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우리들의 무한한 시간이 드디어 끝나려는가 보구나.”
“…주군.”
까마귀가 시아 켈튼의 머리 위를 배회했다. 검은 마법사의 저주가 느껴지는 짐승이었다. 검은 마법사는 분명 어딘가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도 네 명의 이방인에게서 아스타와 비슷한 기운을 느낀 모양이었다.
멈춰버린 시간을 움직여줄 자.
저주에 걸린 친위대 기사는 검집에 닿은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걸 보니 저주에 저항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가서 레이디 켈튼을 지켜.”
“주군!”
“날 못 믿나, 렉시?”
“절대 아닙니다! 그렇지만…….”
알렉스는 아스타의 최후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창에 꿰뚫린 채 죽은 것을 제 마지막으로 알고 있었지만.
‘마녀를 태워라! 간악한 마녀를 태워 죽이자!’
숨을 거둔 영주의 시신에 사람들이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였다. 그것도 알렉스의 눈앞에서. 고기 타는 매캐한 냄새가 알렉스의 정신을 좀먹었다. 알렉스는 태양처럼 타오르던 백작을 껴안고 함께 죽었다.
알렉스는 신성한 의식에 나타난 저주가 두려웠다. 그 저주가 아스타를 향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순간 트라우마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스타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알렉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냉혈의 사자.
태양처럼 불타는 곧고 강직한 저 눈빛을 보라. 알렉스는 끔찍한 불꽃의 기억조차 덮어버릴 만큼 강렬하고도 경외로운 영주의 눈동자를 목도했다.
“알렉스 폰데. 내가 너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인가?”
결국 알렉스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명 받들겠습니다. 주군.”
* * *
백작과 같이 있기 불편할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의식이 시작되자 백작과 붙어있을 일이 없었다. 제단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의식을 구경하자니 꽤 흥미로운 기분이었다.
현자의 별을 가져와서 어디다 쓰려나 했는데, 목에 걸었구나. 어떻게 매듭을 저렇게 잘 묶었을까? 밝은 곳에서 본 광룡의 봉인은 정말로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지난번엔 심장 모양이더니. 형태가 모두 똑같은 건 아닌가 보다.
오히려 심장을 닮은 건 에드먼드가 목에 걸고 있는 큼직한 루비였다.
시그무트 아 함 다무스! 잘그랑거리는 작은 종이 사람들의 목소리와 섞여 신을 불렀다. 제단에 묶인 염소가 애처롭게 울었다.
시아가 물었다.
“다무스가 옛 씨즐턴에서 섬기는 신이었나 보네요?”
“다무스요? 다무스는 갈리프 신화에 등장하는 두 번째 사도예요. 우리가 아홉 사도니 고대 마법사니 하는 자들 중 하나이죠.”
루드윅은 또 제 전공이라고 재깍 나서서 대답해 줬다.
“안 그래도 지금 사도들의 이름을 순서대로 부르면서 제례 의식을 진행 중이네요. 신룡이자 사도들의 주인인 갈리프는 제일 마지막에 등장할 겁니다.”
중세 국교회에서 성인의 축일을 기념하던 광경과는 사뭇 달랐다. 아마포가 깔린 제단, 은촛대. 빛바랜 스테인드글라스와 오래된 예배당. 이 시기의 제국에선 검소한 차림으로 모여 사제를 따라 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 종교의식의 흔한 장면이었다.
같은 시기의 가까운 두 나라의 모습은 이토록 달랐다. 시아는 이국적이면서도 동시에 너무나도 제국적인 원래 시대의 씨즐턴을 떠올렸다.
“그런데 다무스가 두 번째 사도라고 하지 않았어요? 첫 번째 사도가 없는데…….”
“원전 속 갈리프 신화는 제국에 구전되어 온 것과 많이 달라요. 발굴되는 고대 마도 시대 유물이나 벽화도 알려진 신화와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것들이 많고요.”
시그무스 아 함 울리아트! 세 번째 사도의 이름이 절벽 위에서 울려 퍼졌다.
“일례로 일단 신룡 갈리프가 자신이 구해준 노예 아이로 인해 광룡으로 타락했다 알려진 부분 말이에요.”
고대 마도 시대를 부흥케 한 신룡 갈리프는 인간의 몸으로 현신하여 대지를 돌아다니던 중, 노역에 끌려갔다가 매질을 당하여 죽음을 기다리는 아이를 발견한다.
아이는 갈리프의 정성 어린 보살핌으로 살아나 장성하였지만, 악한 짓을 저질러 갈리프를 실망시키고 갈리프를 타락시켜 광룡이 되게 한다. 광룡이 된 갈리프는 대륙을 불살라 고대 마도 시대를 멸망케 했다.
여기까지가 제국에 내려오던 갈리프 신화의 대략적인 내용이었다.
“고대의 신화서 원본을 해석해 보면 갈리프의 첫 번째 사도인 미옌이 갈리프를 배신하여 스스로 광룡이 되었다고 적혀있죠.”
사도 미옌? 또 처음 듣는 이름이네. 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르네요.”
“그래서 고대 마도 시대의 벽화나 석상 같은 유물을 보면 보면 아홉 사도가 아닌 여덟 사도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아요. 저희도 어느 시기에 신화가 와전됐는지 계속 연구하고 있고요.”
유물엔 크게 관심이 없어서 몰랐다. 먹고 살기 바쁜데 박물관이나 유적지까지 갈 일이 얼마나 되겠느냐마는. 시아는 괜히 부끄러워져서 중얼거렸다.
“…어릴 적 역사 시간엔 아홉 사도라 배웠는데.”
“고대 마도 시대도 광룡 때문에 멸망을 겪었죠. 다무스같이 제국 본토에서 떨어져 있는 곳 말곤 당시 신전이며 유물들이 대부분 파괴되었거든요. 깊이 묻혀서 보존됐던 몇 안 되는 벽화나 유물, 신화서들을 최근에서야 발굴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신화가 교과서에 실렸던 거구나.
하긴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학문이 그렇지. 과거엔 진실로 여겨졌던 정보들이 숱한 시행착오와 새로운 발견으로 인해 현재에 와선 비과학적이고 잘못된 정보로 판명 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중세의 의사들은 열을 내린다고 피를 뽑고 총상을 치료하기 위해 끓는 기름을 부었으니까.
“…갈 길이 먼 학문이네요.”
“그런 셈이죠. 사료가 많지 않으니까요.”
시그무트 아 함 팔리야! 벌써 네 번째 사도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손바닥을 둔탁하게 두 번 맞부딪친 사람들이 짧은 기합을 뱉곤 제단을 향해 부복했다.
시아가 물었다.
“로드 젤마니, 뭐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요?”
“물론이죠.”
“그럼 카얄은 갈리프의 몇 번째 사도인가요?”
일기장에 적힌 내용 때문이었다.
[라크가 죽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고대 마법사 카얄이 광룡의 봉인을 모두 파괴해 버렸고, 부활한 광룡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그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봉인을 파괴하고 광룡을 부활시킨 것이 고대 마법사라고 했으니, 카얄은 아마 신화 속에선 사도라고 지칭되는 존재일 터였다.
순간 루드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놀라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설마 신화학자라면서 여덟 사도의 이름도 못 외운 건 아니겠고.
“제가 너무 당연한 걸 물어서 그런가요……?”
시아의 지식이 짧아 놀란 거라면 차라리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루드윅이 좀 이상했다. 겁에 질린 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 그녀가 귀신이라도 되는 양 꺼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갑자기 이런 반응은 좀 당황스러운데. 아니, 사람이 자기 전공 아닌 건 모를 수도 있지.
시아가 서운해져 입술을 삐죽 내밀려는 찰나였다. 루드윅이 고장 난 것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카얄이란 사도는 없어요. 그건 태고의 어둠(Kayal), 감히 불러서는 안 될 악신의 이름이에요.”
뭐?
* * *
한편 라크시스는 루드윅의 설명을 들으며 무언가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이단이라.’
바로 에드먼드 3세의 친위대 갑옷에 그려진 문장이었다. 국교회의 성녀와 기울어진 태양과 달을 함께 그려 넣은 문장에서 라크시스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바로 기분 나쁘게 수놓아져 있던 태양과 달이었다.
저걸 본 적이 있었다. 어디서 봤느냐고?
‘재키 레이븐의 이단 성서.’
헨리 던로가 처녀의 순결에 강박적이었던 이유. 메이덜린 랭험 지구 노스 스트릿 28번지에서 발견된 저주가 담긴 성서, 바로 그 표지에 그려져 있던 이단 황혼 국교회의 상징이었다.
“라크, 뭘 그렇게 봐?”
요르문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라크시스에게 바짝 붙어 물었다.
“친위대의 갑옷에 이단의 상징이 있는 것 같군.”
“이단?”
“재키 레이븐이 가지고 있던 성서 표지에 저런 상징이 있었어. 기울어진 태양과 달.”
라크시스와 시아만큼 재키 레이븐 수사에 관여하지 못했던 요르문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상징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디서 본 것 같은 문양인데.
요르문은 눈썰미가 좋은 편이었다. 자신이 저 문양을 어디에서 봤을까 생각하던 요르문은 감옥에서 만났던 가짜 사제의 하얀 성직 칼라 안쪽을 떠올렸다.
“이런.”
“왜 그러나?”
“라크. 우리가 감옥에서 만났던 샤샤리아 밀무역상 말이야. 사제 연기를 기막히게 하던 그 갱단 녀석의 목에 저 문양의 문신이 있었어.”
“…생각보다 이단의 세력이 컸군그래.”
이 시기에도 황혼 국교회가 존재했다니. 문득 재키 레이븐의 살인 사건을 다시 한번 조사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사는 이단의 교리에 빠져 사람을 죽인 살인마의 단독 범행에 초점을 두어 진작에 종결되긴 했다. 메이덜린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 사고가 일어났고, 경찰은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으니까.
하지만 라크시스가 다시금 주목한 것은 황혼 국교회라는 이단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이 가진 특별 수사권을 행사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라크시스가 궁금해하는 것은 황혼 국교회의 교주가 무엇을 목표로 신도들을 모아 저주를 이용한 범죄를 저지르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 범죄들이 시아의 시간 여행과 맞물려 일어난 것 또한 라크시스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3518년으로 돌아가면 곧바로 조사해 봐야겠군.’
라크시스는 요르문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로드 슈테른베슈테크는 그 가짜 사제를 풀어주었나?”
요르문 자네가 붙여놨던 추적기 말이야. 지금쯤 어디에서 신호가 잡히지?
그러나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아직.”
우중충한 빛깔의 로브를 뒤집어쓰다시피 한 남자가 적갈색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백작의 보좌관 알렉스 폰데였다.
“…미스터 폰데.”
“그냥 알렉스 보좌관이라고 불러라. 미스터니 미스니 영 어색하니까.”
그러더니 알렉스는 시아의 바로 앞 바닥에 떡하니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