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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96)화 (96/292)
  • 96화 

    ‘그대들을 믿소.’

    사라진 기사들은 친위대로 변장한 요르문과 루드윅이었다.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곧 왕궁의 모든 통로가 개방될 것이다. 자신은 이자벨라와 검은 마법사를 붙들어 놓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에드먼드는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냈다.

    “당연하지. 그대는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 * *

    “이 정도면 충분한 증거 같지?”

    루드윅이 먼저 망토에서 빠져나가고, 뒤이어 요르문이 망토를 벗었다. 망토 밖으로 드러난 몸이 마치 허공을 베어내고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루드윅은 봐도 봐도 놀랍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그럼요. 충분하죠. 그런데 그 망토 정말 신기하네요. 로튼데일에서도 그런 망토를 본 적이 없었는데.”

    “이거? 탐내지 마. 라크가 누님에게 준 선물이거든. 그것도 직접 마법을 걸어서 만들었다는데.”

    요르문이 킬킬거렸다. 루드윅은 투명 망토에 줄곧 눈길을 주다가 순식간에 흥미가 식어 단념했다. 아무리 호기심과 물욕이 일어도 고대 마법사의 연인의 물건은 건드리는 게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살인이 일어나고 있었다니, 에드먼드 3세도 어지간히 충격을 받겠네요.”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왕비궁 정원의 예배당 지하였다. 친위대가 수비를 핑계로 수도 외성과 왕궁 통로를 장악하고, 에드먼드가 이자벨라와 검은 마법사를 붙잡아 놓는 사이 요르문과 루드윅은 저주의 증거를 찾아다니기로 했다.

    왕비가 평소 자주 다녔다는 장소 위주로 탐색을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번번이 허탕을 치던 찰나, 예배당 제단에 주저앉아 성녀 상을 바라보던 루드윅이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다.

    ‘저 성녀 상, 검지손가락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손가락의 마디 한군데에 문질러져 닳은 자국이 있었다. 괴담 수집가의 감이 발동된 루드윅이 손가락을 돌리자 예배당 전체가 흔들리며 제단이 움직였다. 이윽고 딱 봐도 수상한 지하통로가 시커멓게 나타났다. 음습한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간 요르문과 루드윅은 지하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하고 말았다.

    요르문은 바닥에 굴러다니던 황혼 국교회의 성서를 펼쳐 들었다.

    “여기 명부도 있네. 알리바이 한번 기막히게 조작해 뒀군. 어느 가문에서 추천장을 받아서 온 사용인인지, 언제 무슨 일로 그만두게 됐는지.”

    성서의 정체는 바로 제물로 점찍어 둔 자들의 이름이 적힌 명부를 위장한 책이었다.

    “실은 여기서 미라가 되어 죽었던 거지만.”

    “아직 살아있는 사람도 있네요. 여기, 이름 옆에 표시가 없는 사람들이요.”

    루드윅은 명부를 건네받고는 한 장씩 넘겨가며 살폈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심각한 얼굴로 요르문을 불렀다.

    “로드 켈튼, 이걸 좀 보세요. 이번 저주 사태, 단순히 다무스의 왕실만 얽힌 사건이 아닌데요?”

    “그렇겠지. 슈테른베슈테크도 얽혀있고 시간 여행에 휘말린 우리도 얽혀있고.”

    요르문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는 바닥에 공간이동 마법진을 그리느라 바빴다. 극적인 상황에 미라를 증거물로 한 번에 내밀기 위함이었다.

    “바쁜 게 아니면 좀 도와주지 그래. 이 마법진 안에 미라를 옮겨주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라 여기 뒤에 이자벨라 황녀가 써놓은 내용이…….”

    요르문은 결국 루드윅의 재촉에 못 이겨 명부를 들여다보았다. 그러곤 잠시 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

    명부 뒤 편에 적힌 건 이자벨라의 일기였다. 그리고 에드먼드 3세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내용이었다.

    “…일단 그건 챙겨두지. 우리,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 에드먼드 3세가 이자벨라 황녀와 검은 마법사를 얼마나 붙잡아 놓을 수 있을지 모르는데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요르문은 서둘러 마법진을 마저 그렸다. 피와 저주의 냄새가 풍기던 공간에 거대하고도 새하얀 빛이 가득 차올랐다. 루드윅 역시 낑낑거리며 미라를 모두 옮겼다.

    “다 된 것 같은데, 일단 신호부터 보낼까요?”

    “그래. 백작령에서 엄청 기다리고 있을 거야.”

    루드윅은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신호기를 꺼냈다. 시아 쪽과 아스타 쪽의 버튼엔 벌써 작전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초록빛 신호가 들어와 있었다. 루드윅은 결심한 듯 버튼을 누르곤 신호기를 다시 집어넣었다.

    “이제 로드 슈테른베슈테크가 금방 왕궁을 장악하겠네요. 레이디 켈튼 쪽도 미궁에 들어간 지 꽤 됐으니 저희도 머지않아 원래 시대로 돌아갈 수 있겠죠?”

    요르문이 어깨를 으쓱였다.

    “별일 없다면 아마도.”

    두 사람은 다시 망토를 뒤집어썼다. 이제 친위대 행색으로 돌아가 에드먼드와 이자벨라가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왕궁을 엎을 차례였다. 예배당을 떠나는 걸음이 사뭇 비장했다.

    그리고 루드윅의 주머니 안에서는 시아 쪽 신호기의 불빛이 다시 깜빡이고 있었다.

    * * *

    “단단히 입었습니까. 고산지대라 추울 수도 있는데.”

    “로드 슈테른베슈테크가 신경 써줘서 따뜻해요. 그보다 열쇠 두 개는 잘 챙겼고요?”

    라크시스는 말없이 코트 안주머니를 뒤졌다. 곧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심장과 현자의 별이었다.

    백작령에서 가장 먼저 출발했던 시아와 라크시스는 다무스 신전으로 가는 길목에 도착했다. 염소 같은 작은 짐승이나 염소치기만이 열 지어 걸어갈 법한 좁은 산길이었다. 한참을 걷자 저 멀리 신전의 실루엣이 언뜻 비치는 침엽수림이 나타났다.

    “다른 분들도 별일 없겠죠?”

    “그럼요.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겨도 제가 가면 되니 괜찮습니다. 신호기도 나눠 가졌으니까요.”

    버려진 신전으로 가는 숲은 그 흔한 순례자며 신도 한 명 없었다. 인적이 끊긴 지 오래된 숲길은 잡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위험했다.

    “아!”

    낙엽이 한 박자 늦게 팔랑 날았다. 순식간에 시야에 파란 하늘과 무성한 나뭇잎이 가득 찼다. 그 가운데에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시아는 멍하니 라크시스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엔 걱정이 가득했다.

    “괜찮습니까?”

    잔가지를 잘못 밟아 헛디디는 순간, 라크시스가 그녀를 받쳐 안았던 것이었다. 단단한 팔이 제 등을 감싸 안고 있는 게 두터운 로브 너머로도 느껴졌다.

    “…살짝 미끄러진 것뿐이에요. 안 다쳤어요.”

    이게 다 어제의 유성우 때문이었다. 왜 저에게 별을 보여줬을까. 왜 자기 과거를 들려줬을까. 라크시스 옌은 폐인처럼 살던 과거 따윈 절대 일부러 말할 사람이 아닌데.

    그와 가까워진 것 같았다. 친구가 된 기분, 아니 아주 특별한 친구가 된 기분이었다.

    ‘특별한 친구는 또 뭔데.’

    스스로 생각해도 웃겼다. 친구면 친구지, 특별한 친구는 또 뭐람.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라크시스가 누굴 좋아할 만한 사람이던가. 다른 사람이 라크시스를 좋아한다면 모를까.

    ‘라크시스가 과거를 말해준 건 내가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겠지.’

    아마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가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원래 정신적 치료라는 게 그렇잖은가. 의외로 주변에 진지한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었을 수도 있다. 대외적인 이미지를 신경 쓰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런 경향이 높았다.

    ‘난 칠십 년 후의 사람이니까. 오히려 그래서 속마음을 보여주기 좋았던 걸지도 몰라.’

    하지만 자꾸 그가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시선을 의식하다 또 한 번 미끄러졌다. 그러나 미끄러지는 시아보다 라크시스가 한 발 더 빨랐다.

    “이런.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이젠 완전히 그에게 안긴 꼴이 되었다. 라크시스가 눈썹을 그림처럼 기울이며 피식 웃었다. 시아의 얼굴은 이제 새빨개져 버렸다.

    라크시스는 시아를 일으켜 세웠다.

    “조심해요. 좌표를 정확히 알았다면 처음부터 신전 앞으로 이동했을 텐데.”

    중세의 지도는 마도 시대와 많이 달랐다. 축척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게 가장 큰 문제였고, 두 번째론 백삼십 년 후 마도 시대엔 다무스 신전 자리에 성 시트리나 대성당이 대신 들어서 있다는 게 문제였다.

    잘 닦인 길과 구불거리는 산길. 좌표를 정확히 맞춰서 공간이동을 하지 않으면 숲과 몸이 하나가 될 수도 있었다.

    “다무스 신전이 버젓이 있는 중세로 시간 여행을 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라크도 좌표를 모르는 곳인데, 어쩔 수 없죠.”

    시아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며 앞서나갔다. 라크시스가 다급하게 시아를 불러세웠다.

    “잠깐만, 시아. 멈춰봐요. 당신 어깨에.”

    “왜요?”

    “…벌레가.”

    뭐? 시아가 화들짝 놀라 팔을 휘저으며 어깨를 마구 털어냈다. 그런데 요란하게 발버둥 친 거에 비해 어깨엔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또.

    “버, 벌레 있다면서요.”

    라크시스는 어느새 먼저 출발한 시아 옆에 나란히 있었다. 그가 생긋 웃었다. 그러곤 그녀의 어깨에 묻은 낙엽을 손가락으로 살짝 떼어내었다.

    “제가 잘못 봤나 보군요. 낙엽이었네요.”

    “…지금 장난 친 거예요?”

    “같이 가고 싶어서요. 기껏 넘어지려던 걸 구해줬는데 이렇게 버리고 가면 서운하잖습니까.”

    라크시스는 자연스럽게 시아의 손을 제 팔 위에 얹었다. 신사가 레이디를 에스코트를 하는 자세였다. 시아가 지금 무슨 짓이냐는 눈으로 라크시스를 쳐다보았다.

    “이게 뭔…….”

    “또 넘어질까 봐.”

    라크시스는 이보다 더 즐거울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온 세상 얼음을 다 녹일 듯 눈꼬리를 한껏 접고 있었다.

    “이젠 안 넘어질 거니까 안 잡아줘도 돼요!”

    시아는 빽 외치곤 성큼성큼 도망갔다. 라크시스가 당황해서 그녀를 계속 불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제 귀가 뜨겁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자신의 얼굴이 어떤 상태인지 시아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보로 신전을 향해가던 두 사람은 어느새 침엽수림이 끝나는 지점에 도착했다.

    “저기가 다무스 신전 맞죠? 미궁이 있는, 와…….”

    시아는 태연한 척 신전을 가리키려다 그대로 압도되고 말았다.

    다무스에서 가장 높은 곳, 세상의 지붕이라 불리는 고원에는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신전이 서있었다.

    관목림에 둘러싸인 신전은 신들의 거처를 연상하듯 웅장하고 장엄했다. 굵직하게 뻗은 기둥 틈새로 탁 트인 고원의 전경과 제단이 비쳤다. 고대의 사제들은 신성한 제단 위에 과일과 염소 따위를 바치고 밤낮으로 기도를 올렸을 것이다. 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 해의 농사와 안전,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였을 터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맞닥뜨린 신전은 텅 비어있었다.

    깨진 대리석 틈새로 잡초가 무성했다. 흙덩이처럼 굴러다니던 것들은 산짐승이 남긴 흔적이었다.

    국교회가 다무스에 들어온 후 신전이 버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끼 낀 다무스 신전은 과거의 영광과 함께 고독하게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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