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그녀가 알던 과학적 세계와는 정말이지 거리가 먼 경험들이었다. 진짜 살면서 별일을 다 겪어보는구나. 애초에 시간 여행이라는 걸 한다는 자체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였잖아.
이 말도 안 되는 공간은 마법으로 만든 걸까? 아니면 진짜 우주일까. 그렇다면 난 어떻게 숨 쉬고 살아있는 거지. 문득 별 계단을 벗어나서도 돌아다닐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시킨 걸 먼저 하는 게 우선이었다.
“다무스가 그랬지. 천칭에 어둠을 올리라고.”
시아는 정신을 가다듬고 황동 천칭에 집중했다. 천칭의 두 접시 중 어디에 어둠을 올려놓아야 되나 잠시 고민했지만, 무색하게도 그 고민은 금방 해결되었다.
한쪽 접시 위엔 자그마한 빛들이, 다른 쪽 접시 위엔 자그마한 어둠들이 균형을 이루듯 솟아올랐다 가라앉길 되풀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은 밀알보다도 작은 알갱이였으나 어떤 건 크고, 어떤 건 작았다. 그들은 마치 아스타의 정령처럼 벙긋거리며 깔깔거리거나 모여있기도 했다.
시아는 이들을 유심히 살피다 무언가를 깨달았다. 천칭에 큰 빛이 올라가면 큰 어둠이, 작은 빛이 올라가면 작은 어둠이 생겨난다.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저것들은 뭘까. 시아는 자그마한 빛 알갱이 하나를 집어 들어 살폈다. 정말로 정령 같은 몸뚱이가 있었다.
그러다 시아는 빛 알갱이와 눈이 마주쳤다. 개미만 한 크기의 유령 같은 빛은 넋이 나간 듯 입을 벌리고 대롱대롱 매달려서 시아를 바라보았다. 먼지만 한 눈이 조금 커진 듯했다. 놀란 건지, 겁에 질린 건지. 거인에게 잡힌 기분일지도 몰랐다.
시아는 빛 알갱이를 조심스레 놔주었다. 그러자 빛 알갱이가 가느다란 비명을 지르며 천칭 접시가 아닌 다른 곳으로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어떡하지. 저거 저렇게 도망가게 둬도 되나.
“…시키는 것만 할걸.”
시아는 코끝을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손에 든 어둠을 어둠 쪽 천칭 접시에 올렸다.
그러자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시아가 올려둔 어둠을 흡수한 천칭이 반대편에서 거대한 빛을 토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끝 모르고 솟아오르는 빛은 사방을 새하얗게 보이도록 만들 정도의 웅장한 구체를 빚어내 둥실 띄웠다.
어느 정도로 빛이 커졌는가 하면, 시아가 스스로를 태양 앞의 조그마한 탐사선 같다고 느낄 정도였다.
이거 등가교환 아니었어? 내가 천칭에 올린 어둠은 주먹만 했다고!
한순간에 먼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시아가 턱이 빠져라 빛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거대한 빛 덩어리가 돌연 시아를 향해 쏟아졌다.
도망칠 겨를조차 없었다. 설령 여유가 있었다고 해도 개미만 한 시아는 금방 따라잡혔을 것이다. 빛에 삼켜지기가 무섭게 해일에 덮쳐지듯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고 머리가 뎅 하고 어지러웠다.
시간 여행이 시작될 때와 똑같은 느낌이었다. 예고 없이 진행된다는 것과 어디에서 어떻게 눈을 뜨게 될지 모르는 것까지도 똑같을 것 같다는 게 문제였지만.
“뭐가 어떻게 되는지는 설명해 줘야 되는 거 아니야아아……!”
시아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지 못했다. 빛에 완전히 삼켜지기 직전, 입에 담지 못할 욕을 뱉었다는 게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의 전부였다.
* * *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햇볕에 잘 말린 이불 냄새. 늦은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흐릿한 시야로 보이는 건 하얀 시폰 커튼과 깨끗한 방, 이불에 폭 덮인 자신의 몸과 고풍스러운 가구의 끄트머리였다. 그 사이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침대 발치를 서성이고 있었다.
눈이 부었는지 잘 떠지지 않았다. 머리도 아프고. 너무 오래 자면 가끔 이런 기분이 들던데. 팔다리가 저렸다. 이것도 한 자세로 지나치게 오래 누워있을 때 가끔 느끼던 증상이었다.
여기가 어딜까.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조각상에 잡아먹혀 미궁으로 갔던 게 전부였다.
그다음엔 뭘 했더라. 광룡의 봉인을 찾겠다고 미궁에 들어가서는…….
다음에 어떻게 됐더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기껏 인상 깊은 꿈을 꿔놓고 모두 까먹은 것 같아 찜찜했다. 잘하면 생각날 것 같은데.
맞아, 마지막에 욕을 아주 시원하게 퍼부었던 건 기억났다. 대체 누구한테 욕을 한 거야. 불경죄로 날 사형시킬 만큼 높은 사람은 아니어야 하는데.
하필이면 중세로 시간 여행을 했을 때 입방정을 떨었다. 시아는 제발 신변이 무탈하길 빌며 잠든 척 주변 상황을 파악해나갔다.
말소리가 들렸다. 어렴풋이 보이던 실루엣의 주인인 것 같았다.
“라크, 식사 좀 해.”
“나중에.”
“잠깐 뭘 먹고 온다고 누님이 잘못되진 않을 거야.”
“괜찮아.”
“괜찮기는! 이래놓고 또 샤샤리아 피우려고!”
“…안 피운 지 꽤 됐다.”
지금 보니 귀도 정상이 아닌데. 희뿌연 시야만큼이나 귓구멍도 물에 잠긴 듯 먹먹했다. 그러고 보니 라크는 어떻게 됐을까. 요르문은? 루드윅은?
아스타와 에드먼드가 왕궁을 기습하던 중이었는데. 작전은 성공했을까. 이자벨라와 검은 마법사는 붙잡았을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여기는 어디고.
난 또다시 시간 여행을 한 걸까?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려 하는데 자꾸만 웅얼거리는 대화 소리가 들려 정신이 사납기만 했다. 시아는 결국 퉁퉁해진 눈을 깜빡이며 몸을 일으켰다.
“저기 죄송한데, 여긴 어디고 그쪽은…….”
눈을 제대로 뜨기도 전에 시야가 가로막혔다. 빳빳한 베스트가 가장 먼저 볼에 닿고, 셔츠에 얼굴이 파묻혔다. 단단하고 너른 품이 그녀를 조심스럽게, 그러면서 도망치지 못할 정도로 꽉 끌어안았다.
다급한 몸짓이었으나 누구냐고 되물어 볼 필요도 없었다. 은은한 숲 향기. 이런 체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라크시스 옌.
“시아.”
그에게서 이름을 들은 게 오랜만인 것 같았다.
시아는 천천히 팔을 들어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러자 라크시스가 아주 조금 더 시아를 끌어안았다. 미묘하게 빠른 맥박, 움질거리는 힘줄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한 기다림이 깃들어 있었다.
라크시스는 말이 없었다. 간헐적으로 그의 가슴이 떨리는 걸 보니 우는 것 같기도 했다. 라크시스와 눈물이라니,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그럼에도 시아는 일부러 고개 들어 그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보여준 모든 행동을 통해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 전, 그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 오래 잠들어 있었나요?”
“예. 꽤 오래요.”
옆에서 누군가가 한숨을 쉬었다. 안도의 한숨인지 징글징글하단 푸념인지, 대놓고 들으라는 것처럼 푹푹 내쉬었다.
“누님이 깨어나지 않아서 이 성 박살 날 뻔했어요.”
“…요르문?”
요르문은 침대맡에 앉아 라크시스에게 꽁꽁 싸인 시아를 살폈다. 대충 걷어붙인 소매에 넥타이도 없는 셔츠 차림이 꼭 연구실에 처박혀 있다가 나온 공학자 같았다.
“괜찮아요? 다들 누님을 걱정했다고요. 잘못된 곳은 없다고 했는데, 꼬박 사흘을 죽은 듯이 주무셨거든요.”
요르문의 말에 라크시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슬그머니 팔에 힘을 풀었다.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여전히 명화처럼 아름다웠다. 눈가가 말끔한 걸 보니 울진 않았나 보네.
나 때문에 울었어도 그건 그거 나름대로 기분이 이상할 것 같았다. 싫진 않았겠지만.
“배가 고프겠군요.”
“…조금요.”
조금이라고 말하기 무섭게 창자가 요동치는 소리가 났다.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아까는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진짜로 배가 안 고팠거든요.”
시아는 라크시스의 품으로 파고들며 시선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라크시스는 용납하지 않았다. 시아를 힘주어 끌어안으며 새빨개진 얼굴이 숨지 못하도록, 오로지 자신만을 보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부끄러워진 시아가 쏘아붙이듯 대꾸했다.
“뭐가 좋아서 또 웃어요?”
“궁금해요?”
궁금하냐니. 라크시스가 이렇게 되물어 본 건 처음이었다.
“다 좋은데.”
시아는 두 귀를 의심했다.
지금 라크가 뭐라고 한 거야……?
때마침 노크 소리가 났다. 시아는 괜히 민망해져 라크시스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의외로 순순히 놔준다 싶었는데, 라크시스는 내외라도 하듯 제 코트까지 매무새를 가다듬고 시아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주었다.
그러고 보니 나 잠옷 차림이었구나.
‘왜 이런 잠옷을…….’
중세의 슈테른베슈테크에서 입었던 허여멀건 튜닉이었다. 이제 보니 그녀가 누워있던 방도 다무스식 도기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라크, 여긴 어디죠? 혹시 제가 또 시간 여행을 했나요?”
라크시스는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정말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소식 들었어. 마지막 손님이 깨어났다며?”
시아의 두 눈이 커졌다.
“…아스타?”
너무 놀라 순간 호칭도 잊었다.
시아는 멀거니 아스타를 바라보았다. 사자 갈기처럼 굽이치는 황갈색 곱슬머리와 혈색 도는 피부 위로 깨처럼 흩뿌려진 주근깨. 시원하게 휘어지는 입꼬리까지.
누가 봐도 아스타였다.
심지어 출정을 준비하던 때에 비해 한결 편안해 보였다.
내가 기절한 사이에 모든 게 끝났나. 잘 끝난 거 맞지? 아스타가 반복하던 시간은?
그녀도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난 걸까?
“어떻게 된 거예요? 기습은 성공했나요? 그러고 보니 광룡의 봉인은…….”
그러자 아스타라 불린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레이디 켈튼. 제가 그렇게 할머니와 똑같이 생겼나요?”
* * *
“여기가 마도 시대라고요?”
“3518년으로 돌아온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괴담을 찾아 한밤중에 고성에 숨어들었던 그때로요.”
라크시스는 우아하게 고기를 썰며 대답했다. 목 끝까지 단추를 잠그고 꼿꼿하게 앉아있는 모습은 귀족 그 자체였으나, 시아에게 대답하는 목소리만큼은 녹아내린 아이스크림 그 자체였다.
그들이 있는 곳은 마도 시대의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고전적인 식당에는 늦잠에서 깨어난 손님을 위한 작은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선선대 백작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의 손녀, 레오나 슈테른베슈테크는 진작 식사를 마치고 시아 켈튼이라는 사람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시아는 라크시스에게 속삭였다.
“원래 여긴 씨즐턴의 관광지 아니었어요?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