 겪었던 시간의 굴레에 대해 말해주었다. 미래인이라고 하면 놀랄 법도 한데, 라크시스는 생각보다 덤덤했다고 한다.

    ‘다만 그가 유일하게 동요했던 순간이 있었지.’

    아스타는 폐허가 된 신전 터에 라크시스를 데려갔다. 이곳에 원래 어둠의 힘이 봉인된 미궁이 있었고, 아마 미래의 당신과 레이디 켈튼이 봉인을 무사히 가져갔기에 신전이 소임을 다하고 무너졌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흙먼지와 돌 부스러기가 가득한 바닥을 유심히 훑어보던 라크시스는 갑자기 그답지 않게 허겁지겁 달려가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로드 슈테른베슈테크, 이거, 아니, 그 여기 왔었다던 미래의 여자 말입니다.’

    ‘레이디 켈튼? 왜. 어차피 모르는 사람이잖아.’

    아스타는 라크시스라는 사람이 그토록 간절하게 매달리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갈퀴처럼 자신을 붙들고 집요하게 물었다.

    ‘혹시 머리가 은발이었습니까?’

    ‘은발이 어디 흔한가. 아마 당신이 유일할걸? 고대 마법사라며.’

    ‘그러니까 레이디 켈튼이라는 여자의 머리카락이 은발이었냐는 말입니다.’

    ‘아니. 검붉은 머리였어. 은발은 라크시스 옌 당신이었지.’

    ‘그렇다면 지금까지 여기에 왔던 사람 중 은발을 가진 여인이 있었습니까?’

    ‘내가 태어나서 본 은발은 미래에서 온 당신이 유일했다니까. 게다가 다무스 신전은 이자벨라 때문에 사람 발길이 끊어진 지 오래됐다고.’

    진절머리가 난 아스타는 으름장을 놓듯 외쳤다.

    ‘그런 긴 은발이 여기 있는 게 이상한 거야! 신전이 이 난리가 나서 무너졌는데 사람 머리카락이 웬 말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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