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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05)화 (105/292)

105화 

그의 품에 안겨있던 시아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한 상태였다. 라크시스는 시아를 살피느라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다.

그때,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절규했다.

‘아아악! 이 봉투들은 또 뭐야! 어느 깜찍한 녀석이냐, 응? 내가 일할 땐 장난치지 말랬지!’

먼 곳에서 이번엔 저 아니에요, 하고 애타게 외치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라크시스는 젖은 눈으로 겨우 고개를 들었다. 잘 관리된 고가구와 사자 문장이 수놓아진 벨벳 휘장, 한때 흰올빼미가 살았을 것같이 생긴 새장과 유리함에 보관된 중세 기사의 갑옷.

아치형 창으로 사방이 탁 트인 가운데, 햇살이 비치는 방에는 온기가 감돌았다. 책상에 앉아있던 여자가 제 머리를 쥐어뜯다가, 자신을 흘겨보았다.

‘넌 또 누구니? 집사가 새로 뽑았다던 사람들이 너희야?’

사자의 갈기를 닮은 풍성한 곱슬머리에, 후추처럼 뿌려진 자잘한 주근깨에 잔뜩 찌푸린 인상까지. 다만 기억하는 것과 달리 여자의 눈동자는 에드먼드 3세와 비슷한 회색이었다.

수북이 쌓인 봉투 더미 안에서 루드윅과 요르문이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친위대 갑옷을 입은 모습이 중세 재연 행사라도 하는 것처럼 사실적이다. 넝마가 된 코트를 걸친 라크시스에게서 은발이 유독 반짝였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여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요르문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로드 슈테른베슈테크?’

아스타의 손녀, 레오나는 똑같이 당황한 눈으로 되물었다.

‘설마, 그쪽이 백삼십 년 전의 이방인……?’

라크시스는 작게 잘린 오이 샌드위치를 집어 들며 기묘한 회상을 마쳤다.

마도 시대로 돌아온 이후 새로운 기억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포처럼 천천히, 뭉근하게 녹아들었다. 중세로의 시간 여행 전, 원래의 자신이 살아오던 시간대의 기억에 시아와 함께 바꿔버린 중세 이후의 새로운 시간대의 기억이 서서히 겹쳐 든 것이었다.

두 개의 평행 세계가 하나로 합쳐진 느낌이랄까. 영문도 모르고 받았던 서류 봉투들을 열자, 뒤늦게 저도 모르는 기억이 불쑥 솟아올랐다. 이건 어디와 계약할 서류였고, 저건 누구의 저택에서 남은 일을 논의해 보자는 편지고.

덕분에 일 처리는 문제없이 끝났으나 당황스러운 건 여전했다. 남의 과거를 엿보는 것 같았달까. 마치 까먹고 있던 일을 눈앞에 닥쳐서 기억해 내는 기분이었다.

또 다른 나는 달라진 시간을 이렇게 살아왔구나. 평행 세계의 자신의 삶에 익숙해지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라크시스라는 존재 자체가 변한 것이 아니었기에 행동거지나 생활 습관은 그대로였다는 걸 그나마 위안 삼는 정도였다.

‘대체 이런 짓을 매번 어떻게.’

그런 의미에서 라크시스는 지금껏 시간 여행을 견뎌온 시아를 꽤나 대단한 사람이라 평가했다.

라크시스는 옆에 앉은 시아를 흘긋 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굳어있었다. 심각해 보이기까지 하는 게 고민이 많아 보였다.

“시아, 어디 불편합니까?”

“아뇨, 그냥.”

레오나가 걱정스레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왜? 뭐든 편하게 말해도 괜찮아. 당신은 할머니가 가장 신경 써달라고 했던 손님이란 말이지.”

머뭇거리던 시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카얄은 죽었나요?”

* * *

“그럴 줄 알았어요.”

“무엇이 말입니까.”

라크시스는 시아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시아는 여전히 생각이 많은 듯 보였다. 저 앞에서 루드윅이 호들갑을 떨며 레오나에게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현 백작, 레오나 슈테른베슈테크가 친히 성을 구경시켜 주고 있는 중이었다. 자랑할 만한 보물이나, 특별한 장소가 아닌 이상 집사에게 손님 안내를 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지만 레오나는 할머니의 손님을 위해 직접 나섰다.

요르문은 루드윅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서는, 뒤따라오고 있는 시아를 자꾸 돌아보았다. 루드윅이 시끄러워서인지 어지간히 누님과 같이 다니고 싶은 모양이었다.

라크시스는 그런 요르문에게 턱짓으로 아직 안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시아의 기분이 금방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카얄이요. 그렇게 쉽게 죽을 인물이 아닐 것 같았다고요.”

시아는 레오나가 들려준 이야기를 되새김질했다.

‘정확히는 죽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고 해야겠지.’

시아 일행이 백삼십 년 전의 다무스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아스타와 에드먼드는 사제 발자크 에이클레이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저주를 쓰던 사도야. 혹시 모르니 불태워 버리는 건 어때?’

‘…본보기를 보여야겠지. 반역자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그렇다면 광장에 걸어두는 게 낫겠네.’

사제 발자크 에이클레이의 시체는 결국 일주일 동안 광장에 매달리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반역과 이단의 죄를 동시에 물어,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도록 명을 내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죽은 발자크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는 듯했다.

‘국왕 전하, 큰일 났습니다! 죄인의 시체가 전혀 부패하질 않고 있습니다!’

숨이 끊어진 걸 직접, 그것도 여러 차례 확인한 후였다. 아스타는 검은 마법사가 당연히 죽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광장에 걸린 발자크의 시체는 아스타가 처음 창을 꽂아버렸던 그 순간과 다를 바 없이 선혈이 흐르는 상처며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피부까지 그대로였다.

‘에디, 난 분명.’

‘안다. 나도 그대와 같이 확인하지 않았나. 아무래도 스스로를 사도라 칭하던 게 그냥 한 말은 아니었나 보군.’

반역자의 말로를 알리기 위해 광장에 걸어두었던 것은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발자크가 정말로 신이 굽어살피는 사제가 아니었냐는 수군거림이 암암리에 돌았고, 잔존해 있던 제국의 국교회 사제들이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에드먼드는 결국 발자크의 시체를 내려 화형시키기로 결정했다. 광장 한가운데에 화형대가 세워지고, 다시 한번 반역자의 죽음을 사람들 앞에 공표하는 날이 되었다.

화형식에는 에드먼드와 아스타도 참석했다. 불이 번지지 말라고 나뭇단 주변에 돌을 두르고, 발자크의 시체 주변으로 기름을 부어 불씨를 던졌다. 썩지 않는 시체에 대한 소문으로 구경꾼이 바글바글했고, 그를 악마라고 손가락질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귀족들도 국왕의 편임을 증명하기 위해 상당수 참석한 상태였다.

그러나 상황은 에드먼드와 아스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끄아아아! 불이다, 불이야!’

‘주군, 불이 이쪽으로 옵니다!’

‘전하, 일단 피하십시오! 불이 옮겨붙으려 합니다!’

‘도망쳐! 불이 쫓아온다아!’

바람이 크게 분 것도 아니었다. 기름이 새 나가지도 않았다. 그러나 화형대에서 시작된 불길은 바깥으로 번져 사람들이 가득한 광장으로 질주했다. 가까이 있던 자들 몇몇이 순식간에 화마에 삼켜졌다.

불길이 휘몰아쳐 마구 소용돌이쳤다. 아스타가 불의 정령으로 급히 막지 않았더라면 대참사가 벌어질 뻔한 사건이었다.

‘피해자는? 얼마나 되느냐?’

‘그나마 백작님 덕에 끔찍한 일은 막았습니다만. 하지만 전하, 그것보다는 시체가…….’

에드먼드는 보고를 듣고 신음을 흘렸다.

발자크의 시체가 사라졌다. 불에 타 없어진 것인지, 누군가가 들고 사라졌는지 알 순 없었지만 잿더미에 뼈조차 남기지 않고 자취를 감춘 것을 보면 애초에 불에 타지 않았던 것 같았다.

게다가 불에 희생된 사람들은 모두 손쓸 겨를도 없이 새까맣게 타 죽어있었다. 물을 뿌리고 모래 위를 굴러도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미라처럼 바싹 타올라 시신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에디. 이건 저주야.’

‘…카얄은 끝까지 순순히 죽을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군.’

뒤늦게 조사한 바에 따르면, 불길에 희생된 구경꾼들은 모두 독실한 국교회 신자였다고 했다. 정확히는 발자크가 퍼트린 이단 황혼 국교회를 믿던 자들이었다.

개중에는 이자벨라의 시녀, 세머빌 자작 부인도 있었다. 아스타와 에드먼드는 불길에 죽어가면서도 성녀 상을 꼭 쥐고 있던 희생자들을 보며, 사도 카얄과의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레오나는 이야기를 충격받은 듯한 시아를 보며 안심시키듯 손을 잡아주었다.

‘하지만 살아있더라도 레이디 켈튼이 기억하던 것만큼 강하진 않을 거야. 당신 때문에 미궁 속의 봉인은 손도 못 대고 내몰렸으니까. 한 번 숨이 끊어진 몸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걸리지 않겠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찌 됐든 시아 자신이 중세로 이중 시간 여행을 한 것 때문에 카얄이 예상치 못하게 한 방 먹은 건 분명했으니까.

시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사실 카얄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는 아예 존재할 수 없었겠죠.”

지금의 그녀가 존재할 수 없었다니. 라크시스는 시아와 속도를 맞춰 걷다가 우뚝 멈춰 섰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카얄이 봉인을 건드리고 다녔던 바람에 봉인이 불안정해졌고, 그렇기 때문에 제가 과거로 온 거잖아요.”

반대로 말하자면, 카얄이 진작에 죽어 없어졌다면 시아의 시간 여행도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는 뜻이었다. 시간 여행으로 마도 시대에 온 시아 켈튼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단 소리다.

만약 시아가 시간 여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라크시스의 눈동자가 깊은 바다처럼 고요히 일렁였다.

‘내가 그녀와 만날 일은 없었겠지.’

시아와 만나지 않는 시간대의 자신이라. 상상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이미 제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있었으니까.

라크시스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봉인이 약해질 때가 되어서 불안정해졌을 수도 있었겠지요. 굳이 카얄 때문이 아니더라도요.”

어, 그럴 수도 있겠네. 봉인이 불안정해지는 건 당연히 카얄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뭐가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시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면 어찌 됐든 저는 시간 여행을 할 운명이었을 수도 있다는 거네요?”

라크시스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그렇죠. 그렇게 나와 만나는 것이 당신 운명이었을 수도.”

“아니, 그 운명이 그 운명이 아니라.”

말문이 턱 막혔다. 귀 끝이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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