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검은 마법사는 죽었다.
“…하.”
기다렸다는 듯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스타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후련하면서도 허무했다. 이렇게 창 하나로 끝내버릴 수 있었던 걸. 지금까지 에드먼드를 향한 불신으로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채 죽어왔었다니.
문득 실소가 흘러나왔다.
돌이켜 보면 이번 생의 변화는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방인을 맞이하고 제국군의 기습을 막아냈다. 한발 늦은 에드먼드와 함께 만찬을 즐겼고, 이방인들도 그 자리에 함께 했다.
다만 에드먼드가 선물한 목걸이를 레이디 켈튼에게 걸어주고 그의 질투심을 자극해 보았다는 게 차이점이었달까. 치졸하다면 치졸한 마음이자, 동시에 에드먼드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미움 때문에 벌인 일이었다.
에드먼드는 왜 이번 생에서 다르게 행동했을까. 다무스를 위한 제례 의식에 왜 참여하겠다고 마음먹었을까.
저주가 풀린 에디는 고백했다. 선왕비의 보석인 그 목걸이가 다른 여자의 목에 걸려있는 걸 본 순간 저주에 걸려 스스로의 감정을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비참함을 참을 수 없었다고.
만약 내가 그 수많은 세월 동안 에드먼드를 단 한 번이라도 믿었더라면. 나를 향해 사랑을 외치던 과거의 철부지 왕자를 한 번이라도 돌아보았더라면.
그랬다면 에드먼드가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을까.
미래에서 온 이방인, 레이디 켈튼의 역할은 어쩌면 그 사소한 자각을 일깨워 주는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후회해도 늦었지. 그래도 먼 길 돌아 제자리를 찾아왔어.”
길고도 힘겨웠던 싸움은 결국 끝이 났다. 그녀도, 악마 숭배자로 몰렸던 성의 사람들도 모두 살아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비껴서 투명한 햇살이 길게 비쳐들었다. 백지처럼 새하얀 빛이었다.
새로운 시간. 처음 맞이하는 또 다른 시작.
이젠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아스타.”
아스타는 낮게 갈라진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어느새 에드먼드가 다가와 있었다.
그는 말없이 두 팔을 벌렸다. 타고난 골격이 작고 허약해 두껍게 걸친 망토가 아니었다면 볼품없어 보였을 남자였다.
그러나 아스타의 눈엔 남자의 품이 그 어느 바다보다도 넓어 보였다. 아스타는 쇄빙선처럼 에드먼드에게 달려가 안겼다.
서로의 체온이 이토록 뜨겁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아스타의 눈에서 용암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젠 그대가 울보가 됐군.”
“…그래도 평생 운 걸 합치면 네가 더 울보야.”
에드먼드는 아스타를 터질 듯 끌어안았다. 갑옷도 으스러뜨릴 만한 사랑이었다. 아스타는 에드먼드의 도닥임 속에서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왕궁의 모든 이들이 숙연히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 때였다.
“아스타.”
“…뭐.”
아스타는 발개진 눈으로 에드먼드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었다. 망토의 어깨춤에 달린 흰여우 털이 축축해져 있었다.
아스타는 슬쩍 그 털을 문질러 닦았다. 부끄러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드먼드 앞에서 울다니.
“…더 부드러운 여우를 잡아서 새로 망토 하나 해줄게. 아님 담비가 좋아? 말만 해.”
멋쩍어서 변명처럼 제 무력을 뽐냈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꽤 심각한 얼굴이었다.
“왜.”
아스타는 그제야 그가 제 허리춤의 가죽 주머니를 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머니엔 제국의 마법사가 만든 신호기가 들어있었다.
뒤늦게 신호기에서 규칙적인 진동이 울리는 걸 알아챘다. 아스타는 황급히 주머니를 열었다.
레이디 켈튼 쪽의 버튼에서 초록 불이 점멸하고 있었다. 계획과 다른 일이 발생했을 때 알리는 용도로 정해둔 신호였다.
생각해 보니 레이디 켈튼과 라크시스 옌이 미궁에 들어간 지는 꽤 오래되었는데,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었다. 공간이동이라는 차원이 다른 마법도 손쉽게 해내는 마법사가 함께 있는데. 광룡의 봉인을 찾으려면 진작 찾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불안이 엄습했다. 만약 그쪽에 정말로 문제가 생겼다면, 그건 라크시스 옌도 해결 못할 정도의 사건이 터졌다는 뜻과도 같았다.
“에디, 나.”
“가 봐라. 이곳은 내가 수습하고 있을 테니.”
에드먼드도 적잖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아스타는 고개를 끄덕이곤 급히 요르문과 루드윅을 찾았다.
분명 요르문 켈튼이 아까 저쪽 기둥 뒤로 돌아갔었지.
“그대들도 보았나? 레이디 켈튼 쪽에서 온 신호 말이야.”
그러나 요르문과 루드윅이 있어야 할 기둥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 없었던 사람처럼 작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이다.
“…로드 켈튼? 로드 젤마니?”
아스타는 허망하게 그들의 이름을 불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순간 싸늘한 직감이 전신을 강타했다.
‘이방인이 미래로 돌아갔다.’
그때 반짝이는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스타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들었다.
마찬가지로 시아 쪽 신호의 불빛이 점멸하고 있던, 요르문의 신호기였다.
* * *
“그 후 할머니는 곧장 다무스 신전이 있던 곳으로 가셨었지.”
하지만 그곳에도 이방인들은 없었다. 완전히 무너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된 신전의 터 한가운데에 있는 건 빛나고 있는 신호기뿐이었다.
‘잔해에 깔려서 버튼이 눌렸던 모양이네.’
행여 시아와 라크시스가 다치기라도 했을까 주변을 살폈지만, 핏자국이나 찢어진 옷가지 같은 건 발견되지 않았다.
저 멀리 다무스 석상의 머리가 반파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지진이나 산사태 정도의 재해가 일어나야 벌어질 수 있는 참상이었지만, 아스타는 시아와 라크시스가 이 밑에 깔려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원하던 봉인을 제때 찾았는지가 걱정되었을 뿐이었다.
‘두 사람도 원래 시대로 돌아간 거겠지.’
유성우가 떨어지던 밤, 레이디 켈튼은 자신을 시간 여행자라고 말했다.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간 여행 탓인지 그녀는 내내 긴장하고 있었다. 미궁을 최대한 빠르게 열어달라는 요청을 한 것도 언제 자신이 원래 시대로 돌아갈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가버릴 줄은 몰랐는데.’
짧은 만남이었으나 그 어떤 만남보다도 강렬했다. 시아 켈튼은 미래에서 온 수많은 이방인 중 유일하게 시간의 굴레를 끊어준 사람이었으니까. 덕분에 고마웠다고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아스타는 돌가루만 남은 신전 터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그러다 소임을 다해 빛을 잃은 붉은 심장과 현자의 별을 찾았고, 시아에게 걸쳐주었던 두터운 망토도 흙더미에서 발견했다.
입고 가지. 기념으로라도. 아스타는 괜히 중얼거리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운이 좋으면 백삼십 년 후의 레이디 켈튼을 만날 수도 있을 터였다. 마법사는 마력이 많을수록 오래 사니까. 아스타는 자신이 다무스에서도 손가락 안에 드는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혹시 모를 먼 훗날을 기약했다.
“그렇지만 아스타는…….”
시아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제아무리 아스타라도 백삼십 년이란 세월을 버티기엔 버거웠나 보다. 그녀와는 결국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아스타와 꼭 닮은 레오나를 마주 보기가 힘들었다.
“괜찮아. 할머니는 오래 사셨거든.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
레오나는 홀홀 웃던 아스타를 떠올리며 조용히 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할머니는 당신을 유독 보고 싶어 하셨지. 다무스가 다무스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게 제국인 덕분이라는 역설적인 소리도 자주 하셨고.”
시아가 전해준 우두법은 실제로도 꽤 효과가 있었다. 의심 많던 보좌관 알렉스까지도 나서서 접종을 권장할 정도였다.
‘주군, 정말로 역병이 돌지 않았습니다!’
소의 고름을 끝까지 거부한 일부와 민간에서 소독되지 않은 도구로 이차 감염을 일으켜 죽은 사례 등을 제외하곤 다무스의 사람들은 정말로 천연두에 대한 면역력을 가졌다.
대항해시대 당시 제국에서 식민지를 점령할 때 쓰던 방법은 천연두에 면역력이 없는 지역에 천연두 환자가 쓰던 담요나 옷가지를 나눠주는 것이었다. 점찍어 둔 나라 전체가 역병으로 쇠약해졌을 때, 천연두를 앓았던 군인들을 모아 정복 전쟁을 벌이곤 했다.
그렇게 점령당한 지역 대부분은 마도 시대인 지금까지도 제국의 일부로 남아있었다. 마정석 광산으로 유명한 북부의 지르가나, 남부의 술란, 남대륙의 가멜 등이 그러했다.
그러나 다무스는 시아 덕분에 유일하게 다무스 왕국으로 온전히 남아있을 수 있었다.
제국령의 씨즐턴이 아닌, 대륙 서부의 제도 다무스.
역사가 바뀐 탓에 씨즐턴이란 제국식 지명은 더 이상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제국령 씨즐턴을 유일하게 기억하는 시아 일행에게 있어 이제 ‘다무스 왕국’은 기묘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였다.
“모국의 땅을 사라지게 했으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라크시스는 반듯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앉아 천천히 찻잔을 들었다. 조이지도, 그렇다고 느슨하지도 않은 넥타이가 셔츠를 가르고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그의 입술을 적시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찻물 한 방울까지 명화의 일부처럼 보였다.
레오나는 할머니의 평가를 되새기며 무의식적으로 감탄했다. 지금껏 무수히 만나온 제국의 귀족 중 가장 귀족이란 호칭이 어울리는 자였다는 평이었다.
‘그래서 마법을 쓸 때도 가장 무서워 보였다 하셨지.’
몸에 밴 매너와 관습처럼, 경악할 만한 규모의 마법도 숨 쉬듯 아무렇지 않게 해버리곤 했다니까.
레오나는 찻잔 너머로 라크시스를 넘겨보며 넌지시 물었다.
“…고대 마법사에게도 제국이 모국인가?”
라크시스는 흐응, 하는 감탄사와 함께 길쭉한 다리를 느긋하게 꼬았다.
“일단은 제국의 자본을 가진 사람이라서 말입니다. 다무스산 홍차 값이 지나치게 오른 걸 빼면 그다지 상관없긴 합니다만.”
기억하던 것에 비해 다무스산 홍차의 값이 세 배는 비싸졌다. 다무스의 영향으로 습관처럼 차를 마시게 된 제국인들에겐 실로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하지만 라크시스에게 그 정도 푼돈은 사실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나도 모르는 나의 일이라.’
시간 여행이란 정말이지 특별하고도 불쾌한 경험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주변 환경과 인간관계, 크고 작은 사건들이 통제되지 않은 채 변화하는 걸 가만히 받아들여야만 했으니까.
수천 년을 고대 마법사로 모든 것의 정점에서 살아온 라크시스로서는 제 의지와 별개로 노는 일을 겪어본 게 처음이었다.
‘예컨대 내가 또 다른 사업을 벌렸다든가 하는 것 말이지.’
마도 시대로 돌아오자마자 라크시스가 맞닥뜨린 건 다름 아닌 수많은 서류와 계약서였다. 갑자기 나타난 마력 신호를 감지한 아르카나 중앙 우편국에서 한참 밀린 우편물들을 공원의 비둘기 떼처럼 보내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