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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88)화 (88/292)

88화 

오늘의 저녁 식사는 어제보단 덜 의문스럽고, 덜 불편했다. 첫째로 에드먼드와 아스타의 기 싸움이 사라져서 그랬고, 둘째로는 또다시 제국군이 기습을 해올 일이 없어서 그랬다.

시아 일행은 슈테른베슈테크의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았다. 귀한 손님의 특권 중엔 영지의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 네 명은 저녁 식사 후에 각자 고성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시아 일행이 만찬장에서 떠난 후였다.

“먼저 일어날게.”

에드먼드와 함께 덩그러니 남겨진 아스타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에드먼드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지만 그와 대립하며 보낸 세월이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갔다.

어색했다. 에드먼드를 마주하고 날 선 말부터 내뱉지 않은 게 참 오랜만이었다. 물론 식사 도중 옛날 생각이 나 울컥울컥 화가 난 적도 있었다. 밉다고 생각하다가도 피폐해진 그의 얼굴을 보니 차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괜히 아주 오랜 옛날의 풋풋한 감정이 떠오르기도 해서 기분이 몽글몽글 이상하기도 했다.

할 말이 없었다. 이상하게 둘만 남으니 더 그랬다. 차라리 레이디 켈튼과 같이 있을 때 에드먼드와 대화하기가 더 편했다. 그렇다고 이미 떠난 레이디 켈튼을 다시 불러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디, 오늘 고생했어. 몸도 안 좋은데 푹 쉬었다 가. 왕궁에 비할 바는 못되겠지만 여기도 나름…….”

아스타는 횡설수설했다. 알렉스나 길버트가 보았더라면 냉혈의 사자답지 않다며 두고두고 놀렸을 것이다.

아스타가 몸을 돌려 섰을 때였다.

“아스타.”

아스타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에드먼드가 일어나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시종을 불러줄…….”

아스타는 그대로 도망칠 뻔했다. 어색해, 어색하다. 지금 에드먼드와 무슨 말을 하겠어. 그러나 에드먼드의 목소리에는 재회의 감정과는 결이 다른 결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무언가 중요한 걸 고백하려는 듯 보였다.

“그대에게 할 말이 있다.”

아스타는 에드먼드의 무거운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그는 옛 연인이 아니라 왕으로서 대화를 청하고 있었다.

아스타의 이성이 돌아왔다.

“따라와. 내 방에서 얘기하지.”

【 신과 가까운 자 】

“…붉은 심장이 빛났다고?”

아스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들이 있는 곳은 고성의 삼 층 복도 끝방, 괴담의 근원지였던 백작의 방이었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관리된 가구며 책상이 촛대의 불빛을 반질반질 비추었다. 묵직한 벨벳 커튼 밑으로 아스타의 초상화가 바랜 흔적 없이 걸려있었다. 흰부엉이가 창가에 앉아 주인과 손님의 대화를 들었다.

“그래. 붉은 심장이 빛났어. 내가 한 건 아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자벨라가 그런 것도 아닐 거다.”

미궁의 두 열쇠, 붉은 심장과 현자의 별.

사도 다무스는 열쇠가 삿된 자의 손에 들어갈 것을 염려해 제 피를 이은 두 인간에게 열쇠를 가질 자격을 부여했다. 열쇠의 주인이 아니면 미궁을 열 수 없게 한 것이었다.

열쇠는 주인의 의지에 따라 대를 이어 전승되었다. 왕과 사제는 열쇠를 지켜줄 새 주인에게 자격을 넘겨주었고, 열쇠는 새 주인의 의지에 따라 또다시 미궁을 지켰다.

그중 붉은 심장은 신화 속 기이한 유물답게 전승될 때마다 새 주인에게 공명하곤 했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새 주인의 곁에서 빛을 내며 박동하였다.

아스타가 성마르게 얼굴을 문지르며 물었다.

“레이디 켈튼을 만났을 때 붉은 심장이 빛났다고? 이자벨라가 아니라?”

“이자벨라는 붉은 심장의 주인이 되고 싶어 했지. 저주가 내 의지를 얼마나 갉아먹었는진 모르겠지만 이자벨라가 자신이 아닌 남에게 붉은 심장을 넘기라고 날 조종하진 않았을 거야.”

맞는 말이었다.

이자벨라와 검은 마법사는 국교회의 그늘에 숨어 어둠의 힘을 노렸다. 수없이 많은 시간을 반복하면서 깨달은 진실이었다.

에드먼드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번 친위대의 저주도 이상한 구석이 있군. 이자벨라는 아직 내게 붉은 심장을 받지 못했는데, 날 죽이려 했다니.”

열쇠는 주인을 잃으면 그대로 파괴된다. 새 주인을 찾지 못한다면 미궁의 입구는 영영 닫히는 것이었다. 이 또한 다무스의 의도였다. 미궁에서 새어 나오는 어둠으로 대지가 오염될지언정, 삿된 자의 손에 광룡의 힘이 그대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다.

“하마터면 아스타 그대도 죽을 뻔하지 않았나. 오늘 일을 생각하면 이자벨라가 정말로 붉은 심장과 현자의 별을 노린 게 맞나 의심스럽군. 대체 꿍꿍이가 뭔지…….”

저주에서 깨어나고 나서야 지금껏 자신이 해왔던 짓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이제야 이자벨라가 왜 제게 저주를 걸어 조종했는지 알 수 있었는데.

붉은 심장과 현자의 별. 이자벨라는 미궁을 열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니었나?

그러나 친위대 사건을 되짚어 보자니, 이젠 정말로 이자벨라의 속내를 모를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하, 하하…….”

“아스타?”

아스타가 조용히 웃기 시작했다. 심각하던 낯이 해답을 찾은 현자처럼 평온한 빛을 되찾았다. 에드먼드는 영문도 모르고 멀거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역사가 바뀌고 있잖아. 에디. 역사가 변하고 있어. 시간의 굴레가 끊어지고 있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역사가 바뀐다니. 시간의 굴레가 끊어진다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스타.”

“이자벨라의 계획이 실패한 거야. 네가 제례 의식에 따라오는 일 같은 건 없었어. 원래였다면 넌 궁으로 되돌아가 조만간 이자벨라에게 붉은 심장을 바쳤겠지.”

에드먼드는 눈을 껌뻑였다. 아스타의 말이 맞았다. 애초에 백작령에서 제를 올리는 것을 구경할 생각은 없었다. 시아 켈튼이라는 여자가 거슬렸을 뿐이다. 자신이 아스타에게 선물했던 목걸이를 그녀가 보란 듯이 걸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이자벨라가 국교회로 개종한 왕이 백작령에 남아있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성격은 아니었다. 그를 조종해서라도 수도로 귀환하게 했을 터.

“하지만 레이디 켈튼이 나타났잖아. 에디 네 눈을 통해서 붉은 심장이 레이디 켈튼을 새로운 주인으로 인식한 걸 보았을 거야. 그러니 레이디 켈튼을 죽이려고 했던 거지. 붉은 심장을 빼앗길까 봐 초조해진 거야.”

“이자벨라가 아스타 그대와 날 노린 게 아니었다고?”

“그래. 하지만 친위대도 레이디 켈튼을 죽일 수 없었던 거지. 다무스의 예언에 나온 자였으니까. 한낱 인간이 다무스의 예언에 어떻게 저항하겠어.”

“예언이라니. 그게 무슨…….”

“신과 가까운 자. 그래, 고작해야 인간인 친위대가 신과 가까운 자를 해할 수 없으니 저주가 역류한 거야.”

아스타의 말을 한참 동안 듣던 에드먼드가 순간 숨을 들이켰다.

이상했다.

아스타는 그녀에게 주어졌을 법한 정보 그 이상의 것을 알고 있었다. 제국군의 기습부터 왕의 친위대가 도달하는 것까지 예견할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아스타가 현명한 군주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마치 미래를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

거기다 예언이라니.

“아스타. 그대는 내가 모르는 걸 알고 있어. 그렇지?”

조곤조곤 말을 이어가던 아스타가 입을 다물었다. 에드먼드는 아스타에게 비밀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비밀은 분명 자신과도 관련이 있는 것일 터였다.

에드먼드는 의자를 끌어당겨 아스타의 옆에 앉았다. 검을 쥐어 거칠어진 손을 가만히 잡았다.

아스타가 주저하는 것이 보였다. 에드먼드는 아스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내게도 말해주지 않겠나.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을.”

아스타는 잠시 침묵했다.

비극으로 끝나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바뀔 미래라면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에드먼드의 저주는 풀렸다. 역사가 바뀌고 있다면, 그 역사를 맞이하는 자들도 스스로 대비할 줄 알아야 했다.

게다가 어차피 에드먼드에게는 협조를 구해야 했다.

곧 아스타는 결심한 듯 에드먼드에게 켜켜이 쌓이고 쌓였던 세월을 이야기해 주었다. 반복되던 시간이 드디어 바뀌고 있었으니까. 맞닥뜨린 새 시대가 비록 저주와 죽음으로 점철된 고난과 역경이라 할지라도, 새 시대는 새 시대였으니까.

에드먼드는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둠의 힘을 노리던 진짜 배후가 사실 이자벨라가 아니라 검은 마법사였다고? 날 개종시키고 다무스에 국교회를 퍼뜨린 이유가 제국의 세를 다지기 위함이 아닌, 사제로 분한 검은 마법사가 활개 칠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주기 위함이었다고?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아스타.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

넌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반복해 왔던 것인가. 얼마나 많은 죽음을, 괴로움을 홀로 감내해 왔던 것인가.

에드먼드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에드먼드, 에디. 그만 울어. 이럴까 봐 내가 말을 못했던 건데.”

“하지만 아스타. 내가 널 저버린 탓에, 네가 그렇게 죽게 되었는데…….”

“뚝.”

굳센 손길이 에드먼드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에드먼드는 단단한 손아귀에 제 몸이 오롯이 붙잡힌 것을 느꼈다. 물기로 뿌연 시야 속에 아스타가 있었다.

아아.

황갈색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온기를 담은 녹색 눈동자가 오직 에드먼드만을 담고 있었다.

태양을 닮은 사람.

이자벨라의 저주를 깨고 나올 때, 바로 이 얼굴을 떠올렸더란다.

황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제게 검을 내밀던. 함께 흙바닥에서 뒹굴고, 너른 들판을 쏘다니며 들꽃을 꺾어 귀에 꽂아주던.

“에디, 내게 진정으로 미안하다면 함께 미래를 바꿔주지 않겠어?”

이젠 한 영지의 어엿한 주인이 되어, 바다를 호령하는 군주가 된 여인.

냉혈의 사자라지만 제 사람에겐 누구보다 따스한 군주.

에드먼드는 바보처럼 울다 웃으면서 아스타를 끌어안았다. 아스타는 에드먼드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를 한참이나 토닥여 주었다.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하지?”

“난 현자의 별을 빼앗길 때마다 과거로 되돌아왔어. 아마도 신께선 검은 마법사가 미궁을 열게 될 것 같으니 시간을 되돌리셨겠지. 그가 어둠의 힘을 손에 넣어선 안 되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시간이 반복될 이유는 없어.”

“그렇다면 예언 속의 이방인은 검은 마법사의 계획을 저지할 수 있는 존재겠군.”

검은 마법사의 계획을 저지한다, 라.

아스타는 현자의 별을 훔치려던 시아 일행을 그제야 납득할 수 있었다. 그들의 목적도 미궁이었던 것이다. 제국 황제의 첩자인 줄로만 알았을 땐 그들이 현자의 별을 노리던 이유가 그저 황제의 명령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설령 황제의 첩자가 아니었다 해도 삿된 이유로 금지된 힘에 손을 대려고 하는 자들인 줄 알았는데.

그들도 미궁을 열려고 했던 것이다. 아니, 그들은 미궁을 열어야만 하는 자들이었다. 다만 검은 마법사보다 먼저 미궁을 열 자들이었던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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