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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101)화 (101/292)
  • 101화 

    “관광지라니 섭섭하네. 레이디 켈튼이 겪었던 시간에선 다무스가 멸망했다고 듣긴 했지만 말이야.”

    귓속말이었는데 정말 귀신같이 들었네. 그나저나 레오나는 냉혈의 사자라 불리던 아스타와 똑 닮은 얼굴이었다.

    아스타의 손녀라고 했지. 요목조목 뜯어보면 에드먼드의 흔적도 조금은 보였다. 아직 제대로 사정을 들어보진 못했지만 아스타와 에드먼드 3세, 그 두 사람은 무사히 비극을 벗어난 모양이었다.

    시아는 민망해져서 헛기침을 했다.

    “…죄송해요, 로드 슈테른베슈테크.”

    “여긴 내 영지야. 당신들은 백삼십 년 전부터 백작령에 머물렀다고 기록된 손님이고.”

    레오나가 신기하다는 듯 웃었다. 본인도 이 상황이 실감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조모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의 손님이라니. 할머니는 돌아가시면서 3518년 3월이 오거든 항상 성의 삼 층 끝방을 깨끗이 청소해 두라고 하셨다. 백작령의 손님이 아주 긴 산책을 마치고 돌아올 거라고.

    처음엔 무슨 소린가 했었다. 할머니가 남긴 유언은 뭐가 됐든 지키려고 하긴 했지만, 이것만큼은 영 이해하기 힘들었다. 오죽하면 말년에 기력이 쇠하셔서 정신이 오락가락하신다는 생각까지 했을까.

    하지만 할머니의 말씀은 틀리지 않았다. 3518년 3월의 어느 날 밤, 성의 삼 층 복도 끝방에서 거짓말처럼 네 사람이 나타났으니까.

    “일단 마저 들어. 배부터 채워야 뭐라도 떠오르지 않겠어?”

    라크시스가 몸을 기울여 시아의 접시에 나이프를 댔다. 부드러운 살코기가 잘려나가며 육즙이 톡 흘러나왔다.

    시아가 지금 대체 뭐 하냐는 듯 쳐다보자 라크시스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먹어봐요. 이제 양고기만큼은 다무스를 이길 지역이 없다 하더군요.”

    “제가 썰 수 있었…….”

    “사람은 장기간 누워있으면 근육을 잃죠. 침대에서 혼자 내려오지 못하던 걸 내가 똑똑히 봤는데.”

    사실이긴 했다. 사흘 내내 잠들어 있었다는 말이 진짜인지 시아는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조차 애를 먹었다. 이거 재활치료가 필요한 수준 아니야? 진지하게 걷기 훈련부터 해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걸 라크시스가 봤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상대는 말로 절대 이길 수 없는 고대 마법사였으니까.

    “그건 헛디딘 거라고요.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시아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부끄러웠다. 그러나 라크시스가 한발 빨랐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어린애처럼 굴어보겠습니까.”

    유연하고도 신속하게 시아의 팔을 붙들더니 이젠 포크로 고기를 찍어 내미는 것이 아닌가.

    라크시스가 능글맞게 웃었다.

    “먹여줄까요?”

    시아는 펄쩍 뛰었다.

    “네? 아뇨, 됐어요!”

    레오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오래된 고성을 눈으로 찬찬히 훑었다. 중세부터 슈테른베슈테크를 지켜온 성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그러나 잿빛 돌벽도, 빛바랜 휘장도, 손때 묻어 반질거리는 식탁과 은촛대도 그저 아름답게만 보일 뿐이다.

    역병을 퍼트린 악마 숭배자가 살았던 곳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레오나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왔던 옛이야기를 떠올렸다. 할머니는 틈만 나면 벽난로 앞에서 자신을 무릎에 앉히고, 낡고 버튼이 부서진 조그만 기계를 보여주었다.

    ‘이 신호기만 남기고 그들은 사라졌지.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들처럼.’

    이런 구닥다리 기계가 뭐라고. 제국의 마도 문명이 온갖 마도구를 생산하는 시대에 태어난 어린 레오나로서는 고장 난 신호기가 매우 시시하게 느껴졌다. 다만 할머니가 눈에 띄게 숨을 몰아쉬던 게 걱정됐을 뿐이었다.

    ‘고맙다고 전해주려무나. 직접 인사를 건네지 못한 걸 미안해했다고도 말해주렴.’

    레오나는 할머니의 주름진 목소리를 회상했다. 영웅담처럼 반복해 왔던 백삼십 년 전, 그날의 이야기였다.

    * * *

    정확히 133년 전 하고도 사흘 전.

    왕궁 기습 작전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왕궁의 화려한 중앙홀은 에드먼드가 귀환한 이래 내내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였다.

    이자벨라가 왕궁 내 모든 사람들을 저주받은 미라 사건의 용의자로 간주하고 홀 안에 가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대들은 모두 주신 디아우스를 섬기는 자들이 아닌가! 분명 이 중에 악마를 섬기는 반역자가 있거늘, 왜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느냐!”

    에드먼드는 진땀을 흘리면서도 이자벨라의 연기에 새삼 감탄했다. 울분을 토하며 모든 사용인을 심문하는 그녀는 내막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로 왕국과 남편을 사랑하는 왕비처럼 보였다.

    이자벨라의 손짓에 그녀의 사병들이 일제히 창을 들어 홀 안에 모인 자들을 에워쌌다. 시종들의 안색이 시퍼레지고 나이 어린 하녀들은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이자벨라는 치가 떨린다는 표정으로 에드먼드에게 다가왔다.

    “전하, 안 되겠습니다. 이들 모두에게 이단의 죄를 물어 처형하시지요.”

    에드먼드가 미라가 된 친위대를 왕궁 한복판에 공개한 이래 가장 먼저 저주의 배후를 찾아 나선 건 아이러니하게도 이자벨라였다. 그녀는 사병을 동원해 지하의 와인 창고에서 한 구의 미라를 찾아냈다.

    미라의 정체는 출신 불명의 하녀였다. 그러나 그녀의 옷에서 다무스 신전의 고대어가 적힌 쪽지가 발견되면서 사건은 일파만파 커져가기 시작했다.

    에드먼드는 그녀의 눈치와 치밀함에도 감탄했다. 다무스 신전의 고대어가 적힌 쪽지라니. 이단의 죄를 묻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증거였다. 이자벨라의 짓이 분명하다. 에드먼드가 귀환한 직후, 혹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그녀는 빠져나갈 구멍을 설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혼자 꾸민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드먼드는 심문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제 발자크 에이클레이를 바라보았다. 날뛰는 이자벨라와 다르게, 그는 현장을 관망하는 척 내내 예리한 시선으로 에드먼드를 보고 있었다.

    발자크의 시선은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발가벗겨진 기분을 느끼게 했다. 에드먼드는 발자크에게 모든 계획이 까발려진 오싹함에 무의식적으로 그를 외면해 버렸다.

    ‘대체 언제 오느냐. 요르문 켈튼, 루드윅 젤마니.’

    사제 발자크 에이클레이가 정황상 검은 마법사이며, 배신자 사도 카얄이기는 했지만 아직 퍼즐이 완전히 맞춰진 것은 아니었다. 검은 마법사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건 아스타였고, 에드먼드는 슈테른베슈테크가 몰락할 때의 상황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발자크가 검은 마법사라는 걸 확신하려면 아스타가 왕궁에 도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친위대와 요르문 일행이 최대한 빨리 통로를 개방해야 했다.

    ‘내가 언제까지 이자벨라를 붙잡아 둘 수 있을까.’

    에드먼드는 기껏 준비해 둔 판이 엎어질까 이자벨라가 왕궁을 휘어잡는 것을 일단 내버려 두고 있었다.

    “와, 왕비 전하. 제발 살려주세요. 저는 그저 추천장을 받아 고용했을 뿐입니다. 반역 세력의 첩자라니요.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왕비 전하.”

    하녀장이 가장 먼저 바짝 엎드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하녀가 새된 외침으로 고자질을 시작했다.

    “저, 전 봤어요! 하녀장님이 죽은 애의 방을 뒤져서 뭔갈 챙겨가는 걸요.”

    “발칙한 것! 내가 언제 그랬다고!”

    고자질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언니 동생하며 함께 빨래를 널고 버터를 만들던 하녀들이 서로를 지목했고, 이름이 불린 귀족들은 끌려 나와 홀 가운데에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그러고 보니 하녀장이 종종 만다크 공작의 기사들과 만났었지. 왕비 전하, 만다크 공작이 최근까지도 다무스 신전의 이단 세력과 연통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은 알고 계실 겁니다.”

    “이건 모함입니다! 왕비 전하, 제가 얼마나 신실한 믿음으로 주신 디아우스께 기도하는지 전하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단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왕궁은 아수라장이었다.

    이자벨라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왕좌에 앉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에드먼드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낌새를 눈치챘다.

    “이자벨라, 진정…….”

    “모두 그만!”

    이자벨라의 노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내 지금까지 그대들의 신앙과 충성을 믿고 있었거늘, 어찌 이리 왕가를 배신한단 말인가!”

    에드먼드는 벌떡 일어나 이자벨라를 붙잡았다. 핏발 선 눈자위는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오싹했다. 에드먼드는 그녀를 붙잡았던 손을 무의식중에 놓쳤다.

    대체 이자벨라는 이렇게까지 해서 얻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이미 나를 얻고, 다무스를 얻지 않았는가.

    권력? 명예? 아니면 아스타에 대한 질투? 그런 거라면 어둠의 힘을 노리면서까지 일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고귀한 신분이었고, 연적은 제거하면 그만이니까.

    당신은 왜 미궁을 열고자 하는 거지? 검은 마법사와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냔 말이다. 미궁 속의 힘은 아무나 가져서도, 가질 수도 없는 힘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모함하고 죽이면서까지 당신이 바라는 건 무엇인가.

    “이자벨라, 잠시 내 말을 들어보시오.”

    “감히 삿된 저주를, 이단의 사악한 마법을 끌어들여 다무스의 몰락을 꾀하다니. 그 죄는 사지를 찢어 불태워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

    “이자벨라!”

    거센 손아귀가 이자벨라의 양어깨를 붙잡아 돌렸다.

    “…전하. 에드먼드 전하…….”

    에드먼드는 이자벨라의 광기 어린 눈동자 너머로 숨어있던 공포가 고개 드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벼랑 끝에 내몰려 갈 곳 없는 자의 발악이요, 절박함이 빚어낸 잔인함에 짓눌려 울고 있는 자의 모습이었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시선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내겐 이 방법밖에 없었어.

    에드먼드는 직감했다. 작전이고 뭐고 일단 그녀를 말려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무고한 자들이 죽어나가고 말 테니까.

    “이자벨라, 진정하시오. 아직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잖소. 심증뿐이지 물증이 확실한 것도 아니고, 재판에 회부하지도 않았으니. 게다가 귀족들에게 섣불리 죄를 물었다가…….”

    이자벨라가 붉어진 눈으로 설핏 미소 지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을 모두 사형시킬 것이다. 에드먼드, 그리해도 되겠지요?”

    왕비가 몸을 돌려 국왕을 외면했다. 그녀를 따라 빙그르르 돌아간 드레스 자락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저 멀리 떠나갔다.

    “이자벨라!!”

    에드먼드는 결국 노호했다. 홀을 울리는 국왕의 분노에 용의자를 에워싸던 이자벨라의 사병들도 국왕의 기세에 압도되어 움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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