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안 들킬 줄 알았지? 왕을 구워삶고 저주로 사람들을 세뇌했으니까. 수틀리면 미라로 만들어 죽여버리면 그만이고.”
“나, 나는, 그저.”
“알아. 네가 남긴 일기 다 봤거든. 카얄 저놈이랑 계약한 이유는 네 복수 때문이지. 네 오라비가 황위 계승을 위해 널 치워버리려 했던 거였고.”
요르문은 무릎을 팔걸이 삼아 털털하게 쪼그려 앉았다. 이자벨라와 눈높이가 같아지자 그녀의 불안한 시선이 곧바로 와 닿았다.
저주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여온 악녀라기엔 지나치게 가냘프고 불안정했다. 한 나라의 왕을 꼬여낸 요부? 정사를 치르기도 전에 기절할 상이다.
요르문은 품 안의 또 다른 책을 만지작거렸다. 예배당에 가기 전, 우연히 들른 곳에서 발견한 책이었다. 그녀는 죗값을 치러야 마땅한 자였지만.
그래도 진실은 알려주는 게 낫겠지.
“그거 알아? 카얄은 애초에 네 편이 아니었다는걸. 아니, 그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는걸.”
“…악마 따위와 진심으로 한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눈높이가 같아지자 이자벨라는 한층 압박감을 덜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요르문은 이자벨라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네 배 속의 아이, 케르딕의 아이야.”
“…뭐?”
“인간은 나약하지만 동시에 무엇보다도 강해질 수 있지. 카얄은 네가 복수심에 미쳐 저주로 사람을 해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어지도록 만든 거야.”
이자벨라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요르문은 한숨을 쉬었다. 그도 이 사실을 알고 놀랐는데, 당사자인 이자벨라는 얼마나 충격을 받겠는가.
“그, 게 무슨.”
“네 오라비를 부추겨 너와 네 어머니를 쫓아내도록 한 건 카얄이었다고. 케르딕이 널 강간하고 황위를 빼앗도록 만든 게 카얄이었다는 말이야.”
요르문은 결국 품 안에 있던 책을 보여주었다.
그건 사제 발자크 에이클레이의 성서였다. 이걸 발견한 건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예배당 지하의 참상을 발견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왕궁 지하에 위치한 자그마한 고해성사실이 유난히 눈에 밟힌다며 루드윅이 시간이 모자라도 한 번만 수색해 보자고 졸라 어쩔 수 없이 동참해 주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안엔 카얄이 이자벨라를 입맛대로 움직여 줄 패로 만들기 위해 저질렀던 모든 범죄의 증거가 모여있었다. 이자벨라에게 수면제를 탄 술을 건넨 귀족, 그녀가 휴게실에서 잠들었다는 사실을 알린 시녀, 망을 봐준 시종들, 그녀가 임신했을 시기를 거짓증언한 의사.
이복동생을 강간한 오라비.
이것은 이자벨라에게 들켜서는 안 될 사실임과 동시에 케르딕에게 약점이 될 수 있는 증거였다. 이 사실이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 케르딕은 곧바로 황좌에서 끌어내려질 테니까.
그래서 카얄은 모든 증거를 가지고 이자벨라와 함께 제국을 떠버린 걸까. 황제가 된 케르딕이 제 약점을 쥐고 있는 발자크를 가만 둘 리 없었을 테니.
요르문은 이자벨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책을 받아 든 그녀의 팔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 아아.”
결국 이자벨라는 실성하고 말았다.
“아……. 하하, 아하하하, 하하하! …흐. 흐윽, 끄흑… 흐흐흑…….”
혼이 나간 사람 같았다. 머리를 쥐어뜯거나 가슴을 치진 않았다. 소리를 지르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웃다가 울다가, 그러다가 웃으면서 울고 울면서 웃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살아남기 위해 악을 쓰며 발버둥 치던 여인은 이제 모든 것을 체념하고 말았다. 이자벨라를 붙들고 있던 기사들도 말없이 그녀를 놔주었다.
카얄이 제 절박함을 이용했을지언정, 목표가 다를지언정 가는 길은 같을 거라 생각했겠지. 이 모든 비극이 카얄에 의해 꾸며졌다고 생각하진 못했을 것이다.
이자벨라는 처음부터 카얄에게 이용당했다. 어떻게 보면 케르딕보다도 더한 자의 손을 잡은 셈이었다.
‘복수를 위해 자신을 지옥으로 내몬 자와 함께했으니.’
충격이 크겠지. 요르문은 창에 꿰뚫려 괴로워하는 발자크를 흘긋 보곤 이자벨라의 손에서 발자크의 성서를 빼내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요르문이 성서를 가져가게 내버려 두었다.
“이건 에드먼드에게 줄 거야. 당신 남편.”
초점 없는 눈동자가 멍하니 요르문을 향했다. 남편이라는 단어가 이자벨라의 심장을 찌른 듯했다.
“에드먼드가 그쪽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기회를 줄지도 모르지.”
요르문은 천천히 일어났다.
“그래도 살아남긴 힘들 거야. 당신은 살인자니까.”
워낙 한바탕 소란이 일었던 터라 이자벨라와 요르문의 대화는 그녀를 붙들고 있던 기사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눈에 띄게 넋을 놓고 있는 이자벨라를 보고 요르문이 심상치 않은 말을 했음을 직감했다.
에드먼드는 제 곁으로 온 요르문에게 나직이 물었다.
“그대가 내게 준다던 선물의 결과가 저런 건가?”
“나머지는 다무스의 국왕 전하께 맡기죠. 난 할 수 있을 만큼 했으니까.”
요르문은 질린다는 듯 기지개를 켜며 두 개의 성서를 내밀었다. 에드먼드가 품 안에 증거물을 고이 넣으며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런데 그대와 함께 다니던 남작은 어디에 있는가?”
엥. 요르문은 뒤늦게 루드윅이 안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루드윅?”
어디 간 거야. 여기 올 때 분명 같이 왔었는데. 인상을 쓰고 거대한 홀을 샅샅이 훑자 기둥 뒤에 빼꼼 튀어나온 투구가 보였다.
다가가서 투구 끄트머리를 잡고 휙 벗겨내자 곰 같은 덩치로 겁에 질린 루드윅이 나타났다.
“아니, 지금 여기서 뭐 하나? 이제 와서 미라가 무서운 거야?”
“그, 그게 아니라.”
자네, 군인이었다며. 전쟁까지 다녀온 사람이 시체 하나 못 본단 말이야? 물론 트라우마를 겪는 군인이라면 못 볼 수도 있었지만, 요르문은 그런 세심함 따위는 말아먹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요르문의 핀잔에 루드윅이 덜덜 떨며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요르문의 얼굴이 발자크의 성서를 발견했을 때보다 더 파리하게 질리고 말았다.
【 새로운 시작 】
아스타는 고삐를 쥐어 말을 세웠다.
말 등 위에 앉아 피투성이가 된 사제를 내려다보니 그토록 초라해 보일 수 없었다.
반복되는 무수한 세월 속에서 끊임없이 그녀를 죽여왔던 검은 마법사. 최후의 순간엔 언제나 아스타가 저 자리에 있었다. 엉성하게 깎아놓은 창에 심장이 꿰뚫린 채, 밀려드는 횃불과 핏발 선 영지민의 경멸을 마주해야 했을 때.
검은 마법사는 무리의 선봉에 서서 언제나 이렇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스타는 투구를 벗고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끄흣, 크흐윽. 아흑…….”
발자크는 옴짝달싹 못하고 창을 부여잡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다 아스타가 다가오자 비릿하게 웃으며 눈을 치떴다.
아스타는 회고하듯 나직이 입술을 뗐다.
“이런 순간이 오리라곤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어.”
자신을 노려보는 눈빛이 이젠 그저 우스웠다. 놈이 두렵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참 신기하게 느껴졌다.
“난 언제나 네 손에 죽었으니까.”
검은 마법사에게 창을 날린 건 무의식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홀에 들어서며 사제의 얼굴이 그녀가 기억하던 검은 마법사의 낯짝과 똑같다는 걸 인지한 순간,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발자크, 아니 사도 카얄은 입 안에 머금었던 피투성이 타액을 아스타의 얼굴에 뱉었다. 아스타를 조롱할 심산이었으나, 침을 뱉을 기력도 없었는지 질척한 타액은 아스타의 발치에도 닿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아스타는 허리춤의 검을 빼 들어 발자크의 머리를 향해 내리찍었다. 살벌한 기세에 움찔 놀란 카얄의 볼에 가느다란 피가 실처럼 맺혔다.
돌가루가 구름처럼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그녀의 검은 카얄의 관자놀이를 아슬하게 비껴있었다.
“카얄.”
“…….”
“네 창조자를, 형제를 배신하고 과거를 멸망시킨 사도 미옌이여.”
수도 없이 죽고 죽어 이젠 무덤덤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놈이 간사한 혀를 어떻게 놀리든 간에 단칼에 목을 베어내겠다고 결심했는데.
막상 걸레만도 못한 꼴의 검은 마법사를 마주하니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솟구쳤다. 이유를 알고 싶었다.
왜 내가 그런 비극을 겪어야만 했나.
아스타는 먹먹하게 잠긴 목으로 물었다.
“왜 다시 광룡을 부활시키려 했던 거냐. 어째서 또다시 광룡이 되려 했던 거냐고.”
발자크가 힘없이 조소했다.
“…네까짓 게 알아서 뭐 하게.”
“그건, 내가!”
울분 서린 포효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카얄이 비명을 질렀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백성들이, 나의 다무스가!”
“끄아아아아아!”
지옥에서 들릴 법한 절규였다. 분노한 아스타가 카얄의 내장에 꽂힌 창을 비틀어 쑤셨기 때문이었다.
“…영겁의 세월 동안 네게 짓밟혀 왔기 때문이지!”
아스타의 손짓 몇 번에 카얄은 어떻게 살아있나 싶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날아오는 창에 꿰뚫렸을 때 즉사했을 터였다. 그럼에도 죽지 않는 건 그가 사도라는 이름을 달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아스타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카얄은 사도치고 지나치게 약했다는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는 그 어떤 마법도 사용하지 못했다. 남의 생명을 대가로 하는 저주가 카얄이 부린 마법의 전부였을 뿐. 그가 정말로 전지전능한 사도였다면 이자벨라와 케르딕을 이용해서 ‘인간’처럼 일을 꾸밀 필요도 없었을 터였다.
이제 카얄의 눈은 핏줄까지 다 터져 흰자위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비참한 모습이었다.
“…넌 몰라.”
한참 후에야 카얄은 겨우 말을 뱉었다.
“아니, 너 같은 미물들은 영원히 모를 거다.”
그는 피를 토해내며 씁쓸하게 웃었다.
“갈리프가 얼마나 불공평한 신이었는지.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였는지.”
아스타는 움찔 놀랐다. 카얄의 호흡이 느려졌기 때문이었다.
사도가 인간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이 세상에 어둠만큼 완벽한 신은 없다는 걸.”
카얄의 시선은 허공을 향해있었다. 그의 눈에 아주 오래전, 그가 아직 갈리프의 사도였던 시절이 비쳐 들었다.
“네가 죽어 천칭에 오르게 되면, 그때 깨닫겠지.”
“…….”
“멍청한 새끼.”
짧은 비웃음을 끝으로 사제 발자크 에이클레이는 마지막 숨을 들이켰다.
고개가 툭 떨어졌다.
아스타는 황급히 그의 코에 손가락을 대보고 목덜미의 맥도 짚었다. 드나드는 바람도, 일말의 미동도 없다.
생명의 징후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