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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94)화 (94/292)
  • 94화 

    “라크. 저도 라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유성우 정도의 선물이 아니면 안 받을 겁니다.”

    라크시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라크 덕분에 태어나서 이토록 많은 별이 떨어지는 걸 처음 봤는걸요. 예쁘고 귀한 선물 보여줘서 고맙긴 한데요.”

    “고맙긴 한데요?”

    “지금 우리에겐 이 별이 더 필요할 거예요.”

    시아는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끌렀다. 라크시스는 지금까지 시아가 허리에 뭘 매달고 있었는지조차 몰랐다. 밤이 깊었고, 그녀의 드레스 색이 짙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눈 감고 손 내밀어봐요.”

    라크시스는 순순히 시아의 말을 따랐다.

    이윽고 매끈하고도 뾰족한 광물이 라크시스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라크시스는 순간 바짝 굳어버렸다. 익숙한 촉감이었다.

    시아와 자신 사이에 감돌던 미묘하고도 간지러운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라크시스는 시아가 무엇을 가져왔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현자의 별이었다.

    “…어떻게 가져온 겁니까?”

    “로드 슈테른베슈테크가 줬어요.”

    시아가 맥없이 웃었다. 라크시스가 황망히 되물었다.

    “그러니까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백작이 이걸…….”

    애초에 슈테른베슈테크 고성 삼 층의 방에서 시아 일행이 붙잡힌 것도 현자의 별을 훔쳐 가려는 제국인 첩자로 몰린 탓이었다. 그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감옥 구경까지 하고 감시까지 당했었는데.

    현자의 별을 이렇게 갑자기 그냥 준다고?

    시아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백작은 우리와 같은 존재였어요. 다만 무한한 과거에 갇힌 사람이었죠.”

    자신이 시간 여행자임을 밝히고 현자의 별과 붉은 심장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시아는 솔직히 아스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웠었다.

    거기다 역병으로 멸망할 다무스의 미래까지 말했다. 일어나지도 않은 재앙을 아스타가 과연 믿어줄까. 아스타가 화를 내며 우리를 또다시 감옥에 가두려고 한다면 그때야말로 현자의 별과 붉은 심장을 훔쳐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스타는 시아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

    ‘제 말을 믿어주시는 건가요?’

    ‘…그럼. 믿고말고.’

    아스타는 이후로 한참을 침묵했다.

    그 침묵의 의미를 불신으로 받아들인 시아가 마침내 방에서 떠나려 했을 때, 아스타가 시아를 붙잡고 한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레이디 켈튼. 이 성은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 속에 갇혀있단다. 그것도 종말이 정해진 시간에.’

    드디어 의문이 풀렸다. 어떻게 아스타가 기습을 막았는지, 기습 다음 날 찾아올 왕을 위해 만찬을 준비했는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엿본 사람처럼 모든 일을 예견하고 있었는지.

    슈테른베슈테크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시간에 묶인 슬픈 역사의 땅이었다.

    그리고 시간의 굴레는 레이디 켈튼과 이방인들, 즉 시아 일행으로 인해 처음으로 틀어지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아마도.

    ‘불안정해진 광룡의 봉인 때문이겠지.’

    라크시스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번 시간 여행에서 찾아야 했던 광룡의 봉인은 역시 이 현자의 별이었군요.”

    그는 조심스럽게 현자의 별을 움켜쥐었다.

    “라크, 그건 광룡의 봉인이 아니에요.”

    시아의 단호한 부정에 라크시스는 당황하여 미간을 찌푸렸다.

    “로드 슈테른베슈테크가 다무스에 닥칠 미래를 부탁한다고 했어요. 자신은 악마 숭배자로 몰려 화형당할지언정 절대로 검은 마법사가 힘을 찾게 둬선 안 된다고요.”

    검은 마법사.

    아스타는 검은 마법사라고만 칭했지만 라크시스는 본능적으로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광룡의 봉인에 휘말려 시간 여행을 다니는 시아 일행을 제외하고 광룡의 봉인, 그러니까 힘을 찾아다닐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시아가 말했다.

    “현자의 별은 광룡의 봉인을 지키는 열쇠였고, 카얄은 지금까지 현자의 별을 차지하기 위해 무한의 시간 동안 아스타를 마녀로 몰아 죽인 거였어요.”

    * * *

    다음 날이었다.

    “주군, 드디어 국왕 전하께 신호가 왔습니다.”

    알렉스는 자그마한 마도구를 들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두 개의 버튼 중 남은 버튼에 초록빛이 들어와 있었다.

    시아 일행과 에드먼드 일행, 아스타 일행이 하나씩 나눠 가진 신호기였다. 작전지에 도착해 무사히 계획을 실행하게 되면 신호를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요르문의 작품이었다. 부품 하나 없는 중세에서 마도구의 재료가 되어준 건 다름 아닌 시아의 가방에 들어있던, 로렌 허슬러로 분장한 오토마톤이었다. 알렉스는 사람처럼 생긴 기계에 한 번 까무러치고, 기계의 목덜미를 우그러뜨린 손자국에 또 한 번 까무러쳤었다.

    “에디가 무사히 도착했나 보구나. 생각보다 오래 걸려 걱정했는데.”

    아스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알렉스는 삼 층 끝방에서 저를 맞이하는 아스타의 모습에 넋을 놓았다.

    케르딕 7세 양식의 판금 갑옷으로 중무장한 전신이 날렵한 광택을 자랑한다. 잘 관리된 창과 검이 배경처럼 줄지어 서서 아스타를 돋보이게 했다. 그녀는 존재만으로 압도적인 기세를 자랑했다. 마치 전장에서의 승리가 예정된 고전 영화 속 주인공 같았다.

    “렉시, 시킨 건 다 했고?”

    “출정 준비는 진작 마쳤습니다. 영지 방어를 위한 병력 빼곤 전부 모여있고요.”

    왕성 기습 작전.

    사특한 저주로 왕을 속이고, 사람을 죽였으며 왕국의 보물을 훔쳐 금지된 힘을 손에 넣으려 한 이자벨라와 국교회의 세력을 단죄하기 위한 출정이었다. 왕성을 기습하기로 한 건, 상대의 허를 찌르기 위함이었다.

    이자벨라는 꽤나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 에드먼드에게 저주를 건 술자가 이자벨라였으니, 저주가 풀린 것도 진작 알아차렸을 터였다. 게다가 검은 마법사와 이자벨라는 한통속이었다. 머뭇거렸다간 무방비한 상태로 그들에게 당할 수도 있었다.

    시아와 라크시스가 별을 보고 있을 때, 아스타는 군사를 계획했다. 에드먼드와 알렉스, 길버트 등의 최측근을 깨우고 곧 시아 일행을 불러내 밤새 왕성의 지도를 들여다봤다. 반역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주도면밀하게 이자벨라의 퇴로와 왕궁 병력을 파악해 나갔다. 아스타는 그렇게 꼬박 밤을 새웠다. 마법사의 마력이 아니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밤이었다.

    난데없는 출정 명령에도 성의 사용인과 기사들은 군말 없이 창을 닦고 총을 손질했다. 이들은 아스타와 함께 슈테른베슈테크 성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세월을 견뎌낸 자들이었다.

    그들에게도 이번 이방인은 특별했다. 시간의 굴레가 끊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들의 주인 역시 이를 눈치채고 대비하려는 것일 터였다.

    비록 비극적인 최후를 피하진 못했지만, 아스타는 단 한 번도 허투루 사람을 부린 적이 없는 영주였다. 기사 대장 길버트, 보좌관 알렉스를 필두로 슈테른베슈테크의 모든 이들이 출정 준비를 도왔다. 하녀들은 화약을 뭉치고, 주방에선 지하 저장고에서 육포 따위를 꺼내왔다.

    에드먼드는 이번 작전에서 이자벨라가 저지른 짓을 탄로시키기로 했다. 간밤의 기습에서 패배하고 복귀한 척 연기하여 이자벨라에게 일부러 의지한다. 저주가 풀린 국왕이 여전히 사랑에 빠진 것처럼 굴면 이자벨라는 틀림없이 동요하여 빈틈을 보일 터였다.

    그런 이자벨라의 뒤를 밟아 저주의 증거를 확보하고 난 후에 아스타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 에드먼드가 맡은 최종 임무였다. 그녀의 군대가 왕궁을 진압하면 이자벨라와 검은 마법사의 계략도 마침내 끝나는 것이었다.

    시아 일행 역시 임무를 맡았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미궁으로 가 광룡의 봉인을 찾기로 했고, 요르문과 루드윅은 친위대로 위장해 에드먼드의 역할을 돕기로 했다.

    에드먼드와 시아는 각각 아침 일찍 떠났다. 최대한 빠르게 이자벨라와 검은 마법사의 손발을 묶기 위함이었다.

    “에디가 잘할 수 있을까.”

    알렉스는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이젠 튤립 뽑던 철부지 왕자님이 아니시잖습니까. 친위대에 제국의 마법사까지 붙여두었으니 안심하셔도 될 겁니다.”

    “…그래. 내가 아직도 그를 어리게만 보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아스타는 세월을 가늠하듯 웃고는 성을 나섰다.

    너른 벌판에 바다색을 띤 햇살이 내리쬐었다. 청록빛 들풀 위로 백색의 군마와 냉병기가 쨍한 대조를 이루었다. 중무장한 기사들은 투구 사이로 비장한 열기를 뿜어댔다. 창과 총이 왕성을 찢어놓을 듯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아스타는 살갑게 웃으며 병사들을 지나쳐갔다. 그녀가 지나는 자리마다 발을 모아 붙이는 기사들의 갑옷 소리가 척 울렸다.

    아스타는 선봉에 섰다. 그녀의 말은 철갑을 두르고 투레질을 하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스타는 우윳빛 갈기를 쓰다듬으며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열외 없이 모두 창을 들고 있었다.

    “힘든 자는 이번 일에서 빠져도 좋다고 했는데. 다들 날 닮아 고집이 센 건지, 참.”

    “어제의 사태 때문에 다들 피곤해하긴 했습니다만, 제국의 마법사 덕분에 몸 상태 하나는 완벽하게 회복되었죠. 억지로 출정하는 이는 없습니다.”

    알렉스는 한 폭의 명화처럼 고아한 자태를 뽐내던 재수 없는 마법사를 떠올렸다.

    이 정도 회복 마법은 별거 아니라는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괴물 같은 놈이었다. 지금껏 아스타를 가장 강한 마법사로 알고 살아왔던 알렉스에게 라크시스는 차원이 다른 마력을 선보였다. 저주 걸린 수백의 기사를 단번에 제압한 것도 모자라, 마력 소모가 큰 치유, 회복 마법도 성의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사용했다.

    그 정도 마법사라면 앉은 자리에서 다무스를 멸망시키는 건 일도 아닐 테지. 듣기론 지금 이 시대에도 라크시스 옌은 살아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제국의 황제는 라크시스 옌을 이용해 다무스를 점령하지 않았을까. 현자의 별에 집착하면서 애꿎은 병사들의 목숨을 낭비하는 것보단 라크시스 옌 하나를 움직이는 게 나았을 텐데.

    그리고 어제는 왜 에드먼드의 치료를 직접 맡지 않았을까. 레이디 켈튼이 내내 붙어 돌보는 것보다 라크시스 옌 본인이 나서는 게 빨랐을 텐데.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레이디 켈튼은 아까 미궁을 열었다고 연락이 왔었지.”

    “그쪽이야말로 걱정하실 게 없을 겁니다. 라크시스 옌이 함께 갔으니까요.”

    “소는 준비됐겠고. 술과 바늘은 얼마나 모였지?”

    “술은 일단 성내 지하창고에서 풀기로 했고, 바늘은 계속 만드는 중입니다. 끝이 갈라진 바늘이란 게 워낙 생소하다 보니.”

    알렉스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아스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말로 하실 생각이십니까? 다들 미쳤다고 할 지도 모릅니다, 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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