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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99)화 (99/292)

99화 

그간 봐왔던 온갖 소설, 역사책, 뉴스, 신문 기사들이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잃어버린 고향을 되찾은 사람. 전쟁으로 헤어졌던 가족을 만난 사람. 삼십 년 전 실종된 자식의 소식을 들은 사람.

죽은 줄 알았던 연인과 재회한 사람.

마치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기분이었다.

시아는 묘한 감정에 휩싸여 한참을 걸었다. 신전은 넓었고, 인적은 없었다.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주변을 탐방하는데, 텅 비어있다고 생각했던 왕좌 중 하나에 누군가가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정체를 알아챈 시아는 소스라쳤다.

그는 조각상과 꼭 닮은 모습을 한 사도 다무스였다.

“설마 신화 속에 그…….”

시아가 얼떨떨하게 손가락을 들어 다무스를 가리켰다.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마침내 만났군요.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요.]

다무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죽음을 앞둔 패잔병 같았다. 왕좌에 똑바로 앉아있지도 못해 힘없이 어깨며 목을 늘어뜨린 다무스의 몸은 반투명했다. 복부 한가운데에 위치한 검은 덩어리가 자꾸만 사도의 몸을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다무스는 일어나 시아를 맞이하려다 자꾸만 고꾸라졌다.

시아는 직감했다. 사도 다무스는 죽어가고 있었다. 암 덩어리 같은 저 검은 것이 광룡의 힘이며, 광룡의 힘을 버티지 못한 다무스는 곧 소멸되고 말 것이다. 의술사로 살아오면서 삶과 죽음을 나름 경험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경외로운 슬픔이 전신을 압도했다.

다무스는 마치 생을 다한 별처럼 보였다.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어진 후에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는 작고 하얀 별. 신이 죽음을 맞이한다면 저렇게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걸까.

“…저한테 하신 말씀이세요? 아니, 왜 이렇게 되신 거예요. 대체 왜…….”

시야가 흐려졌다. 통제할 수 없이 눈물이 차오르더니 투두둑 흘러내렸다. 시아는 손등으로, 소매로 볼썽사납게 눈물을 닦아내며 엉금엉금 왕좌로 기어갔다.

“제가 당신에게 뭔가를 해드릴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여기까지 부르신 거죠……? 말씀해 주세요. 제가 시간 여행에서 뭘 해야 했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번엔 어떻게 될지 저도 궁금했습니다. 처음으로 당신을 흉내 내었는데, 성공했네요.]

“흉내 내다니요, 무엇을…….”

시아는 울면서 다무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기이하게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잘라낸 필름을 영사기에서 끊임없이 돌리는 것처럼, 그의 손가락 끝이 지직거리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던 것이었다.

[고작해야 당신의 조각에 불과한 몸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으니 이제 저는 두 번 다시 당신을 보지 못하겠지요. 그래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문득 슈테른베슈테크의 세월이 반복되던 것이 겹쳐 보였다. 하지만 시아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은 어쩌다 시간 여행에 휘말린 스물 여덟의 평범한 의술사에 불과했고, 여기까지 오게 된 영문조차 몰랐다.

그저 형언할 수 없는 공허함과 향수에 정신이 괴로울 뿐이었다.

[어서 가져가세요. 이 어둠을 천칭에 올리고 당신의 힘을 되찾으십시오.]

다무스는 최후의 힘을 비틀어 짜듯 제 가슴팍을 헤집었다. 검은 힘을 붙잡아 뜯어내자 순식간에 사방으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당신이 사랑해 마지않았던 우리들의 마지막 형제를 구해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당신의 마지막 형제라니…….”

시아는 다무스가 건넨 검은 힘을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사도의 몸을 찢어버릴 듯 날뛰던 힘은 시아의 손에 들어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얌전해졌다.

그러더니 몸을 둥글게 말고 시아를 올려다보는 게 아닌가.

자그마한 털 짐승처럼 웅크린 검은 힘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돌아가는 길을 열어놓겠습니다.]

“저는 어디로 돌아가요……? 미궁으로요? 아니면 마도 시대인가요? 제가 갑자기 원래 시대로 가버리면 슈테른베슈테크는요? 라크시스랑 요르문은 어떡하고요……?”

시아는 절박하게 외쳤다. 어둠이 빠져나간 후로 다무스의 몸은 천천히 흐려지고 있었다.

손에 들린 조그마한 어둠이 갑자기 토끼처럼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신전 중심에 있던 우물 바로 옆까지 퐁, 퐁 튀어간 어둠은 솜뭉치처럼 뒤돌아 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니, 잠깐, 너 어디 가! 기다려!”

어둠이 남긴 궤적엔 무지갯빛 마력이 흘렀다. 마류 이상 현상의 주범은 봉인이 아니라 봉인 안에 있던 저 어둠이었다.

시아는 당황했다. 애초에 광룡의 부활을 막기 위한 시간 여행이었으니 도망친 어둠을 잡으러 가야 했으나, 곧 소멸될 게 뻔한 다무스를 그냥 두고 가자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둠은 시아가 안절부절못하자 약 올리듯 우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결국 시아는 미친 듯이 갈등하다 우물을 향해 뛰어갔다.

우물 안에는 수많은 별들이 소용돌이치는 또 다른 우주가 담겨있었다. 도망친 어둠이 우물 저편의 은하수를 부유하며 시아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우물에 뛰어들기 직전, 시아는 우물 벽에 올라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다무스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눈을 감은 채 미소 짓고 있었다.

“미안해요, 이렇게 두고 가서……. 대체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당신은 그 지경이 되면서까지 날 부른 거잖아요. 어쨌든 광룡의 부활은 꼭 막아볼게요. 아니, 막을게요. 이렇게 홀로 남겨둬서 미안해요.”

또다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시아는 여전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아까처럼 울면서 지체할 상황이 아니었다.

시아는 먹먹한 감정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고 우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가 떠난 자리엔 다무스의 음성만이 남아 맴돌았다. 모든 것을 훌훌 벗어버리고 평화로워진 자의 마지막 소리였다.

[당신의 종으로 태어나 당신을 위해 숨을 거둘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 * *

“다 너 때문이야.”

시아는 벌게진 눈으로 조그마한 어둠을 들어 올렸다. 어둠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우물에 빠진 후 시아는 별로 이루어진 계단 위에 떨어졌다. 거대한 나선을 그리는 계단에선 모래알 같은 빛의 폭발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계단을 이루는 별들의 형태는 매우 다양했다. 나선 모양으로 꼬인 별도, 깔조네처럼 가운데가 부푼 별도 있었다.

시아는 정신이 없었다. 문자 그대로 이성이 날아가고, 소용돌이치는 감정에 잠식되어 있었다. 한낱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겪어서라기엔 지나치게 허우대가 멀쩡하긴 했지만, 다무스라는 거대한 존재의 죽음을 맞닥뜨린 후 마음 어딘가가 마모되어 버린 상태였다.

“네가 모든 걸 파괴시켰어. 갈리프가 광룡이 되도록 만든 것도, 부활한 광룡이 마도 시대를 종말시키도록 만든 것도, 시간 여행을 일으킨 것도 다 너잖아. 안 그래?”

시아는 책망하듯 혼잣말을 했다. 어차피 대답도 못하는 거.

원망스러웠다. 시간 여행으로 살아난 사람도 있었지만 죽은 사람도 있었다. 그녀 역시 평범함의 궤도를 벗어난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내가 뭐라고 누군가의 운명을 좌우해야 한단 말인가.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도 시간이 반복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더 편했을 수 있었다. 끔찍한 죽음은 한 번이면 족할 테니까.

“다 너 때문이라고.”

어둠은 삐진 듯 마구 도리질을 쳤다. 시아는 어둠이 또 도망갈까 봐 양손으로 꽉 쥐었다. 밀가루 반죽처럼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온 어둠이 화를 내며 날뛰었다.

“…미안. 아팠겠다.”

시아는 아주 살짝 손가락에 힘을 풀었다. 자그마한 어둠은 토라져 등 돌리기만 했을 뿐, 도망가진 않았다.

“너 때문에 이게 뭐야. 난 그냥 평범하게 살고 있었을 뿐인데. 네가 아니었으면 난 의술원에서 환자를 보고, 요르문 님이랑 저녁을 먹으면서 하루를 보냈을 거란 말이야.”

그때였다.

[네가 평범하게 살게 된 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해?]

“…너 지금 말했어?”

어둠이 피식거리듯 움직였다. 시아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래, 바보야.]

바보라니, 지금 누가 누굴 보고 바보라는 거야.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방금 전까지 먹먹하던 감정이 싹 사라지며 목구멍이 뻥 뚫려버렸다.

[그럼 네가 바보가 아니면 뭐겠어?]

“야……!”

눈도 입도 없는 주제에 마치 비웃는 것 같았다. 시아는 어둠을 한 대 쥐어박으려다 어둠이 꺼낸 말에 벼락같이 정신이 들었다.

[넌 방금 완전한 소멸을 맞이한 별을 보았지. 그 별은 이제 모든 시간대에서 사라졌어.]

뜻 모를 소리로 치부하기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별이란 게 설마 사도 다무스를 말하는 거니?”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는 존재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 네가 바보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건 누군가가 그만한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란 걸 알아두라고.]

내가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건 요르문 님 때문이 아니었어? 고아원 꼬마를 입양해 먹여주고 길러줘서 그런 게 아니었냐고.

시아는 어둠이 말한 평범한 삶이라는 게 그런 차원의 평범함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걸 곧 깨달았다.

“…그게 누군데?”

[그걸 알고 싶으면 네가 노력해야지. 이 이상은 내 관할이 아니야.]

그 말을 끝으로 어둠은 정말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뭐라고 말을 걸어봐도 실수로 대답하는 일조차 없었다. 일부러 무시하는 기색이 다분한 어둠에 시아도 결국 대화하기를 포기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은하수 계단은 생각보다 길었다. 미궁과 다르게 나선형이라 묘하게 어지러웠다. 어둠은 잠이라도 들었는지 조그마한 몸뚱이를 색색 들썩였다.

사방이 새카만 우주라 시간이 가늠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길 걸어가는 것을 빼곤 당장 해볼 만한 일도 없었기에 시아는 지루함을 참고 계속 걸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나선의 별 계단이 끝났다.

“…진짜 천칭이네.”

시아의 입이 떡 벌어졌다. 계단의 끝에 있는 건 황동빛의 휘황찬란한 형태의 천칭이었다. 라크시스의 저택에나 있을 법한 마도 시대의 유물처럼 생겨서는 허공에 매달려 좌우로 끊임없이 기울었다 돌아오길 반복하고 있었다.

대체 이 천칭은 어디에 매달린 거야? 천칭이 고정된 꼭짓점 부근에서는 미세한 바람이나 빛 알갱이 같은 것들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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