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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90)화 (90/292)
  • 90화 

    내가 시간 여행을 하게 만든 건 광룡의 봉인이었으니까. 어쩌면 백작도 봉인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지.

    시간 여행자가 둘이라니. 그런 건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로드 슈테른베슈테크는 미래를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백작이 미래를 알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시아는 아스타가 다가올 앞날을 알고 있었던 것만 같다고 느꼈다. 그게 아니라면 지난 이틀 사이 백작이 보여주었던 행동을 한 번에 이해시켜 줄 타당한 근거가 없었다.

    “일단 여기까지 하고.”

    시아는 일기장을 덮었다. 그러곤 허리춤에 다시 마류 탐지기가 든 주머니를 묶었다.

    일기장에 정리해 둔 의문을 해결하러 갈 시간이었다.

    “가장 중요한 광룡의 봉인부터 알아내 보자.”

    시아는 거치적거리는 드레스 자락을 쥐고 종종걸음으로 방을 빠져나왔다. 지나가던 하녀를 붙들고 물었다.

    “혹시 저와 같이 온 손님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로드 루드윅 젤마니라고, 덩치는 이만해서 곰같이 생긴…….”

    “어머, 제국에서 오신 재미난 남작님을 말씀하시는군요. 아마 기사님들과 같이 계실걸요?”

    응?

    “재미, 난 남작님이요?”

    “호호, 네에. 어찌나 신기한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계시던지. 아, 지금쯤이면 무기고에 도착하셨겠네요.”

    하녀들이 입을 가리고 깔깔거렸다.

    엥, 무기고까진 또 언제 갔대.

    자신의 정체를 파헤치려 들 땐 그렇게 거슬리고 불편했는데 막상 필요할 때가 되니까 근처에 없다.

    하녀들이 덮개 닫힌 등불을 건넸다. 덮개 닫힌 등불을 건넨다는 건 바람이 부는 바깥 멀리까지 나가야 된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등불의 유리 덮개 안에서 불티가 타닥타닥 날았다.

    어디서 많이 본 불티인데. 문득 지하 감옥 복도마다 걸려있던 횃불이 떠올랐다.

    ‘로드 슈테른베슈테크의 정령이구나.’

    정령들은 덮개에 갇힌 것이 화가 났는지 등불 속에서 왱알거리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역시 마법사가 있는 시대는 달라도 뭐가 다르구나. 기름 대신 정령으로 길을 밝힌다는 게 신기했다.

    문득 라크시스가 지하 감옥에서 불티 정령들을 가리키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도 원하는 게 있으니 우리를 지켜보았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시아는 등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녀들이 물었다.

    “무기고로 안내해 드릴까요?”

    “…네, 부탁드려요.”

    시아는 태연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곧 하녀들이 무기고로 향하는 길에 앞장섰다.

    본성 변두리에 위치한 무기고는 불이 환해 어둑한 사위에서도 금방 보였다.

    “아니, 그래서 제가 석상을 무너뜨렸는데 글쎄 그 안에서 사람 뼈가…….”

    “그렇다면 진짜 가멜인으로 석상을 만들었단 소립니까?”

    “그게 아니라 부족장의 딸이 원한을 품고 죽어서 썩어 없어지지도 못하고 석상이 된 거죠!”

    “에이, 돌에 뼈를 넣고 조각했겠지.”

    “석상은 거대한 돌 한 덩어리로 만들어졌어요. 잘라서 이어붙인 자국이 없었다니까요? 아니 그런데 그 석상 안을 파보니까 글쎄…….”

    반쯤 열린 무기고의 문틈 새로 온갖 괴담이 불빛과 뒤섞여 새어 나왔다. 대체 뭘 하나 했더니 이 시대의 무기들을 구경하러 왔다가 한바탕 괴담 파티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괴담 수집가라더니, 정말로 괴담이 끊이질 않는구나. 시아는 그들의 대화가 멈추길 기다리다 지치고 말았다. 결국 두어 번 노크하면서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저, 로드 젤마니.”

    “레이디 켈튼? 왜 여기 계십니까?”

    뜻밖의 손님에 루드윅이 쏜살같이 마중 나왔다. 괴담이 멈춰버린 탓에 기사들이 와글거리며 따라 나왔다.

    “오, 절벽 위의 구세주께서 오셨구만요.”

    “아가씨, 날붙이밖에 없는 이 삭막한 무기고엔 무슨 일로 오셨슴까?”

    “얀마, 아가씨가 아니야. 레이디 켈튼이라고 불러드려야지. 기사면 기사답게 격식과 예법을 좀 지키란 말이야.”

    “아, 왜 때려요, 대장! 태생이 시꺼먼 바닷사람인데 어떡하겠어요. 수도 출신 기사들이랑 제가 같슴까?”

    하하하……. 첫날의 연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정제되지 않은 친근함과 살가움이 가득하다. 저들끼리 대화하는 걸 들어보니 아무래도 이 기사들은 시아가 아는 기사와는 역시 좀 다른 것 같았다.

    그녀는 그들을 제치고 루드윅에게 다가갔다.

    “로드 젤마니에게 묻고 싶은 게 좀 있어서요.”

    그러자 루드윅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기울였다.

    “어라, 레이디 켈튼께선 고대 마법사님과 같이 계셨던 거 아닙니까?”

    엥.

    “…라크요?”

    루드윅이 머리를 긁적였다.

    “길이 엇갈리셨나. 아무튼 뭘 묻고 싶으시기에 여기까지 찾아오셨습니까?”

    라크가 날 찾았었나 보네.

    하지만 일단 루드윅을 찾아왔으니, 그에게 물으려고 했던 것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시아는 루드윅을 무기고 밖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혔다. 기사들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곧 사위가 고요해졌다.

    “로드 젤마니. 어젯밤 감옥에서 했던 약속 기억나시나요?”

    “약속이라 하시면…….”

    시아는 그를 올려다보며 눈동자를 빛냈다.

    “우리가 로드 젤마니를 구해주는 대가로 현자의 별에 얽힌 신화와 역사를 이야기해 주기로 하셨죠.”

    루드윅은 그제야 시아가 자신을 왜 찾아왔는지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제 팔을 꽉 붙들고 있었다. 아예 답을 들으려고 작정을 한 것 같았다.

    “네, 그랬었죠.”

    “그런데 궁금한 게 더 생겼거든요. 로드 젤마니라면 어렵지 않게 답해줄 수 있는 것들인데. 거래를 하나 더 한다면 추가 질문에 대한 답도 들을 수 있을까요? 그 대가는 당신이 궁금해할 법한 미래의 일들 중 일부를 알려드리는 거예요.”

    “거래라니, 가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레이디 켈튼, 전 이미 당신과 고대 마법사님께 신세를 많이 졌는걸요.”

    감옥에서야 제가 로렌 허슬러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어서 눈이 돌아간 상황이었으니. 루드윅은 미안한 듯 정수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시아가 반색하며 되물었다.

    “그럼 그냥 다 말씀해 주시는 건가요? 제가 묻고 싶은 게 꽤 많은데.”

    “물론이죠. 하지만 레이디 켈튼만 괜찮다면 미래의 이야기들을 들려주셔도……. 하하.”

    루드윅은 아쉬움 반, 기대 반으로 시아의 눈치를 보며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그런데 혹시 지금 당장 듣고 싶으신 겁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긴 하죠.”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하지만 시아는 도무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루드윅 앞에 서선 생글생글 웃을 뿐이었다.

    “전 오래 걸려도 괜찮아요. 로드 젤마니만 괜찮다면요.”

    그때 루드윅이 붙박인 듯 굳어버렸다. 그의 시선이 시아의 어깨 너머에 멍하니 꽂혀있었다.

    시아는 덜컥 겁이 났다. 루드윅은 이래 봬도 괴담 수집가였으니까. 게다가 아까까지 신나게 괴담을 주절대지 않았는가.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허옇게 질렸다. 혹시 귀신이라도 본 거 아냐?

    “왜 그러세요……? 뒤에 뭐라도 있어요?”

    “아, 아닙니다! 아무도 없었어요.”

    아무도?

    더 무섭다. 그럼 뒤에 있었던 게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었단 소리 아냐.

    무기고의 문이 닫혀있어 주변에 불빛이라곤 시아가 든 등불을 빼곤 하나도 없었다. 우뚝 솟은 잿빛 성벽과 저 멀리 창문만 드문드문 밝은 고성, 밤바람에 쓸려나가는 나뭇잎의 거대한 마찰음과 스산한 바람.

    부엉이 소리가 아득한 곳에서 을씨년스럽게 울려 퍼졌다. 들고 있던 등불이 이리저리 일렁거렸다.

    등골이 오싹했다.

    “아무도, 요?”

    “아무도가 아니라 아무것도요…….”

    루드윅은 마른세수를 벅벅 해댔다. 아무리 눈을 비벼도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라크시스 옌.

    그가 아름드리나무 뒤에 가만히 기대어 루드윅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루드윅은 자꾸만 삐져나오는 진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라크시스 옌의 기분은 그리 썩 좋지 않아 보였다.

    설마 내가 레이디 켈튼이 방에 있다고 알려줬던 바람에 헛걸음을 한 건가.

    레이디 켈튼과 나 사이를 오해하게 두면 안 되는데.

    시아 켈튼은 분명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상대였지만 루드윅은 씨즐턴행 기차를 탄 이래 단 한 번도 시아를 이성으로 본 적이 없었다.

    그랬다간 고대 마법사에게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로드 젤마니, 괜찮아요? 대체 뭘 본 거예요?”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진짜로…….”

    시아가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정말로 개미 한 마리조차 없었다. 자신이 걸어왔던 회랑과 흙길, 그 옆에 자리한 거대한 고목 한 그루가 전부였다.

    루드윅이 절절매며 코끝을 연신 긁어댔다. 라크시스가 있는 방향을 흘끔거리며 말했다.

    “어서 갑시다. 저쪽 회랑 기둥 근처라면 탁 트인 데다가 오가는 사람도 없어서 대화하기 좋을 겁니다.”

    회랑은 라크시스의 시야가 닿는 곳 중 가장 가까운 장소였다.

    “바깥은 춥지 않겠어요? 응접실 같은 데는 비어있을 텐데.”

    “하지만 응접실은 지나가는 사용인들이 대화 내용을 들을 수도 있잖습니까.”

    아, 그런 이유였나. 하긴 현자의 별은 슈테른베슈테크의 보물이지. 괜히 이곳 사람들이 모르는 역사를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도 부담스럽긴 하네. 누가 들을지도 모르니까.

    “그럼 제 방으로 가실래요? 아님 로드 젤마니 방으로……?”

    시아는 그녀의 방으로 가잔 말을 듣자마자 허옇다 못해 퍼렇게 변해버린 루드윅을 발견했다. 이젠 귀신이 문제가 아니었다. 슬슬 그가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결국 루드윅은 앞장서서 성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그냥 응접실로 가시죠. 사용인이야 물리면 되니까요. 하하, 하하하…….”

    * * *

    “광룡의 부활이라니, 세상에……. 그렇다면 전 오 년 후에 죽는 건가요?”

    다행히도 응접실은 불까지 꺼진 채 텅 비어있었다.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자 루드윅은 언제 긴장했었냐는 듯 입을 풀었다.

    “글쎄요. 로드 젤마니, 혹시 결혼하셨나요?”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시는지……. 약혼자는 있습니다만 제가 하도 밖으로 나다니는지라 파혼당할지도 모릅니다.”

    파혼당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저렇게 당당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니. 등불 속의 정령들도 놀란 것처럼 다 같이 모여 입을 틀어막았다.

    시아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툭 터트렸다.

    “로드 젤마니가 언제 어떻게 세상을 뜰진 모르겠지만, 젤마니 가문은 계속 대를 이어나가요.”

    당신의 증손자는 미래에 버젓이 살아있거든요. 당신이 만든 가풍 탓에 군인이 되었죠.

    루드윅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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