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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85)화 (85/292)

85화 

속에서 열이 부글부글 끓었다.

벽에 걸린 횃불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웅웅거리는 공기와 영혼들의 아우성이 이자벨라의 호흡을 틀어막았다. 바람이 불었다. 지하에 쌓인 먼지가 소용돌이에 휘말려 서서히 떠올랐다.

카얄이 분노하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자벨라는 또다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곤 다급하게 카얄의 팔에 매달렸다.

“붉은 심장이 빛났습니다!”

“뭐?”

순간 날아오르던 모든 먼지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자벨라는 숨도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사도여, 붉은 심장이 빛났습니다. 에드먼드가 붉은 심장을 넘기려 했어요. 그 여자, 백작의 손님에게요!”

백작의 손님이라. 아무리 눈 밝은 짐승이라지만 까마귀의 몸을 빌려 볼 수 있는 장면에 한계가 있었다. 백작 편에 낯선 마법사가 둘이나 있었던 것은 알았다. 그들이 백작을 도와 친위대를 막아내는 것도 보았다.

그런데 붉은 심장이 빛났다고?

붉은 심장은 새 주인에게 전승될 때만 빛이 난다. 카얄의 낯이 점점 구겨지기 시작했다.

“에드먼드의 저주가 어느 순간 풀려버렸어요. 지금쯤이면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렸을 테지요. 모든 기억을 되찾았을 거예요. 그러니 새로운 주인에게 붉은 심장을 넘기려 했던 것이겠지요…….”

악다문 잇새로 분노가 새어 나왔다. 이자벨라는 그런 카얄을 보며 허겁지겁 말했다.

“…시아 켈튼이라는 여자였어요. 제국에서 왔다더군요. 에드먼드의 눈을 빌려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 여자를 마주했을 때 분명 붉은 심장이 빛났어요. 그래서 죽이려 했습니다, 붉은 심장을 다른 자에게 넘길 수 없었어요…….!”

말을 마친 이자벨라는 헉헉거리며 카얄을 올려다보았다.

카얄은 침묵했다.

그 침묵이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어 이자벨라는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한차례 정적이 지나간 후였다.

“네 호위가 슬슬 걱정하겠군.”

카얄은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몸짓으로 이자벨라를 일으켜 세웠다. 정말이지 그가 카얄만 아니었더라면 황홀하게 느껴질 정도로 정중하고 매너 있는 몸짓이었다.

“가장 가까운 축일이 성 시트리나의 축일이었던가.”

그의 목소리는 천상의 나팔 같았다. 노래하듯 읊조렸으나 인간 같지 않아 도리어 섬뜩했다.

“나를 필두로 하는 전례 행렬을 곧장 꾸려라. 백작령으로 향할 것이니 성대하게 준비하도록 해.”

“하지만 성 시트리나는 원래 기념의 의무가 없는 성인입니…….”

“의무야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가령 성인의 음성을 들었다든가 하는 이유 말이야.”

카얄이 말을 끊어냈다. 이자벨라는 바짝 얼어붙어 입을 다물었다.

카얄은 이자벨라를 부축해 에스코트했다. 배부른 왕비를 보필하는 신실한 사제의 껍데기를 덮어쓰고 있었다.

“백작의 손님을 만나보아야겠다. 내 눈으로 시아 켈튼이라는 여자를 확인해 보지.”

이자벨라는 카얄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에드먼드에게 다시 한번 저주를 걸 셈이겠지. 그와 동시에 시아 켈튼이라는 여자를 직접 죽일 테다. 전례 행렬이라니. 기발하고도 치밀한 계략이었다. 카얄은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왕과 백작의 손님을 만날 방법을 찾은 것이다.

축일을 기념하러 온 사제 행렬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이단으로 몰릴 테니 사제 발자크를 거부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예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들을 신이 내려보낸 성자라고 칭할 것이다. 제국의 국교회에서 백작령을 구원하기 위해 보낸 자라고 소문을 흘려두도록 해.”

“그렇게 되면 붉은 심장을 그대로 빼앗길지도 모릅니다. …새 주인이 될 자를 제거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에드먼드는 이미 모든 것을 보았지 않나. 네가 벌인 짓들을.”

내가 벌인 짓.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복수를 위해서였다. 그 복수는 비단 케르딕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탑에 갇혀 죽음만을 기다릴 때, 저를 멸시하고 신의 뜻에 반하는 부정한 것이라 손가락질한 모든 이들을 향한 복수였다.

카얄의 손을 잡고 이단을 퍼뜨릴 때 가장 먼저 노린 것도 국교회의 교리를 핑계로 자신을 모욕한 이들의 목숨이었다. 황궁의 시녀들도, 기사들도, 길거리의 시민들도 모두 그렇게 저주의 제물로 만들었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에게 이용된 희생자였을 뿐이다.

이자벨라는 덜덜 떨며 계단을 올랐다. 마침내 지하를 벗어나 성녀 상의 손가락을 돌려 제단을 닫자, 예배당은 독실한 신자의 공간으로 되돌아왔다.

오래된 나무 냄새가 풍겼다. 이자벨라는 제게 쏟아지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에 몸을 움츠렸다. 질척한 죄책감이 목을 옥죄어왔다. 지옥에 스스로 발을 담갔으나 그렇다고 해서 제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예배당 문을 열기 직전이었다. 카얄이 속삭였다.

“에드먼드는 실패작이야.”

눈물을 떨구던 이자벨라의 눈이 커졌다.

“왕의 방에 저주의 흔적을 남겨라. 국왕이 부도덕해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붉은 심장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할 것이다.”

카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겼다.

“붉은 심장은 새 주인으로부터 받으면 그만이지 않겠나?”

대답할 새도 없이 예배당의 문이 열렸다. 호위 기사가 황급히 이자벨라를 부축했다. 그녀의 소맷부리에 묻은 피에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왕비 전하.”

“난 괜찮네. 사제님이 도와주시어 살았지 뭔가.”

발자크가 걱정스레 말했다.

“어서 전하를 모시고 궁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막달이 가까워져 요즘 힘이 드신 모양입니다.”

“알겠습니다, 사제님.”

이자벨라는 호위 기사들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두어 걸음 정도 발을 떼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청명한 하늘 아래 고즈넉한 예배당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그 앞엔 사제 발자크 에이클레이가 있었다.

발자크의 시선이 이자벨라의 답을 종용하고 있었다. 이자벨라의 낯이 복잡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도와주어 고맙소. 발자크 사제.”

구름이 걷히며 햇살이 예배당을 환히 비추었다. 발자크는 미소 지었다.

“…신의 종으로서 도리를 다 했을 뿐입니다.”

* * *

“에디, 아니 에드먼드는 괜찮아?”

에디? 에드먼드? 시아는 방문을 벌컥 열어젖힌 아스타가 내뱉은 호칭에 속으로 혀를 찼다. 들어도 들어도 익숙하지가 않다. 사실 처음 들었을 땐 기함할 뻔했다.

시아와 함께 아스타의 말을 들었던 라크시스와 요르문, 루드윅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깐 서로 잡아먹을 듯이 굴더니 뭐, 애칭? 에디가 도대체 웬 말이야.

시아의 일행이 있는 곳은 슈테른베슈테크 성의 손님방이었다. 침대 한가운데엔 정신을 잃은 에드먼드 3세가 깃털처럼 힘없이 누워있었다. 티 테이블을 끌어다 가방을 펼친 자리엔 사용한 주삿바늘이 있었고, 에드먼드의 머리맡엔 치유 마정석이 놓여있었다.

“국왕 전하는 괜찮으세요. 피를 뒤집어써서 다친 것처럼 보인 거지, 실제로 다친 곳은 없다고 벌써 세 번이나 말씀드렸는걸요.”

제례 의식 현장에서 에드먼드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저주에 걸린 기사들은 그들의 왕이 쓰러지는 것도 모르고 홀린 듯이 검을 휘둘렀다. 라크시스의 도움으로 먼저 성으로 이동한 시아는 제례 의식에 가지 않고 남아있던 사용인들의 도움으로 에드먼드를 치료하고 있었다.

절벽 위의 지옥은 라크시스의 활약으로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하긴 고대 마법사가 괜히 고대 마법사겠어. 그건 그가 신의 사도라고 불릴 정도로 강한 마법사란 소리다. 미라로 변해 죽어버린 열댓 명을 제외하곤 모두 생포했다고 했다.

그 광경도 엄청난 장관이었다고 루드윅이 호들갑이었는데. 공간을 왜곡하는 무형의 힘이 기사들을 포박하듯 움켜쥐곤 허공에 띄워 탈탈 털었다고 했다. 맥없이 늘어진 기사들의 손에서 검을 떨구고 난 다음 꽃다발처럼 한 데 모아선, 아스타보고 밧줄로 묶든 수갑을 채우든 알아서 하라며 던져놓았다고 했다.

그걸 못 본 건 아쉽네.

오토마톤의 심장을 찾으러 갔을 땐 전시품들을 망가뜨릴 수 없었기에 라크시스가 마법을 편히 쓰질 못했다고 한다.

그땐 사실 나 혼자 태엽 기계랑 육탄전을 펼쳤지. 마도 시대 사람이 아니라 그런가. 나도 은근 마법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 같아.

어쨌든 성의 사용인이며 구경하던 영지민들도 모두 무사했다. 그 난리에 사망자가 없었던 건 기적에 가까웠다.

라크시스 말로는 애초에 민간인을 노린 저주가 아니라고 했다. 목표가 따로 있었는데, 기사들의 의지가 저주에 저항하면서 저주가 역류해 버려 일어난 사태라고 했다.

‘그 목표가 누구인진 안 말해줬지만.’

이번 사건 이후, 시아 일행을 바라보는 슈테른베슈테크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제국의 첩자에서 다무스가 내려보낸 구원자로.

라크시스는 이번에도 사도 취급을 받았다. 그것도 사도 다무스의 현신으로.

역시 고대 마법사 어디 안 간다니까.

라크시스는 본인이 아홉 사도 중 하나가 아니라 했지만, 사실 그가 진짜 이름을 숨기고 있는 사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은연중에 들었다.

본명이 막 아까 의식 때 들었던 울리아트나 팔리야 같은 게 아닐까?

시아는 옆에 앉은 라크시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깃펜으로 수려하게 그려내 달빛으로 색을 입힌 것 같은 모습이다. 청초하다면 청초하고, 화려하다면 또 화려하다고 할 수 있는 놀라운 얼굴.

그럼에도 라크시스의 외모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를 꼽자면 단연 ‘귀족적’이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마법사.

그의 이름이 울리아트나 팔리야라면.

“…안 어울려.”

“뭐가 안 어울린단 말씀이십니까?”

뜬금없이 들린 부정적인 평가에 라크시스가 불퉁하게 되물었다. 불퉁하게 되묻는 입술마저 혈색이 돌아 붉고 예뻤다.

생각해 보면 유명한 배우나 가수 중에도 영 안 어울리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런데 익숙해지면 그 이름만큼 어울리는 이름도 또 없더라.

시아는 라크시스의 놀라운 중세 귀족 복식 소화력을 떠올리며 대꾸했다.

“…아녜요. 라크에게 안 어울리는 게 어딨겠어요.”

“이젠 인정하시는군요.”

저 입, 저놈의 재수 없는 입만 좀 어떻게 하면 참 좋겠네. 그러면서도 시아는 피식 웃었다.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문 근처에 있던 아스타가 침대 옆의 시아에게 불쑥 끼어들었다.

“하지만 세 번이나 물어보러 왔는데 도통 깨어나질 않고 있잖니.”

아, 깜짝이야. 아스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피로하셔서 잠든 거예요. 평소 건강관리가 안 되어 있어 정신적 충격에 몸이 버티지 못한 것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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