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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89)화 (89/292)
  • 89화 

    신께선 그들에게 어둠의 봉인을 맡기고자 하셨던 걸까.

    그래서 그들을 머나먼 미래에서 불러온 것일까.

    그때, 열린 창으로 티끌만 한 불티가 날아들었다. 촛대 끝에 내려앉은 불티가 이내 자그마한 사람 형상으로 변해 아스타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녀가 부리던 불의 정령이었다. 아스타는 제 눈과 귀를 대신해 줄 정령을 성 곳곳에 곧잘 숨겨두곤 했다.

    에드먼드는 정령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 아스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윽고 아스타가 조용히 입술을 뗐다.

    “에디. 나와 함께 미궁으로 가자.”

    에드먼드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아스타, 지금 무슨…….”

    불의 정령이 포르르 에드먼드의 손에 내려앉았다. 에드먼드는 당황했다. 곧 정령이 에드먼드의 귓바퀴에 걸터앉아 입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령의 소리를 듣기 시작한 에드먼드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마침내 정령이 촛대 위에 둥글게 몸을 말아 잠들고, 에드먼드는 넋이 나가 아스타를 불렀다.

    “…아스타.”

    정령에게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탓이었다.

    아스타는 그저 설핏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엔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아스타가 말했다.

    “미래에서 온 이방인들에게 먼저 미궁을 열어주는 거야. 그것이 검은 마법사의 계획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 * *

    한편 시아는 만찬이 끝나자마자 곧장 방으로 되돌아왔다.

    “어라, 레이디 켈튼. 과거의 고성을 구경할 기회도 흔치 않은데, 방에만 계실 겁니까?”

    라크시스는 무언가를 확인해 보겠다며 사라진 후였고, 요르문은 손볼 마도구가 있다며 마찬가지로 제 방에 틀어박힌 상태였다.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요. 금방 나갈 거예요.”

    “아, 그렇습니까.”

    다행히 루드윅은 별말 없이 떠나갔다. 막간을 이용해 성 구석구석을 살펴보러 간 것이다.

    하녀들이 시아에게 따라붙었다. 시아는 그들을 모두 물리곤 방문을 걸어 잠갔다. 시간 여행을 할 때마다 챙겨 다녔던 슈트 케이스가 침대맡에 있었다.

    시아는 가방을 열곤 안으로 손을 휘저어 물건을 찾았다. 공간이 무한대로 늘어나는 가방 속에서 맨 밑에 깔려버린 물건을 찾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한참을 낑낑거리다가 시아가 꺼내 든 건 다름 아닌 일기장이었다.

    소파에 앉아 자그마한 테이블을 끌어당기곤 일기장을 펼쳤다. 그러곤 허리에 감겨있던 가느다란 가죽끈을 살살 풀어냈다.

    몸치장을 도왔던 하녀의 눈을 피해 풍성한 옷자락 사이에 보호색처럼 숨겨두었던 것이었다. 가죽끈을 풀어내자 그 끝에 달려있던 가죽 주머니가 열렸다.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주머니 안엔 요르문이 준 마류 탐지기가 들어있었다. 혹시 몰라 하루 종일 켜놓은 채로 가지고 다녔던 것이다.

    시아는 일기장을 펼쳤다.

    “난 분명 봉인이 불안정할 때 과거로 오게 되어있단 말이야.”

    이번 일기에는 중세의 슈테른베슈테크로 이중 시간 여행을 한다는 말이 없었다. 그저 씨즐턴행 기차 안에 불시착해 라크시스와 휴양을 떠났다가, 닷새째에 고성에서 화재가 났다는 기록이 전부였다.

    “어디 보자……. 화재가 났던 날 고성 주변에서 무지갯빛 물웅덩이가 발견됐다고.”

    일기장의 시아 켈튼은 고성의 화재가 액화 갈리프콜에 의한 방화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방화범이 기름을 옮기다가 몇 방울 흘린 것이 증거로 남았던 것 같다고 적어놓았다.

    “하지만 무지갯빛 마류 이상 현상을 보진 못했지. 당연해. 이때만 해도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은 귀신이 들려 버려진 유적이었으니 휴양지까지 가서 굳이 들를 일이 없었을 거야. 거기다가 일기장 속의 시아 켈튼은 아직까진 자기가 왜 시간 여행을 하는지 몰랐고.”

    화재가 나고 약 이틀 후 일기장의 시아 켈튼은 원래 시대로 되돌아갔다. 그 말인즉 불안정한 봉인이 만들어내는 마류 이상 현상도 그즈음 끝났다는 말이었다.

    고성에서의 화재 이후 마류 이상 현상이 끝났다면.

    ‘그건 봉인이 파괴되었다는 말과 같지.’

    “광룡의 봉인은 고성이 연결해 준 이 시대에 있는 게 분명한데…….”

    시아는 살짝 초조해졌다.

    지난 시간 여행에서 오토마톤의 심장을 허무하게 빼앗겨버린 탓이었다. 사실 조금은 방심했었다. 현실감이 없었다는 말이 맞았을 것이다. 시아는 마도 시대 이후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광룡의 부활이 마도 시대의 종말을 이끌었을 만큼 엄청난 사건이었다는 건 책으로나 배웠지 실제로 본 적은 없었으니까.

    인류애 비슷한 인간의 도리로, 사람을 살리는 의술사의 소명으로 광룡의 부활을 저지해 무고한 희생을 막아보겠다고 다짐했던 것뿐이었다. 막상 마도 시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오니 발명가 메이슨 비렌체를 만난 일이라든가, 재키 레이븐과 그 사칭범이라든가 하는 일에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게다가 일기장의 시아 켈튼은 존재조차 몰랐던 봉인의 존재를 메이슨 비렌체를 통해 일찍이 짐작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여유가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카얄이 봉인의 존재를 알아채고 글레이셜 홀로 찾으러 오기 전에 내가 충분히 먼저 봉인을 회수할 수 있을 것이라 무의식중에 생각한 거겠지.

    막상 마주한 봉인의 파괴력은 무섭기 그지없었다. 라크시스가 온몸으로 막아내지 않았더라면 켈튼 저택이 그대로 날아갈 뻔했으니까.

    이번 이중 시간 여행은 정말로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중세의 슈테른베슈테크에서 얼마나 머물게 될진 아무도 몰랐다.

    그러니 대비할 수 있을 때 미리 대비하고픈 마음이 컸다.

    시아는 일기장 뒷부분의 빈 공간을 펼쳐 그녀가 알게 된 것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현자의 별은 광룡의 봉인이 아닐 가능성이 커.”

    현자의 별은 마류 탐지기에 반응하지 않았다. 불안정한 봉인이었다면 마류 탐지기가 시끄럽게 왱왱거렸어야 했다.

    마류 탐지기가 고장 난 것도 아니었다. 기습이 있던 날 밤, 라크시스가 쓰러진 시아를 안아 들고 백작과 대치했을 땐 마류 탐지기가 분명 그의 널뛰는 마력에 반응했었으니까.

    볼펜이 매끄럽게 백지 위를 굴렀다. 열을 맞춰 가지런히 써 내려간 글씨가 빈 면을 차곡차곡 채웠다.

    “그리고 신화 속의 카얄은 사도의 이름이 아니었어. 태고의 어둠을 가리키는 말이랬지.”

    일기장엔 광룡의 봉인을 파괴하러 다니는 이가 고대 마법사이자 사도인 카얄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렇다면 일기장 속 카얄은 갈리프가 아닌 태고의 어둠을 숭상하던 사도일지도 몰랐다.

    ‘아마 루드윅이 말해줬던 미옌이라는 첫 번째 사도겠지. 갈리프를 배신하고 스스로 광룡이 됐다던 사도 말이야.’

    그래, 그래서 자기 이름도 바꿔치기 한 거 아냐? 원래 영화 속에서도 악당은 본인을 별명으로 부르잖아. 자기가 좋아하는 거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걸로.

    헨리 던로가 스스로를 재키 레이븐이라 칭했던 것처럼.

    “마지막으로……. 음, 로드 슈테른베슈테크가 수상하다? 뭐라고 쓰지. 어쨌든 백작은 무언갈 알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직접 겪어본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는 역사가들의 평가와 달리 호방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에 노련미까지 갖춘 사람이었다. 판단이 서면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편이기도 했다.

    시아는 허전해진 목덜미를 만졌다.

    ‘내게 목걸이를 준 이유도 에드먼드 3세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서였지.’

    아니나 다를까, 기습 날 밤 집사 론다니를 통해 백작이 시아에게 주었던 목걸이는 에드먼드 3세의 어머니가 결혼 전 즐겨 착용했던 목걸이였다고 했다. 선왕비의 보석이었던 것이다.

    아스타는 자신을 배신한 연인이 주었던 선물을 보란 듯이 다른 여자에게 줘버렸다. 그것도 전 애인의 어머니인 선왕비의 보석을.

    그러니 에드먼드 3세가 화가 나선 시아를 노려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남의 연애 중간에 끼여버렸다고 하기엔 또 무리가 있었다.

    과거 슈테른베슈테크는 씨즐턴에서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제국과 맞닿은 지역이었기에 항구를 통해 관세를 거둘 수 있는 경제적 요충지로 자리매김했다.

    거기에 한때 제국 일부에 진출했을 만큼 슈테른베슈테크가 지닌 해군력도 상당했다.

    단순히 전 약혼자와 기 싸움을 했다기엔 에드먼드 3세와 백작이 가진 지위가 지나치게 높았다.

    어쩌면 백작은 시아를 이용해 에드먼드 3세와 이자벨라 황녀에게 경고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슈테른베슈테크가 앞으로 왕실과 갈라서겠다는 의미로 말이다.

    ‘너무 깊게 생각했나.’

    아무튼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는 가진 패를 십분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제국군의 기습을 막아낸 건 지나치게 완벽한 대처였다. 제국군의 경로에 있던 민가도 모조리 비워놓고, 성안의 모든 기사들에게 연회에서 취한 척을 하도록 시키고, 에드먼드 3세가 친위대와 이곳까지 올 것을 예상하곤 만찬까지 준비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배후에 이자벨라가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미래를 알고 있다면 가능하겠지.”

    반면에 역사를 돌아보면 그녀의 최후는 지나치게 비극적이었다. 역병이 퍼지고 악마 숭배자로 몰려 죽을 때까지 백작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중세의 의술 체계가 지금과 비교했을 때 뒤떨어졌다고는 하나, 그 옛날의 사람들도 전염병이 어떻게 퍼지고 그런 병들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경험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가령 흑사병이 창궐하던 수백 년 전, 병에 걸린 자의 가족을 모조리 집에 가두고 굶어 죽을 때까지 접촉을 차단해 버린 제국의 황제나 환자를 돌볼 때 흰 천을 얼굴에 뒤집어썼던 사제들 같은 경우 말이다.

    그러나 아스타는 절벽 위에서 벌어진 저주는 몰랐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참사 현장에 영지민들이 따라와서 구경하는 걸 그대로 내버려 뒀을 리가 없었다. 라크시스가 아니었더라면 에드먼드 3세도 즉사했을 것이었다.

    “미래를 알긴 아는데 다 아는 건 아닌 경우이려나.”

    시아는 볼펜을 손가락 위에서 빙그르르 돌렸다.

    어쩌면 백작은 그녀와 라크, 요르문과 루드윅이 중세로 오는 것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곳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백작은 그런 것에 대한 지적은 일절 하지 않았지.

    제국에서 온 첩자 취급을 하면서 감옥에 가둔 것도 어쩌면 계획된 것이 아니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니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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