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인적이 없으니 을씨년스럽군요.”
라크시스가 앞장섰다. 시아는 그를 따라 황량한 신전 안으로 들어서며 눈짓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에드먼드 3세와 로드 슈테른베슈테크가 말했던 다무스 신상은 설명 없이도 뭔지 알았겠네요.”
신전의 가장 안쪽, 층 진 제단 너머로 족히 삼 층 건물 높이는 될 법한 대리석 조각상이 시아와 라크시스를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도 다무스의 신상이었다. 튜닉을 자유로이 걸친 모습의 조각상은 마치 살아 움직이듯 한 발을 앞으로 내딛고 서있었다. 한 손에는 검, 다른 한 손에는 천칭을 들고 구불거리는 머리칼이 흩날리는 모습 그대로 신전에 들어서는 이들을 굽어보았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그대로 굳혀 석상으로 만든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오싹함마저 드는 실재감이었다.
시아는 애써 다무스 신상을 무시하며 말했다.
“…저 천칭인 거죠? 미궁을 지키는 자물쇠란 게.”
“저것 말곤 천칭이라고 칭할 것이 없군요.”
에드먼드와 아스타가 알려준 미궁을 여는 방법은 바로 다무스 신상의 천칭에 붉은 심장과 현자의 별을 올려놓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미궁의 입구가 나타나나요?’
‘우리도 유물의 전승자로서 전해 들은 게 전부야. 신상의 저울이 미궁의 열쇠를 담는 그릇이랬거든. 우리도 지금까지 미궁을 열어볼 일이 없었으니까 그 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당황스러웠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 반박할 수 없었다.
시아는 목이 뒤로 꺾여나가도록 다무스 조각을 올려다보았다. 현재 선 위치에선 천칭 접시의 양 밑바닥밖에 보이지 않아 한참을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렇게 물러나 전체적으로 감상한 조각상의 천칭 접시 한쪽엔 깃털이 함께 조각되어 있었다. 조각이 워낙 큰 탓에 천칭 접시만 해도 어지간한 방 하나 크기와 맞먹었다.
도대체 고대 다무스인들은 저걸 어떻게 조각한 거야?
“그런데 진짜로 고대의 다무스인들은 죄인을 저 천칭 위에 올려두고 심판했을까요?”
아스타가 지나가듯 말해준 이야기였다. 다무스는 사도 중에 가장 엄정하고 갈리프와 닮아있던 존재였다고. 그 어떤 영혼도 꿰뚫어 보는 사도라고 했다. 그래서 천칭에 죄를 지은 자가 올라가면 깃털보다 무거운 쪽으로 기울었다고 한다.
“신화적 기록이겠지요. 어차피 저 높은 곳에 사람을 올려두면 마법사가 아닌 이상 혼자서는 못 내려올 겁니다.”
그것도 그렇네. 가만히 두면 뙤약볕에 열사병, 탈수증으로 죽을 테니까. 시아는 주억거리다 고대의 원초적인 사형 방식에 사뭇 몸서리를 떨었다.
“돌로 조각한 천칭이 기운다는 게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요. 뭐,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해보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려요. 올려두고 올 테니.”
시아는 라크시스가 날아오른 사이 혹시 모를 비밀 장치를 찾아 나섰다.
영화 같은 걸 보면 꼭 이런 제단이 움직이면서 비밀 통로가 나타나잖아? 수수께끼 같은 퍼즐을 풀어서 뭘 돌리고, 움직이고 하면 열리는 문 말이야.
천칭이란 게 혹시 상징적인 의미는 아닐까?
시아는 흙먼지로 뒤덮인 제단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으, 먼지. 손을 탈탈 털면서 제단을 살피니 정체 모를 형이상학적인 그림과 웬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최초에 하나의 점이 있고 점으로부터 어둠(Kayal)과 빛(Galipe)이 태어났으니. 빛이 숨결을 토하여 대지에 생명이 내려앉았노라.]
[빛의 후예여, 다무스의 자손이여. 천칭을 들어 어둠으로부터 영토를 지키라.]
[맥동하는 붉음과 길잡이별이 이곳을 수호하나니. 어둠이 도래하였을 때 비로소 영광의 빛을 되찾으리라.]
“로드 젤마니가 말했던 대로네. 카얄이 태고의 어둠을 뜻한다더니, 갈리프는 빛이란 뜻이었구나.”
글귀를 더듬더듬 읽던 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둠이 도래했을 때 빛을 되찾는다니. 뭔가 이상한데. 어둠이 사라져야 빛이 나타나는 거 아냐?”
“시아, 뭐라도 발견했어요?”
“아, 라크.”
시아는 반색하며 뒤를 돌았다.
“천칭 위에 올려놨는데 딱히 별일이 일어나진 않더군요. 미궁의 열쇠라던 현자의 별과 붉은 심장이 있으면 다 해결될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라크시스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곤 천천히 걸어왔다. 시아는 조용한 다무스 신상을 야속하게 바라봤다. 먼지 닦인 제단을 발견한 라크시스가 반갑게 다가갔다.
“고대어군요. 오랜만이네요. 이젠 이걸 읽고 쓸 수 있는 자도 얼마 안 남았을 텐데.”
라크시스는 글귀를 읽으며 혼잣말에 가까운 옛이야기들을 했다. 그러나 시아는 라크시스의 말을 하나도 귀담아들을 수 없었다.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분명 조각상은 신전 입구에 들어서는 자를 바라보게 조각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해있는 기분이었다. 정확히는 제단 앞의 한 사람, 시아 켈튼을 향해서.
몇 번이고 눈을 비비고 감았다 떠도 대리석에 양각된 눈동자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름이 걷히며 신전에 햇빛이 들자 텅 비었던 눈동자에 동공이 수축되고 홍채가 돋아났다.
소름이 돋았다.
“라크. 지금 조각상이…….”
그때였다.
“시아! 위를 봐요, 위를!”
라크시스를 부른 건 잠깐이었다. 그런데 그사이에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 신전에서 절대로 생겨나선 안 되는 크기의 그림자였다.
시아는 고장 난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마주쳤다.
한눈에 다 담기지도 못할 크기의 얼굴이 코앞까지 와 있었다. 온몸이 얼어붙었다. 인간의 손가락에 짓이겨지기 직전의 개미처럼, 시아는 머리 바로 위에 멈춰 선 거대한 석조 콧날에 정신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버렸다. 조각이 움직이며 떨어져 내린 희뿌연 돌가루 너머로 살아있는 존재의 섬뜩한 시선이 느껴졌다.
조각은 입만 벌려도 두 사람을 그대로 삼켜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삼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입술이, 떨린다고? 조각상이?’
“피해요!”
라크시스의 절박한 외침과 동시에 돌이 마찰하는 굉음과 함께 조각상의 입이 벌어졌다. 라크시스가 몸을 날렸지만 역부족이었다.
맹수의 아가리처럼 시커먼 동굴이 시아를 그대로 덮었다. 찰나였다. 이윽고 제단에 파괴적인 상흔을 남기며 끼기긱 입을 닫았다.
조각상이 시아를 삼켜버린 것이다.
“시아―!!”
“라크―!!”
조각상의 입 속에서 시아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메아리쳤다. 라크시스가 달려들어 마법을 무지막지하게 퍼부었지만 조각상은 꿈쩍도 안 했다. 마류가 엉망인지 공간이동도 불능이었다. 행여 시아가 다칠까 조각상을 폭파시킬 수도 없었다.
조각상은 그런 라크시스에겐 관심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기립했다.
급격하게 경사 지른 목구멍을 타고 시아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각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처음 자세 그대로 돌아간 뒤였다.
두 동강이 나 부서져 버린 제단과 사방을 뽀얗게 덮은 돌가루, 긁혀나간 바닥.
조각상에 먹혀버린 시아.
라크시스의 낯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지워졌다. 빛을 잃어 건조해진 눈빛과 바싹 말라붙은 입술.
만약 요르문이 지금의 라크시스를 봤다면 당장 멀찍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가 터지기 직전의 화산과도 같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시아의 기척이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 여행자의 기운이라고 해야 할까. 본인은 마법사가 아니라고 하지만, 시아에게선 마치 마법사 같은 고유한 무언가가 언제나 미약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보같이 당황해 버렸다. 차라리 내가 대신 잡아먹혔어야 했는데. 그 거대한 돌덩어리가 움직이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지? 무능한, 이런 무능한…….
“빌어먹을.”
라크시스의 발끝을 중심으로 가느다란 진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모래며 부서진 대리석 조각들이 진동을 따라 잔물결을 그리며 점차 퍼져나갔다.
숲속에서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숨어있던 쥐들이 황급히 떼를 지어 도망쳤다. 라크시스가 일으킨 마법이 지진이 난 것처럼 신전의 기둥을 뒤흔들었다. 그의 마력이 나무 둥치를 타고 뿌리를 따라 대지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온몸의 감각이 곤두섰다. 라크시스는 전신의 마력을 끌어 올려 시아를 찾는 중이었다. 티끌만 한 흔적이라도 발견하는 순간, 몸이 동강 나든 말든 공간이동을 할 작정이었다.
라크시스는 조각상을 노려보았다. 무형의 마력이 다무스의 형상을 한 실루엣을 옥죄고, 가시덤불처럼 석상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무생물로 되돌아갔던 조각상의 눈동자에 다시금 동공과 홍채가 생겨나더니 혼란과 공포로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조각상은 겁에 질려있었다.
“네가 정말 살아있는 존재라면 이지라는 게 있겠지.”
라크시스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가 사용한 건 차탈의 주특기였던 남의 육신과 기억을 엿보는 마법이었다.
“그녀를 어디로 데려간 거냐.”
무지막지한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신전의 기둥 하나가 쓰러졌다. 뽀얀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조각상의 눈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을 때였다.
정체 모를 목소리가 신탁처럼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오, 작은 노예 아이야. 가엾은 마지막 형제야.]
아스타에게 예언을 내리던 신의 음성이었다.
[본래 그분만을 만나고 싶었거늘. 이제 문지기를 그만 괴롭히려무나.]
라크시스의 사고가 정지했다.
노예 아이. 마지막 형제. 대체 누굴 가리키는 말인가. 터널을 지나는 기차 소리 같은 엄청난 울림에 귀가 먹먹했다. 라크시스는 머리를 감싸 쥐며 이를 악물었다. 그의 온몸에서 마력이 요동치며 산사태를 일으키려고 했다.
그 순간, 라크시스의 발밑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시커먼 구멍이 생겨났다.
‘……!’
무어라 외칠 새도 없었다. 몸이 밑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바깥 풍경이 우물 속에서 바라보는 하늘처럼 조그마한 점이 되었다. 라크시스는 직감했다.
형태는 달랐으나 이 또한 공간이동의 마법이었다.
조각상이 라크시스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미궁으로 안내한 것이었다. 그를 집어삼킨 구멍이 마침내 완전히 닫혔다. 어둠 속에서 한없이 떨어지면서 라크시스는 남은 거리를 가늠했다. 쭉 뻗은 팔과 다리에 바람이 휘감겨 소맷단이 팔락거렸다.
곧 미궁의 바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