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아니, 그렇게 할 순 없다. 그대는 어찌 눈과 귀를 닫고 사람의 목숨을 논할 수 있는가! 무엇들 하는가, 당장 창을 거두어라! 내 직접 죄인을 가려낼 테니!”
싸늘한 정적이 찾아왔다. 이자벨라조차 겁에 질려 숨을 죽였다.
살얼음판 수준을 넘어서 혹한의 칼바람이 불었다.
홀 안엔 오로지 대로한 왕의 거친 호흡소리만 또렷하게 맴돌 뿐이었다. 이젠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 진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오, 이런. 신이시여.”
에드먼드는 목소리의 주인을 노려보았다.
“…발자크 에이클레이.”
뱀 같은 걸음이었다.
천사 같은 금발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으로 반짝인다. 금욕적인 표정이 목 끝까지 잠가 올린 검은 사제복과 어우러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발자크가 단상을 오르는 순간, 그에게서 낯선 얼굴을 보았다.
발자크는 분명 비통해하였으나 동시에 희열하고 있었다. 기묘하게 일그러진 사제의 입꼬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진 아무도 몰랐다.
따각. 따각.
왕좌 바로 앞까지 다가온 발자크는 좌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주신 디아우스의 신실한 종으로서 작금의 사태를 지켜보건대, 이 안에 범인이 있는 것이 확실하군요.”
“그대는 나서지 말라.”
“전하, 위대하신 에드먼드 국왕 전하. 어찌 그러셨습니까? 어둠이 전하의 마음을 어디까지 타락시킨 것입니까?”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발자크는 한순간에 얼어붙은 왕궁의 중앙 홀을 천천히 배회했다.
발자크는 사람들의 낯에 경악이 서린 것을 하나하나 눈으로 짚어가며 확신하고 있었다.
흔들리고 있구나. 어리석은 것들.
“국왕 전하. 가엾은 하녀 아이에게 저주를 걸어 당신을 따르던 충직한 가문을 반역자로 몰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감히 헛소리를.”
“사제 발자크 에이클레이가 신의 이름을 걸고 감히 진실을 고합니다.”
발자크는 슬프게 눈매를 일그러뜨리며 에드먼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에드먼드 국왕 전하께서는 다무스 신전 미궁에 봉인되었던 어둠의 힘에 손을 대셨습니다.”
에드먼드는 기어이 자리를 박차고 발자크의 멱살을 낚아챘다.
“네 이노옴!!”
“차마 밝히기가 두려워 지금껏 침묵하였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자, 여러분. 보십시오!”
하얀 성직 칼라가 볼품없이 뜯겼다. 사제는 성호를 긋고 두 손을 마주 모아 깍지를 끼며 기도를 드리듯 왕의 손목에 매달렸다. 불거진 핏줄과 벌게진 피부에 발자크가 캑캑거렸다.
에드먼드는 발자크의 멱살을 코앞까지 잡아당겼다가 멈칫했다.
발자크가 실실 웃고 있었다.
대체 왜? 뒤통수가 싸늘했다.
“국왕 전하께는 붉은 심장이 없습니다!”
기어코 불씨가 붙었다. 홀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에드먼드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비웃음이 들리는 것만 같다. 목덜미를 잡혀 숨통이 조이면서도 발자크는 흰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키들키들 웃는 얼굴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멍청한 인간. 내가 네놈 계획을 모를 줄 알았느냐?
뒤통수가 얼얼했다. 이윽고 힘 빠진 손아귀에서 발자크가 빠져나갔다. 사제는 미소 서린 얼굴로 두 팔을 벌려 외쳤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분들이 목격자이십니다. 백작령에서 돌아오시던 그 순간부터 전하께는 붉은 심장이 없었습니다!”
“…허, 그래. 그랬던 것 같아.”
“그렇다면 설마…….”
“맞습니다. 에드먼드 전하께서는 악마 숭배자라던 슈테른베슈테크의 백작과 손을 잡고 어둠의 힘을 취하신 겁니다.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무고한 자가 죄인으로 몰리는 상황을 방관하신 거고요!”
소리 없는 비명이 한차례 홀을 휩쓸었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며 왕궁을 혼란하게 하신 후 이제 와 왕비 전하를 진정시키시는 것 또한 당신이 결백해 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국왕 전하?”
수십 쌍의 눈동자가 발자크를 지나쳐 에드먼드를 향했다. 불신이 싹트고 뿌리까지 내린 눈빛.
에드먼드의 낯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이런 식으로 여론 몰이를 준비했다는 건가. 어차피 내게서 붉은 심장을 얻는 건 글렀다 이거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선수를 빼앗겼다.’
이젠 아스타의 군대가 와도 사람들은 에드먼드와 손잡은 악마 숭배자가 왕궁을 장악하려 한다고 믿을 터였다.
요르문 켈튼 쪽에서 이자벨라가 범인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찾아오지 않는 이상.
“그럼 미라가 된 친위대 기사도…….”
“그래, 누구보다 친위대와 가까이 지내시던 분은 바로 국왕 전하시잖아?”
“…에드먼드 전하, 사실입니까? 전하께서 제 아들 도미니크에게 저주를 건 것이 사실이냐는 말이십니까―!”
아들을 잃은 베버 남작은 그대로 실성했다.
“아아……. 에드먼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이자벨라는 아예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또한 연기였다. 힘이 풀려 쓰러진 왕비의 모습에 궁의 사용인들을 에워싸던 창이 일제히 에드먼드에게로 향했다.
이제 사람들은 에드먼드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국왕 전하께선 악마 숭배자나 다름없는…….”
“타락한 자가 신성한 왕국을 노린 것이지!”
“당장 잡아 가두어야 합니다! 우리도 저 미라처럼 저주에 당할지도 몰라요!”
“오, 신이시여, 신이시여……. 가엾은 왕비 전하…….”
언제부터 대기하고 있었는지 모를 성기사들이 발자크의 손짓 한 번에 열을 지어 나타났다. 왕비의 사병이 가세해 순식간에 에드먼드를 포박하고 바닥에 무릎 꿇렸다. 한낱 사제가 일국의 왕에게 할 수 있는 짓은 아니었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발자크에게 반역자라고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전세가 역전되었다. 발자크는 에드먼드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챘다. 격한 움직임에 왕관이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요르문과 아스타에게선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에드먼드는 시뻘게진 얼굴로 고함을 쳤다.
“발자크 에이클레이! 지금 네가 감히 반역을 저지르는 것이야!!”
그러나 발자크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온화하고 평화로운 미소를 만면에 띄울 뿐이었다.
“반역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국왕 전하께서 정녕 저주의 범인이 아니시라면 말씀해 보시지요.”
발자크의 그림자가 에드먼드를 뒤덮었다. 사제 발자크 에이클레이, 아니 사도 카얄은 고개 숙여 에드먼드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오금이 저렸다. 섬뜩한 음성이었다.
[다무스의 아이야. 붉은 심장을 누구에게 주었지? 제국에서 왔다던 여자가 새로운 주인이냐?]
그 순간, 눈앞에 피가 튀었다.
“끄으아아아아악!”
시야가 훤해지고, 멱살을 잡은 힘이 사라졌다. 눈으로 좇기도 벅찬 속도였다. 발자크의 몸뚱이가 낚싯대에 걸린 물고기처럼 왕좌 저 뒤편으로 날아가 처박혀 버렸다.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에드먼드는 멍하니 시선을 옮겼다. 사태를 파악했을 땐 이미 거대한 창이 발자크의 몸을 꿰뚫고 벽에 메다꽂은 후였다.
창끝에서 황금빛 술이 휘날렸다.
“참 잘들 한다. 너희들은 어떻게 단 한 번도 너희들의 왕을 믿어주지 않는 거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참았던 눈물이 벅차올랐다. 에드먼드는 그대로 허물어졌다.
창끝에서 휘날리던 것은 슈테른베슈테크 백작의 상징이었다.
와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왕궁을 휩쓸었다. 문이란 문으로 시커먼 기마병과 보병이 지축을 울리며 쏟아져 들어왔다. 당황한 성기사들과 이자벨라의 사병이 속수무책으로 속박되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또다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제 왕궁을 에워싼 건 에드먼드의 친위대와 아스타의 군대였다.
동시에 소년미가 느껴지는 청량한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제가 좀 늦었죠?”
친위대 갑옷을 갖춰 입은 남자였다. 기사답지 않은 낭창한 체구의 남자는 손가락을 여유롭게 놀리며 투구를 벗었다.
길게 묶은 물빛 꽁지 머리가 해방되듯 찰랑 쏟아졌다. 남자는 에드먼드에게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요르문 켈튼이었다.
“…그래.”
잠깐 사이에 해쓱해진 에드먼드는 핀잔 조로 대꾸하며 요르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늦지 않았다고 체면치레용 대답을 하기엔 정말 위험할 뻔했으니까.
“대신 엄청난 선물을 가져왔는데.”
요르문은 씨익 웃으며 놀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그의 손 끝에서 기하학적인 마법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이윽고 홀 한가운데에 거대한 바람이 고여 들었다.
이동 스크롤이나 순간이동 마법에 익숙한 사람이었다면 그 자리에 무슨 일이 펼쳐질지 쉽게 짐작했을 터였다. 그러나 이곳은 아직 원소를 다루는 정령 마법이 전부인 중세였다.
허공에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림자의 정체를 미처 파악하기도 전이었다.
툭, 투두둑.
“이, 이게 뭐야!”
“으아아악! 미, 미라다아아!”
사용인이고 기사고 할 것 없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수십 구의 미라에 괴성을 질렀다. 예배당 지하의 미라였다. 함께 포박되어 있던 이자벨라의 시녀, 세머빌 자작 부인은 바싹 마른 정원사의 시체에 비명을 지르다 미라와 같이 떨어진 성서를 주워들었다.
“이, 이자벨라 전하.”
세머빌 부인의 눈동자가 빠른 속도로 성서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이윽고 그녀의 주변으로 기묘한 경악이 파도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직 사태 파악이 덜 된 이자벨라는 세머빌 부인이 왜 저를 그리 혐오스러운 눈으로 보는지 몰랐다. 그러다 세머빌 부인이 들고 있던 성서를 발견하곤 낯빛이 창백해졌다.
이자벨라의 필체로 쓰인, 미라 제물의 명부였다.
“그걸 네가 어떻게, 이리 내. 당장 이리 내!”
이리 내! 당장!! 이자벨라는 악을 쓰며 반항했다. 초인적인 힘에 그녀를 붙들고 있는 기사들마저 덩달아 흔들릴 지경이었다.
요르문은 에드먼드의 어깨를 툭툭 치곤 단상까지 밀려든 미라를 사뿐히 밟아 넘으며 이자벨라에게 다가갔다.
꿇어앉은 이자벨라 위로 요르문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역광이 드리웠을 뿐인데, 이자벨라는 소년 같은 여린 얼굴을 보고도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공간을 장악한 대마법사의 마력은 지나치게 압도적이었다. 짓눌린 사람으로 하여금 포식자 앞의 초식동물과 다름없는 기분을 느끼게 할 정도였으니까.
이자벨라는 덜덜 떨었다. 오금이 저렸다.
세머빌 부인에게 있던 명부가 쏜살같이 날아와 요르문의 손에 들어찼다.
요르문은 서늘하게 이죽거리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난 항상 이해할 수 없더라니까. 나쁜 짓을 한 놈들은 꼭 이렇게 명부 같은 증거를 남기더라고.”
시아가 봤더라면 단박에 슈테른베슈테크의 지하 감옥에서 가짜 사제를 협박하던 요르문을 떠올렸을 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