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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81)화 (81/292)
  • 81화 

    시아는 꼼지락꼼지락 움직여 드레스 자락을 모아 쥐곤 의자에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풀물 들겠어요. 여기 앉으세요.”

    “그럼 사양하지 않지.”

    안 그래도 루드윅 때문에 시아와 떨어져 앉게 된 라크시스였다. 알렉스가 끼어들어 시아와 더 멀어지게 된 라크시스가 재깍 날 선 목소리로 되물었다.

    “백작의 보좌라는 사람이 여기서 이렇게 노닥거려도 되는 겁니까?”

    알렉스는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마약상은 아직 지하 감옥에 있어. 도망치게 했으면 어젯밤의 기습에 휘말려 죽어버렸을걸.”

    알렉스는 하늘을 조용히 가리켰다. 까마귀가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친위대 중에 저주에 걸린 자가 있어. 주군께서 레이디 켈튼을 지키라 명하셨다.”

    저주라. 어째서 곧바로 눈치채지 못했을까. 라크시스는 알렉스가 말하고 나서야 왕의 뒤편에서 불길한 마력을 흘려대는 기사를 발견했다. 저렇게 대놓고 저주의 기운을 풍기는데, 방심하고 있었군.

    그나저나 저주라니. 이단의 상징을 옷에 새긴 자가 저주에 걸렸다 하니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시아가 놀라 되물었다.

    “…국왕 전하가 아니라 저를요?”

    “당신 머리 위에서 날고 있는 까마귀를 봐. 아마 그쪽을 목표로 삼으라고 신호라도 보내고 있을걸.”

    하지만 저주에 걸린 기사는 시아가 아닌 에드먼드 3세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자칫 검이라도 뽑았다간 왕이 제일 먼저 베여나갈 것 같았다.

    에드먼드 3세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큼지막한 루비가 그의 가슴팍에서 성녀 상보다 더 존재감을 드러내며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곧 이쪽으로 달려들지도 몰라. 레이디 켈튼은 차라리 잠시 자리를 피하는 게 어떻겠어?”

    “내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알렉스 보좌관. 지하 감옥에서 이미 내 마력을 다 파악하지 않았습니까?”

    라크시스는 저주라는 말을 듣자마자 시아를 일으켜 제 쪽으로 당겨온 후였다. 시아는 얼떨결에 라크시스와 바짝 붙게 되었다.

    “이봐, 제국인 마법사. 저주란 생각보다 무서운 마법이라고. 저주에 걸린 사람의 정신을 좀먹고 상식 밖의 결과를 만들지. 저래 봬도 저들은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사들이야.”

    “그러니 더더욱 내가 필요하겠지요. 알렉스 보좌관. 당신이야말로 저주에 걸린 자를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둘 다 잠시만요.”

    시아는 점점 목소리가 높아져 가는 알렉스와 라크시스의 대화를 끊고 기사를 유심히 살폈다.

    “왜 그럽니까, 시아?”

    “제 말 좀 들어봐요.”

    “…알겠습니다.”

    “만약 저 기사가 절 공격하고 싶었다면 진작 했을 거예요. 기회는 많았어요. 우리가 행렬 맨 마지막에 있었으니 로드 슈테른베슈테크의 눈을 피해 죽일 수도 있었죠.”

    “보는 눈이 많아서 그랬을 겁니다.”

    “보는 눈은 지금이 더 많은걸요. 의식 중간에 제게 검을 들고 달려드는 것보다 더 주목받을 만한 일이 있을까요?”

    시아가 물었다.

    “라크, 저주에 걸린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저주는 마력이 아닌 걸 매개로 쓰는 마법이죠. 대부분은 살아있는 인간이 저주의 대가가 됩니다. 저주에 걸린 대상은 저주를 위한 재료가 되는 셈이죠. 종종 시전자 본인을 저주의 제물로 삼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저주에 걸리면 결국 의지를 잃고 꼭두각시가 되어버리곤 합니다.”

    “만약 의지를 잃지 않는다면요?”

    “그러긴 쉽지 않을 겁니다. 저주에 걸린 시점부터 이미 제 몸의 통제권을 잃어버릴 테니까요.”

    그렇단 말이지. 시아는 턱을 괴고 기사를 살펴보다 라크시스의 소매를 붙잡았다.

    “라크, 이리 와봐요.”

    시아는 라크시스를 바짝 끌어당겨 볼이 옆으로 맞닿을 정도로 그의 눈높이를 제게 맞췄다. 자연스럽게 어깨가 맞닿고 팔짱이 끼워졌다.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은 피부 사이는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지금껏 순간이동을 위해서 서로를 마주 잡았을 때도 언제나 라크시스가 먼저 시아에게 다가오라 요청했었다. 이번 시간 여행이 예정과 어긋나 아르카나 중앙역에서 시아를 애타게 찾을 때에도, 시아를 끌어안은 건 라크시스였다.

    그때야 모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치지만.

    이렇게 시아가 먼저 자신을 당겨온 건 처음이었다.

    라크시스는 시아를 살며시 내려다보았다.

    벨벳의 게이블후드 탓에 그녀의 오뚝한 옆모습이 유독 돋보였다. 곧게 뻗어 살짝 올라간 콧날이며 동그란 이마, 절벽 위로 부는 바람에 발그레해진 뺨.

    집중하느라 살짝 찡그린 눈썹하며, 골몰히 생각에 잠겨 꼭 다문 입술.

    시아에게선 따스한 햇살 냄새가 났다.

    ‘내게선 숲 향기가 났다고 했던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라크시스는 당황했다. 누가 볼세라 얼굴을 손으로 재빨리 가리며 얼떨떨하게 물었다.

    “…시아?”

    하지만 시아는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라크, 저 기사를 자세히 봐봐요. 뭘 참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라크시스는 감정이라곤 전혀 실려있지 않은 시아의 목소리에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들었다. 아찔한 부끄러움을 애써 가라앉히곤, 아무렇지 않은 척 시아에게 대꾸했다.

    “…그렇군요. 검을 뽑으려고 하는 걸 겨우 참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사는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려는 몸을 억지로 붙들고 있었다. 투구에 가려진 눈동자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맞아요. 검을 뽑는다는 건 누군가를 죽이려고 한다는 뜻이죠.”

    “그게 레이디 켈튼 당신이 될 수 있다니까.”

    알렉스가 투덜거렸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피하려고 해요. 사실 그건 생물의 본능이라 할 수 있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막상 목을 매거나 뛰어내리려 할 때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환자들이 의술원에 많았던 것처럼요.”

    시그무트 아 함 시켈! 어느새 여덟 번째 사도의 이름이 불렸다.

    시아가 물음을 던졌다.

    “어쨌든 저주가 사람에게서 의지를 앗아간다고 했는데, 몸의 통제권을 잃었음에도 사람이 저주에 저항할 수 있다면 어떤 경우겠어요?”

    그러나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질문의 답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저주가 노리는 것. 그것은 바로.

    아스타가 제단 앞에 단검을 높이 들었다. 신의 부름을 받은 듯 로브 자락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흰 로브를 입은 무리들이 손바닥을 맞부딪히고 짧은 기합을 내뱉는 소리가 박자를 맞춰 점차 빨라졌다. 섞여 드는 뿔피리 소리가 현장의 분위기를 절정으로 끌어 올렸다. 제례 의식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조차 어느새 현실감을 잊고 뙤약볕 밑에서 땀을 흘렸다. 잘그락대는 종소리가 의식을 아득하게 만들 때쯤.

    아스타가 마지막 이름을 외쳤다.

    “시그무트 아 함 갈리프(위대하신 갈리프여)!”

    아스타가 제단을 향해 단검을 내리꽂는 순간.

    저주에 걸린 기사가 괴성을 지르며 검을 빼 들었다.

    “라크!”

    “알고 있어요!”

    라크시스가 기사를 향해 손을 뻗어 허공을 쥐었다.

    동시에 기사의 검이 스스로의 목을 꿰뚫기 직전, 기다란 핏자국을 남긴 채 그대로 멈췄다.

    * * *

    한껏 고양되어 있던 제례 의식의 현장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물론 갈리프를 외치며 단검을 들고 있던 아스타까지 그대로 굳어버렸다.

    시아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된 거죠?”

    라크시스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대답했다.

    “저주에 저항하게 한 거라면, 된 것 같습니다.”

    시아의 예상대로 기사가 걸린 저주는 스스로의 목숨을 끊도록 하는 것이었다. 기사는 저주보다 강한 라크시스의 마력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된 것이다.

    “이제 검을 떨어뜨려 놓고, 가까이 가서 저주를 살펴봐야…….”

    그때였다.

    “……!”

    기사의 목이 기괴하게 꺾였다.

    “그우어어어…….”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던 기사가 몇 번 더 목을 꺾더니 흰 거품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턱을 타고 갑옷 위로 떨어지는 흰 거품은 누가 봐도 비정상이었다. 고요함 속에 뭉개진 발음이 거품을 비집고 점점 크게 흘러나왔다.

    [어둠, 어둠, 어둠…….]

    제례 의식 현장에 모인 그 누구도 들이킨 숨을 내쉬지 못했다. 공포에 질린 입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악마다.

    악마가 나타난 것이다.

    아스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저주가 역류했어……?”

    모든 마법은 대가를 요구한다. 그 대가가 무엇이든 마법은 자신이 받은 만큼의 힘을 기적으로 되돌려 준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마법사 개개인이 가지고 태어난 마력이 마법의 대가가 되곤 했다.

    저주는 마력 대신 인간의 영혼과 같은 제물을 대가로 삼는 마법이었다.

    마법이 역류하는 경우는 딱 한 가지였다. 적법한 대가를 치른 마법을 억지로 막아버릴 때.

    아스타는 사제의 눈으로 기사의 영혼을 보았다. 기사는 스스로의 의지로 저주에 저항하고 있었다. 레이디 켈튼은 기사가 자신의 목숨을 끊도록 하는 것이 저주의 목표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지만.

    아스타는 기사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 끝엔 레이디 켈튼이 있었다.

    기사는 이제 붉은 거품을 흘리고 있었다.

    [천칭이 기울었다.]

    모두의 이목이 기사에게로 향해있었다. 에드먼드 역시 바짝 얼어붙어 친위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보게. 도미니크 경. 자네 지금 무슨…….”

    에드먼드가 가까스로 입을 열어 기사를 향해 말을 꺼냈을 때였다.

    [시그무트 아 함 카얄(위대하신 어둠이여)!]

    단말마의 외침을 끝으로.

    목이 잘린 단면에서 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에드먼드는 쏟아지는 뜨끈한 피를 그대로 뒤집어썼다. 왕이 붉게 물들었다.

    “꺄아아아아아악!”

    한 박자 늦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구경꾼 하나가 이 장면을 보고 그대로 혼절했다. 제례 의식의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악, 악마다! 악마가 나타났어!”

    “오, 세상에. 전능하신 다무스여!”

    “하늘에 계신 갈리프여, 사도 다무스여. 제발 구해주소서. 구해주소서. 구해주소서…….”

    몸통에서 떨어진 기사의 목은 왕의 품으로 굴러떨어졌다.

    “……!”

    투구 안의 머리는 바짝 말라 미라가 되어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살아 숨 쉬며 저와 말을 나누던 기사였다. 모골이 송연했다.

    에드먼드는 제가 두 눈으로 목격한 장면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왕으로서의 위엄을 차리기엔 밀려든 공포가 지나치게 컸다. 사지가 덜덜 떨리다가 이내 바지춤이 뜨끈하게 젖어 들었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

    쇄애액―!

    비명과 절규가 난무하는 현장 속에서 화살이 에드먼드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바람을 가르고 화살이 날아오던 것을 인지하였으나, 너무 늦어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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