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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95)화 (95/292)

95화 

과거 다무스를 멸망시켰던 역병은 바로 천연두였다.

레이디 켈튼이 알려준 방법은 소의 고름을 사람의 몸에 집어넣어 천연두를 약하게 앓게 만드는 우두법이었다. 시아가 사는 원래 시대에선 상상도 못할 예방 접종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중세엔 존재하지도 않는 백신을 사람들에게 맞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알렉스를 비롯한 슈테른베슈테크의 사람들은 당연히 경악했다. 소의 고름이라니, 그걸 왜 사람한테 넣는단 말인가!

그러나 애초에 백신이란 것도 소가 걸리는 우두와 사람이 걸리는 천연두의 증세가 흡사하다는 걸 발견한 데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천연두 바이러스와 비슷한 성질이나 증세가 약하게 나타나는 우두바이러스를 사람 몸에 심어 면역을 만드는 원리였다.

‘저도 이럴 줄 알았으면 백신이나 잔뜩 가져왔을 거예요. 어쨌든 제 말 잘 듣고 절대 무엇도 대충하시면 안 돼요.’

레이디 켈튼은 술과 끝이 갈라진 바늘, 깨끗한 물과 불의 정령을 요구했다. 술을 끓여 알코올을 추출하고, 바늘과 피부를 최대한 소독해 보려는 의지였다. 가져온 주삿바늘은 개수가 많지 않아 영지민 전체에게 사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시아의 앞에 농포 달린 암소를 끌고 온 알렉스는 여전히 불신하는 눈으로 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아는 그 자리에서 불소독한 바늘로 제 몸에 소의 고름을 집어넣었다.

알렉스는 그녀의 행동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렇게 몇 번 콕콕 묻혀서 팔뚝 피부에 찌르시면 돼요. 병은 며칠 후에 잠깐 증세가 나타났다 사라질 거고요. 바늘 소독 절대 잊지 마시고. 알았죠?’

먼저 나서서 고름을 맞다니. 알렉스는 얼이 빠지고 말았지만 아스타는 시아의 솔선수범에 용기를 얻은 것 같았다.

“미쳤다, 라. 슈테른베슈테크를 구할 수만 있다면 미쳐도 괜찮을 거야.”

아스타는 투구를 쓰곤 말에 훌쩍 올랐다.

냉병기 시대의 갑옷이 아스타의 얼굴을 완전히 가렸으나, 알렉스는 투구 속의 주군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조그마한 시야의 틈새로 보이는 시선엔 단단한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알렉스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아스타가 에드먼드와 함께 왕성을 기습할 동안 알렉스는 슈테른베슈테크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고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그녀가 맡긴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알렉스는 밤새 고민하고 또 고민했었다.

그러나 아스타의 고갯짓, 미묘한 숨결, 목소리, 말 한마디에 알렉스는 심지를 굳혔다. 아스타가 명한 건 슈테른베슈테크를 위한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아스타의 보좌관이었다.

“이곳은 네게 맡길게. 렉시, 널 믿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주군.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좋아. 이래야 내 보좌관답지.”

아스타가 투구 밑으로 웃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말에 올라타 있는데도 그녀가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응원하는 것만 같았다.

“무사히 슈테른베슈테크로 돌아오십시오, 주군.”

“그래. 너도 무사하고.”

아스타는 이내 고삐를 쥐고 한 차례 끌어당겼다. 그녀의 말이 앞발을 들며 포효하듯 울자 수많은 웅성거림이 일순 멈췄다.

아스타가 외쳤다.

“다무스의 땅에서 태어난 자들이여, 오늘 우리는 마침내 무한한 굴레에서 벗어나노니.”

사위가 고요했다. 펄럭이던 깃발도 이 순간만큼은 영주의 선언을 듣기 위해 멈춘 것 같았다. 말단의 병사부터 기사 대장까지 조용히 목울대만 움직이고 있었다.

“그대들의 피와 땀이 운명을 바꾸리라, 그대들은 모든 것을 바로잡은 자로 역사 속에 기억되리라.”

부글거리는 피가 도리어 전신을 차갑게 식혔다. 목 언저리를 타고 돌던 소름이 절제된 긴장감으로 들판 위 모든 이들의 심장을 뛰게 했다.

그들이 등지고 선 슈테른베슈테크의 고성은 거대한 절벽과도 같았다. 더는 물러날 곳 없는 자들의 각오가 검은 마법사를 무찌르겠다는 결의로 변했다.

아스타는 검을 빼 들었다. 알렉스는 군사의 맨 앞에 종이를 찢어 날렸다.

거대한 이동 스크롤이었다. 단번에 왕궁 앞 광장까지 이동할 수 있는 대규모의 공간이동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아스타의 코앞에서 공간이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졌다. 다른 공간에서 넘어온 바람이 낯선 냄새와 함께 흙먼지를 일으켰다.

“슈테른베슈테크의 검이여, 다무스의 자손들이여!”

아스타의 말이 길게 울었다.

“이 땅을 침범한 무뢰배들에게 사자의 포효를 보여주어라!”

우레와도 같은 함성이 들판을 새카맣게 뒤덮었다. 가장 먼저 힘차게 달려나간 아스타의 말이 공간이동의 진 속으로 사라졌다. 뒤따르던 수많은 병사들 역시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마지막 병사가 통과하자마자 공간이동의 진은 거짓말처럼 소용돌이치며 사라졌다. 사방에 날리던 흙이며 자갈, 잡초 따위가 먼지처럼 가라앉았다.

텅 빈 벌판에 남은 알렉스와 성의 사람들은 닫혀버린 공간을 침묵 속에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조용히 걸어가 아스타가 사라진 곳에 떨어졌던 신호기를 주워들었다. 선명하게 켜진 마도구의 불빛을 보자 머리를 어지럽히던 수많은 생각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바뀌리라.

“이젠 우리가 할 일을 해야 할 차례다.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

알렉스는 마도구를 품에 넣으며 남은 자들을 이끌었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시아 쪽 신호기 버튼의 신호가 다시 점멸하기 시작한 것을.

* * *

왕궁은 때아닌 사건으로 인해 분위기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국왕이 돌아왔다. 그것도 죽은 친위대의 시신과 함께.

“세상에, 에드먼드!”

“아아, 이자벨라…….”

에드먼드는 유약한 몸으로 이자벨라에게 안겨 들었다. 대신들과 성내 귀족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뛰어나왔다. 체통과 체면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그들은 패배자의 몰골로 왕비에게 안겨있는 왕을 향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곳은 지옥이었소. 저주, 그래. 내 그리 끔찍한 광경은 태어나서 처음 보았소. 도미니크 경의 머리가, 머리가…….”

아아아악! 에드먼드는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처럼 벌벌 떨었다.

친위대 기사 하나가 침통한 표정으로 앞에 나섰다. 둘러메고 온 자루를 왕궁 바닥에 풀자 말라붙은 핏자국이 가득한 미라가 나왔다.

저주에 가장 먼저 희생되었던 친위대, 도미니크 경이었다.

“꺄아아아아악!”

“오, 신이시여, 신이시여, 신이시여…….”

시녀들은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왕을 맞이하러 나왔던 베버 남작은 아들의 시신을 보고 달려들어 오열했다.

“도미니크, 내 아들, 어째서 네가 이런 꼴로 돌아왔느냐…….”

베버 남작은 벌떡 일어나 에드먼드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자위는 벌겋게 충혈되어 살기가 가득했다.

“전하, 이게 무슨 일입니까. 대체 왜 내 아들이 이렇게 돌아와야만 했단 말입니까!”

“베버 남작, 아무리 충격이 크다지만 말씀이 지나치시오!”

누군가가 호통을 쳤다. 그러나 베버 남작은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남작이 멱살을 잡을 기세로 에드먼드에게 다가가자 시종들이 그를 붙잡아 세웠다.

그때였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소.”

에드먼드의 발언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친위대를 이렇게 만든 건 날 죽이려는 세력의 짓이었소. 삿된 마법으로 나의 기사들을 죽이고, 내 목숨까지 노렸지.”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울부짖는 베버 남작을 빼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미라가 된 시체. 저주.

마법의 마, 도 모르는 자도 알 수 있었다. 도미니크가 전장에서 명예롭게 전사한 것이 아니라는 걸. 사악한 마법이 사람을 죽였다. 감히 국왕의 친위대를 노리고, 국왕의 목숨마저 노렸다.

이건 반역이었다.

누군가가 외쳤다.

“하, 슈테른베슈테크 백작의 짓이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뒤이어 다른 자들도 외쳤다.

“맞아요. 제국의 황제까지 홀렸다던 마녀라면서요. 약혼이 파기된 것에 대한 복수를 하려던 게 분명해요.”

“백작은 국왕 전하께서 왕비 전하와 결혼하신 후 변방 수호의 의무를 저버렸지. 항만에서 거둬들이는 관세까지 반토막 내어 상납한 시점에서 이미 백작은 반역자요!”

“이번 제국군 침략도 사실 백작이 제국과 내통한 거 아니오? 앞으론 제국 황제의 청혼을 거절한 척하고 뒤로는 손을 잡아 반역을 저지르고 왕성까지 집어삼키려던 속셈인 게지!”

에드먼드는 너도나도 입을 보태는 대신들을 보며 속으로 치를 떨었다.

가증스럽다. 이들은 모두 이자벨라를 의식하고 있었다. 백작령 외 변방 수호의 의무도 항만 관세도 애초에 아스타가 에드먼드와 약혼하면서 신의의 증표로 약속한 것들이었다.

약혼이 깨졌으니 약조 역시 깨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든든한 우방이었던 슈테른베슈테크가 왕가를 등지고 돌아서자 왕실은 단번에 재정이 궁핍해졌다.

이자벨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돈을 풀었다. 가져온 지참금과 재산이 막대했기에 왕실은 살아날 수 있었다.

내가 자초한 일이지. 에드먼드는 자조했다. 저주에 걸려있었을 당시엔 에드먼드 역시 이자벨라가 왕실의 구원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에드먼드가 휘청거렸다.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흘리자 이자벨라가 놀라서 그를 부축했다.

“전하, 에드먼드. 진정하세요. 내게 안겨요, 응?”

“이자벨라, 이제 난 오직 당신 품에서만 숨을 쉴 수 있소. 더는 아무도 믿지 못하겠어.”

에드먼드는 바닥에 쓰러진 채 이자벨라의 팔에 기댔다. 의지할 곳을 찾는 사람처럼 불안에 떨면서도 이자벨라를 예리하게 관찰하던 순간이었다.

에드먼드는 연기도 잊고 숨을 삼킨 채 굳어버렸다.

역광이 드리운 이자벨라의 얼굴에는 의미 모를 일그러짐이 피어있었다. 멀찍이 서있는 사제 발자크를 잠시 바라보더니 웃는 듯 우는 듯 나직이 말했다.

“…정말 저를 믿을 수 있으세요?”

긴장감이 폐부를 엄습했다. 미묘한 공기가 시선과 시선 사이를 오갔다.

역시 이자벨라는 알고 있었다. 왕의 저주가 풀렸고, 그런 왕이 연기까지 하며 다시 왕궁에 돌아온 것을.

미라를 왕궁 바닥에 풀어 보였던 친위대 기사가 멀리서 에드먼드를 바라보았다. 에드먼드는 눈을 마주치며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임을 신호로 친위대 기사 두 명이 아수라장이 된 로비를 몰래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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