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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98)화 (98/292)

98화 

【 빛의 도래 】

“아윽, 멍 든 것 같은데…….”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어보네. 시아는 척추를 문지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조각상에게 먹히다니.

너무나도 황당하고 괴이스러운 일이었다. 많고 많은 괴담을 수집한 루드윅이라도 이런 건 못 겪어봤을 거다.

‘로드 젤마니는 오히려 좋아했을지도.’

뒤통수가 얼얼해 오히려 이성이 바짝 깨어있었다. 불곰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사위가 온통 어두운 가운데 시아가 쓰러져 있던 곳만 유독 밝았다. 시아는 그 원인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현자의 별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것들도 같이 떨어진 건가?”

현자의 별 옆엔 붉은 심장도 있었다. 붉은 심장이랑 현자의 별은 라크시스가 분명 천칭에 올려두었다고 했는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시아는 끙끙거리며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의 지하 감옥과 똑 닮은 잿빛 벽돌의 통로였다. 시아가 다가가자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있던 등에 불이 연쇄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반대로 그녀가 지나온 자리엔 불이 도로 꺼졌다.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계속 걸어가자 마침내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던 통로의 끝부분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두 갈래 길이었다.

“여기가 진짜 미궁인가 봐.”

신화 속 미궁이 실존한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던 것도 잠시, 시아는 곧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미궁을 헤쳐나가는 방법은 모르잖아.”

어디가 어디인 줄 알고 함부로 길을 선택하냔 말이야. 잘못 고른 길이 막장일지, 함정일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가느다란 빛줄기가 시아의 뒤에서부터 뻗어 나와 오른쪽 길을 가리켰다.

뭐지. 시아는 숨을 참고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빛줄기의 근원지는 바로 현자의 별이었다. 불현듯 시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문장이 있었다.

[맥동하는 붉음과 길잡이별이 이곳을 수호하나니. 어둠이 도래하였을 때 비로소 영광의 빛을 되찾으리라.]

길잡이별!

시아는 현자의 별을 내려다보았다. 제단에 적혀있던 글귀 속 길잡이별의 정체는 미궁의 두 열쇠 중 하나였던 현자의 별이었다.

“세상에, 이래서 카얄이 그토록 현자의 별을 노렸던 건가 봐. 이게 없으면 미궁 중심에 도달할 수가 없으니까.”

물론 고생을 좀 한다면 도착할 수도 있겠지. 모든 길을 다 가본다면. 시아는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코트 안주머니의 신호기를 꺼냈다. 떨어지던 충격에 고장 났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고장 난 곳은 없었던 모양이다.

이게 여기서도 터질까? 어쨌든 미궁에 무사히 들어오긴 했으니까 연락은 해야지. 바깥에 있는 라크시스도 시아가 갑자기 사라져서 당황했을 터였다.

시아는 신호기의 버튼을 눌렀다. 미궁 밖까지 신호가 닿을진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알려주는 게 낫겠지.

“일단 봉인부터 찾자. 찾고 나면 여기서 내보내 줄 수도 있잖아.”

시아는 붉은 심장을 목에 걸고 현자의 별을 나침반처럼 들었다. 현대의 모직 코트 위에 아스타의 털 망토를 두르고 큼지막한 루비 목걸이를 든 부자연스러운 꼴이 마치 도굴꾼 같았다. 시아는 제 모습을 훑으며 피식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자의 별은 맡은 역할에 충실하여 거미줄처럼 얽힌 수많은 통로 중 그녀가 나아가야 할 길을 비췄다.

자정의 망망대해에서 길을 찾는 선장이 된 것 같았다. 밤바다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이정표가 검은 하늘을 수놓은 별자리이듯, 시아는 현자의 별에 의지하며 단조롭게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돌벽의 통로를 걷고 또 걸었다.

그러기를 거의 한 시간째였다. 계속되는 똑같은 풍경에 어느새 바짝 얼어있던 몸이 풀리고 긴장이 느슨해졌다.

초반에 지진이 나듯 미궁이 흔들린 적이 한 번 있었지만 그 후론 딱히 위험한 장치나 함정을 마주하진 않았다. 이젠 하품까지 날 지경이었다.

라크가 있었다면 좀 더 빠르게 갈 수 있었을까. 같이 떠들면서 걸었으면 시간이 더 잘 갔을 텐데.

“나도 참, 별생각을 다 하네.”

이런 순간에 라크시스를 떠올리다니.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시아는 괜히 피식거리다 갑자기 멈춰 섰다.

“…어?”

막다른 길이었다.

빽빽하게 쌓아 올린 잿빛 돌벽은 지하동굴 같던 지금까지의 미궁과는 다른 공간이 그 너머에 있음을 알리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앞엔 시아를 집어삼켰던 다무스 신상이 있었다.

“또야?”

보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정말이지 트라우마 하나는 제대로 생겼다니까. 움직이는 거대한 조각상에 한 번 먹히고 나니, 이 녀석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았다. 괜히 옷 주름이나 머리카락이 사실적으로 보였다.

시아는 앓는 소리를 내며 조각상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당연히 조각상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괜히 무서워진 시아는 갑자기 조각상이 제 손이라도 붙잡을까 얼른 손을 뒤로 뺐다.

“이곳만 넘어가면 분명 광룡의 봉인이 있을 텐데.”

나침반 역할을 하던 현자의 별에서도 빛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시아는 조각상 주위에 보이지 않는 결계라도 있는 것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살폈다. 방심한 사이 들고 있던 천칭이나 검으로 머리를 후려칠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저나 이 돌벽은 어디서 많이 본 모양인데.

하지만 별다른 흔적이나 표시는 없었다. 문처럼 열릴 수 있는 틈새도 보이지 않으니, 반대편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조각상에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시아는 바깥의 신전에서 했던 것처럼 붉은 심장을 천칭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이건 아닌가.”

겁이 사라진 시아가 이리 밀고 저리 밀고 해보아도 조각상은 꿈쩍할 기미조차 없었다. 마치 정답이 이게 아니라는 것처럼 시아가 수수께끼를 풀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데. 시아는 한 발짝 물러서서 팔짱을 끼곤 조각상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석상이라곤 하지만 참 시체 같은 낯빛이다. 바깥의 조각상과 똑같이 생겼는데 느낌이 이렇게 다른 걸 보면 고대 다무스의 석공들은 대단하다니까. 한참을 요모조모 뜯어보던 시아의 눈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석상과 함께 조각된 튜닉이 살랑이고 있는 게 아닌가. 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가까이 다가갔다. 좁아진 시야에 튜닉과 석상의 가슴팍 사이에 검은 그림자가 언뜻 비쳤다.

“…세상에.”

뒤늦게 깨달음이 왔다.

‘길잡이별과 맥동하는 심장!’

시아는 거침없이 붉은 심장을 낚아채곤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의 옷을 벗기듯 튜닉을 잡아당겼다. 대리석이 부직포 구겨지듯 시아의 손에서 바스라졌다.

훤히 드러난 조각상의 몸 한복판, 정확히 심장이 위치한 자리에 검은 구멍이 뚫려있었다. 시아는 붉은 심장을 조각상에 끼워 넣었다.

기대 반, 긴장 반. 시아는 숨도 멈추고 조각상을 지켜보았다.

지상과 단절된 서늘한 미궁에 생명의 온기가 피어올랐다. 온몸을 감싸는 기묘한 간지러움에 오금이 저려왔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시아는 팔이며 목덜미를 미친 듯이 긁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 적막이 내려앉은 미궁은 얼핏 보기엔 처음과 똑같았으나, 시아는 느낄 수 있었다.

불안정한 봉인에서 흘러나오는 무지갯빛 마력이 공간을 장악해 그녀의 눈, 코, 입은 물론 모공이며 폐 속까지 가득 들어차 있다는 것을.

‘이런 기분을 또 언제 느꼈었더라.’

잠에서 깨어나던 글레이셜 홀. 그곳에서도 분명 죽어있던 모든 기계들이 초월적 존재의 부름을 받고 살아나는 것처럼 천천히 손가락부터 까딱이기 시작했었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렸다. 봄날의 풀 내음이 났다. 코끝이 간지러워 찡그리자 오로라빛 나비가 제 콧등 위에서 나풀나풀 날아올랐다.

여긴 분명 미궁이었는데. 시아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을 치다 움찔 놀랐다. 사박거리며 밟히는 연둣빛 들풀은 분명 음습한 지하 미궁도, 슈테른베슈테크의 바다 절벽도 아니었다.

따스하고도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올려다본 천장은 돌벽이 아닌, 낮과 밤이 공존하는 드넓은 우주로 변해있었다. 태양이 차오르며 정오의 빛을 뿌리면 달이 뒤따라가 밤의 장막을 펼쳤다. 자글자글한 별들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렸다.

어느새 진짜 사람의 피부가 돋아난 조각상이 시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루비 목걸이에 불과했던 붉은 심장엔 보석 같은 동맥이 돋아나 펌프질이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뭐야, 이거 뭐야.

“살, 아있는 거야……?”

[사도께서 기다리십니다. 신과 가까운 자여.]

조각상이 다소곳이 말했다. 미치겠네. 이젠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조각상은 시아가 하얗게 질리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한마디에 막다른 길이 허물어졌다. 괴담을 찾으러 한밤중에 숨어들었던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의 삼 층 끝 방에서처럼, 벽돌은 뱀 허물 벗듯 연쇄적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모든 돌벽이 사라졌다.

차원이 다른 광활한 세계였다. 만약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이런 곳에서 인간들을 굽어볼 것만 같았다.

시아가 마주한 건 거대한 신전이었다.

따스한 봄날의 들판, 여름의 녹음, 가을의 낙엽과 겨울의 눈밭이 액자 속 풍경처럼 바닥을 이루고, 거대한 석조 기둥은 구름을 천장 삼아 우뚝 서있다. 오로지 기둥과 바닥, 천장이 전부인 신전의 중심엔 조그마한 우물이 있었고 낮게 층진 단상이 둥근 형태를 이루었다.

단상 위에는 열 한 개의 텅 빈 왕좌가 있었다.

시아는 멍하니 조각상을 지나쳐 걸어 들어갔다. 물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시아는 자신의 발이 왜 저절로 신전을 향하는지도 몰랐다. 살아있어 이젠 조각상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존재가 그녀를 얌전히 뒤따르며 침묵했다.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절대 낯익을 리 없는, 마도 시대에서도 보지 못한 신비로운 광경인데. 등받이가 한없이 높이 뻗어나간 신성한 왕좌 중 가운데 하나는 유난히 형이상학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가장 마지막 왕좌는 만들다 만 것처럼 뼈대만 남아있었다.

뼈대만 남은 왕좌를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슬픔과 향수가 울컥 차올랐다.

“나 왜 이래…….”

시아는 황급히 눈가를 문질렀다. 소맷자락이 순식간에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눈물이 날 이유가 없었다. 여긴 그녀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곳이었다. 얽힌 기억도 감정도 아무것도 없을 텐데. 친부모를 만나게 된다면 이런 느낌이 들까. 시아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친부모까지 떠올리며 자신이 이러는 이유를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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