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라크!”
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하늘을 가리켰다. 라크시스가 웃었다.
“때를 맞춰온 모양이군요.”
이윽고 펼쳐진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밤의 요정이 장난스러운 손길로 별 가루를 뿌린 하늘이었다. 공장의 매연도, 번득이는 간판도 없이 오로지 어둠만을 고스란히 내보이던 밤 위로 별이 흐무러지게 폈다. 자글자글 빛나는 수억 개의 별들이 밤의 길을 따라 목자처럼 공전하고 있었다.
밤의 길을 가로지르던 나그네 별이 파편을 뿌리고 사라졌다. 별의 조각들은 죽음의 때가 도래하자 가장 아름다운 빛을 내며 산화했다. 퐁, 퐁퐁. 잠들지 않은 인간들을 위해 마지막 춤을 추는 별들은 광활한 우주를 무대 삼아 이리저리 궤적을 그렸다.
최후의 별은 그렇게 사방에서 솟아났다.
한계를 넘어서 솟아나던 별들이 마침내 쏟아졌다. 별이 비처럼 내리며 어둠을 적셔나갔다. 밤이라는 창문을 타고 흐르는 별 줄기들이 대지를 적시고 자그마한 인간들의 마음을 적셨다.
아름답고도 슬픈 장관이었다. 유성우였다. 시아는 먹먹한 감탄을 뱉었다.
“…와아.”
시아는 밤하늘에 온통 정신이 쏠려있었다. 라크시스가 옆에 있는 것도 잊은 채 쉴 새 없이 유성우를 구경했다.
라크시스는 처음부터 그런 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밤하늘을 볼 필요가 없었다.
시아의 눈동자엔 별이 쏟아지는 우주보다 더 찬란한 빛이 깃들어 있었으니까. 유성우를 처음 보는 설렘과 기쁨.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순수한 흥분은 라크시스로 하여금 유성우보다 더 아름다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문득 이 시기에 제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지더군요. 만약 지금의 제가 과거의 절 만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이 광경이 떠올랐죠.”
“이 시대의 라크는 별을 좋아했나 봐요.”
시아는 별을 구경하느라 여전히 떨어질 듯 성벽에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밤은 여전히 빛나는 중이었다.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하길 좋아했습니다. 마력의 흐름은 태양과 달의 움직임에 따라 곧잘 달라지곤 했거든요.”
시아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마류를 연구했던 거예요? 요르문처럼?”
“순서가 잘못 됐습니다. 요르문이 절 보고 배운 거죠.”
시아는 피식 웃었다. 좋은 구경 실컷 시켜주고도 자기 자랑은 빠지질 않는다.
“마력은 전기나 불, 물 같은 일종의 에너지입니다. 다만 기원을 알 수 없고 평범한 물리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법사로 태어난 자가 아닌 이상 다루기 어려운 힘이죠.”
유성우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이어졌다. 별이 끝없이 떨어지고 쌀쌀한 바람이 성벽을 훑었다. 라크시스는 조용히 온기를 불러내 시아의 곁에 둘렀다.
그러고는 가만히 입술을 열었다.
“…이때의 전 꽤 방황했었습니다. 홀로 태어나 아주 오랜 시간을 덧없이 살아오면서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상태였어요.”
라크시스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낸 건 처음이었다. 워낙 잘나고 부족할 것 없던 이미지의 라크시스였는데. 물론 지금 하는 이야기들도 평범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말이다.
시아는 나직이 과거를 읊조리는 라크시스가 새삼 낯설다고 느꼈다.
“가, 족이 없었던 건가요……?”
“글쎄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전 눈을 떴을 때부터 이 모습이었고, 제가 기억하는 최초의 장면은 고대 마도 시대가 멸망한 직후의 폐허였으니까요. 공허하고 슬펐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조차 모르겠더군요. 그 전의 기억이 모조리 사라져 있었거든요. 가족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어쩌면 제게도 부모가 있었는데 광룡의 불길에 휩쓸려 죽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시아가 당황해하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당신이 미안할 게 뭐가 있나요.”
“그래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을 수 있잖아요.”
별을 보고 기뻐할 줄 알았는데, 대화 몇 마디에 금세 풀이 죽어버렸다. 라크시스는 또다시 제 시선을 피하는 시아를 위로했다.
“이미 무뎌질 대로 무뎌진 과거니까. 괜찮아요.”
라크시스는 천천히 유성우를 올려다보았다.
“어쨌든 이 당시의 전 꽤 여러 번 죽으려 했었습니다. 마력 때문에 자연 회복이 되면서 그마저도 실패했지만요. 이때 절 찾아와 구해준 게 바로 로드 켈튼이었습니다.”
“로드 켈튼이요?”
“요르문의 아버지 루이스였죠. 마류학자였던 선대 로드 켈튼이 내게 손을 내밀더군요.”
라크시스는 아득히 먼 우주를 바라보며 기억에 잠겨 들었다. 당시의 라크시스는 온 저택의 문을 걸어 잠그고 근 일 년 가까이 잠적 중이었다.
‘후, 샤샤리아 냄새가 진동을 하네. 그쪽이 그 대단하시다는 라크시스 옌이로구만?’
‘…내 저택엔 어떻게 들어온 거지?’
‘일단 환기부터 좀 하고. 황제가 닦달을 해서 와봤는데 시체처럼 이러고 있을 줄이야. 내가 당신 같은 마법사로 태어났으면 이런 먼지 낀 초상화나 걸린 방에 틀어박혀 있진 않았을 거야.’
물빛 머리의 남자는 사방에 널브러진 수연통을 치우고 두꺼운 커튼을 열어젖혔다. 한 달 만에 맞이한 햇빛에 정령들이 신이 나 와글거렸다.
‘정령들이 네게 문을 열어줬던가?’
‘이봐, 할아범. 지금 그게 중요해? 중요한 건 말이야.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거야. 보아하니 초상화 속 여자가 죽은 연인인 것 같은데. 안 그래?’
오랜만에 마주한 낮은 시리도록 눈이 부셨다. 게다가 할아범이라니. 라크시스는 신경질을 내며 돌아누웠다.
‘…꺼져.’
그럼에도 물빛 머리 남자는 라크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등 돌린 라크시스가 참다못해 벌떡 일어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말이다.
‘일단 내 말을 들어보고, 그래도 살기 싫으면 죽든 말든 맘대로 해. 그땐 진짜 꺼져줄 테니까, 응?’
라크시스는 오래전 세상을 뜬 루이스 켈튼을 떠올렸다. 괴짜 같긴 해도 괜찮은 인간이었다.
“그는 아무리 고대 마법사래도 우주의 모든 것을 알진 못할 것이라면서 절 설득했죠. 죽는 건 세상의 진리를 깨우치고 해도 늦지 않는다더군요.”
바람결에 은발이 짧게 날렸다. 눈을 가만히 감고 미소 짓는 라크시스는 따스했던 기억을 찬찬히 밟아오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와 마류를 연구하는 건 재미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장난감을 몇 만들었는데, 그게 꽤 잘 팔렸던 탓에 아예 상점을 차리기도 했었죠.”
그때 만든 물건 중 하나가 이동 스크롤이었는데, 그걸 팔던 곳이 번성해서 아예 로튼데일에 본격적으로 마도구 상점을 여러 개 냈고 머지않아 로튼데일 상가 전체를 사들였다고 했다. 시아는 첫 번째 시간 여행 때 이동 스크롤을 사러 마도구 상점 거리인 로튼데일을 방문했던 걸 떠올렸다.
그 부동산이 다 라크의 것이라니. 살다 보니 돈이 벌렸다는 말이 진짜였네. 평소 같았으면 참 대단하다며 장난스럽게 핀잔이라도 주었겠지만, 이상하게 지금의 라크시스에게는 그런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시아는 라크시스를 살피며 조용히 말했다.
“선대 로드 켈튼이 라크를 살린 거네요.”
“그런 셈이죠.”
두 사람은 침묵했다. 그나마 별이라도 구경할 수 있는 게 참 다행이었다. 시아는 애꿎은 손톱만 살피며 거스러미를 뜯었다.
라크시스의 과거는 시아가 차마 가늠할 수 없는 세월이었다. 애초에 살아온 시간의 절대량이 달랐다. 시아는 제가 뭘 어떻게 해도 라크시스만큼이나 세상일에 초연해질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럼에도 시아는 라크시스에게 뭐라고든 말해주고 싶었다.
“…앞으로도 그런 생각이 들거든 꼭 내게 말해줘요.”
“시아?”
“전 라크가 죽고 난 이후의 세상을 살아봤잖아요? 이곳 중세의 슈테른베슈테크와는 물론, 라크가 살고 있었던 3518년의 마도 시대와도 너무나도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어요. 물론 마력이 모두 사라져서 지금보단 덜 신비롭고, 덜 마법적인 세상이긴 하지만요.”
라크시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아를 바라보았다.
“만약 라크가 3587년의 아르카나에 온다면 분명 놀랄 거예요. 거미줄 같은 노선이 지하를 장악한 아르카나 중앙역이며, 달을 밟아보려는 비행선에 각종 신문물까지 분명 엄청 재미있을 거라고요.”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별똥별이 만든 묘한 분위기가 라크시스의 감성을 잠시 부추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아에겐 제 과거가 꽤 심각하게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저 지금은 괜찮습니다만.”
“그러니까 만약 또 힘든 순간이 찾아온다면 꼭 제게 말해줘요. 칠십 년 후의 아르카나에서도 라크가 즐겁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제가 많은 이야기들을 해줄 테니까요.”
시아는 미소 지었다.
순간 라크시스는 시아에게서 오랜 친구의 모습을 엿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심지 단단한 힘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쏟아지는 별을 담고 있던 시아의 눈동자는 이제 라크시스를 오롯이 담고 빛나고 있었다.
아. 이건 또 다른 빛이로군.
라크시스는 폐부에 열기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라크시스는 그녀의 눈동자가 빛나는 순간을 좋아했다. 새로운 것, 신기한 것을 볼 때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권태로웠던 삶조차 즐거워지곤 했다.
처음엔 분명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라크시스는 제 권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닌, 순수하게 그녀가 눈을 빛내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 장난을 치다가 토라질 때도, 피 흘리는 이를 구하기 위해 진지해질 때도 시아의 눈은 언제나 선명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이젠 뭐든 좋았다. 시아는 그에게 있어 살아있는 사람이었고, 라크시스는 그 생기에 점점 녹아들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그녀의 눈이 저로 인해 빛났으면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오직 자신만을 향한 시아의 시선에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라크시스 본인은 이런 심정을 여전히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무료한 일상에 날아든 홀씨 같은 기쁨이 어느새 망울을 터뜨리기 직전의 봉긋한 감정으로 무르익어 버렸다.
다만 라크시스 본인만 몰랐을 뿐.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크시스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시아가 장난스레 라크시스를 툭 쳤다. 진지해진 분위기가 어색했던 탓이었다.
“그런데 칠십 년 후까지 살아있으려면 광룡의 봉인부터 먼저 찾아야 되는 거 알죠?”
“그러니까 지금 제게 일단 할 일부터 해결하라, 이 말씀이시군요. 아픈 과거를 기껏 털어놓았는데. 당신이 절 진심으로 위로해 주셨다 믿었건만.”
라크시스가 서글픈 표정을 지어내며 고개를 가련하게 떨궜다.
으휴. 말이나 못 하면. 시아가 콧방귀를 뀌며 키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