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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79)화 (79/292)
  • 79화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반복했어도 왕이 여기까지 따라오는 경우는 없었다고요. 알렉스가 제단에 포도와 밀을 올려놓다가 백작과 가장 가까운 곳에 떡하니 앉아있는 에드먼드를 보고 구시렁거렸다.

    “심지어 개종까지 했잖아요. 국교회의 성녀 상을 목에 걸고 다무스께 제를 올리러 오다니.”

    길버트는 빽빽 우는 염소를 붙잡아 제단 위에 올리며 대꾸했다.

    “이자벨라 왕비가 알면 기함을 토하겠군.”

    “어디 기함뿐이겠어요? 지난번처럼 사병을 풀어 이단을 잡겠노라 난리를 치겠죠. 왕을 현혹한 악마가 마을에 숨어있다면서.”

    에드먼드 3세의 뒤엔 그가 끌고 온 친위대가 모두 기립해 있었다. 성의 사용인 수도 상당했으나, 에드먼드가 데려온 친위대의 머릿수엔 비길 바가 못 됐다.

    따가운 햇빛에 수백의 사슬 갑옷이 번쩍거렸다. 주객이 전도된 광경에 길버트는 혀를 끌끌 차며 곁눈질로 친위대를 힐끔거렸다.

    “친위대는 왕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눈치인데.”

    “친위대요? 저게 왕의 친위대겠어요? 왕비의 수족이지. 왕비 전하께서 직접 고르신 자로 친히 채워두셨잖아요.”

    실제로 친위대의 갑옷 가슴팍엔 국교회의 성녀와 기울어진 해와 달을 수놓은 문장이 있었다. 제국 황녀였던 이자벨라에게 첫눈에 반해 청혼하였던 에드먼드가 국교회 신자인 이자벨라를 위해 친히 개종까지 하면서 바꾼 왕실 문장이었다.

    “렉시, 길버트.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왕은 왕이다. 입을 조심하려무나.”

    “…주군.”

    백작이 황금 잔을 제단에 바치고 알렉스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아스타가 속삭였다.

    “나도 이상한 걸 알고 있어. 축객령의 의미로 제를 올리겠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수없이 회귀하면서 에드먼드가 여기까지 따라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잖니.”

    알렉스가 무릎을 꿇으며 사제의 역할인 아스타에게 제례용 단검을 넘겨주었다. 론다니의 뿔 나팔 소리가 세 번 길게 이어졌다.

    “친위대는 사실 왕비로부터 현자의 별을 가져오라는 명을 받은 자들이었지. 에드먼드도 한통속이었고. 제국군의 기습에 정신이 없어진 틈을 타 구원자처럼 나타난 에드먼드를 믿게 만들려는 속셈이었잖아?”

    은은한 뿔 나팔 소리에 몸을 맡기고, 아스타가 경건하게 단검을 받아 들었다.

    알렉스는 담담하게 읊조리는 아스타의 얼굴이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당했지. 한밤중에 벌어진 기습에 아스타는 제대로 영지를 공격당했다. 성벽이 불타고 사랑하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시체가 되었다. 그 전날 거나하게 연회를 열어 성 사람들 대부분이 무방비했기에 피해는 곱절로 커졌다.

    아군과 적군이 뒤엉켜 함부로 마법을 날리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영지는 함락되기 직전까지 위기에 몰렸다.

    그런데 어떻게 이 기습을 알았는지 에드먼드의 친위대가 극적인 순간에 성안으로 들이닥쳤다. 제국군 잔당을 베어버리고 오래 전, 그녀가 그리워하던 모습으로 나타나 아스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아스타, 괜찮은가?’

    그가 이름을 불러준 건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쉬, 울지 말고. 이제 보니 냉혈의 사자가 아니라 울보 사자로구나.’

    ‘…너 정말로 에드먼드야? 내가 아는 에드먼드 맞아?’

    ‘그럼 내가 에드먼드가 아니면 누구겠느냐. 아스타, 그동안 힘들었겠구나. 이리 와 잠시 기대어라.’

    에드먼드의 어깨는 기억하던 그대로 넓고 따스했다. 그래서 하마터면 믿을 뻔했었다. 슈테른베슈테크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전령새가 왕성으로 날아왔고, 이를 돕기 위해 왕이 친히 친위대까지 이끌고 달려왔다는 말을.

    수도가 아무리 협곡의 다리 하나만을 사이에 둔 지척이라곤 하지만 왕성에서 영지의 본성까진 말을 바꿔 타고 달려도 꼬박 이틀은 걸리는 거리인데.

    ‘…렉시. 정말로 전령새를 날린 사람이 아무도 없어?’

    ‘…예, 주군. 영지 측 전령새는 모두 새장 안에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게 된 진실은 이러했다. 제국군이 들어온 항구는 항구지기가 국왕의 직인이 찍힌 칙서를 받고 열어둔 것이었고, 외성의 문은 에드먼드 3세의 얼굴을 확인한 경비병이 열어둔 것이었다.

    ‘아스타. 제국군의 기습은 현자의 별을 노린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내게 맡겨두는 것은 어떠하냐? 내가 비록 개종을 하였어도 우리들의 뿌리가 다무스에게서 비롯되었음은 잊지 않았다. 현자의 별을 안전하게 보관하겠다고 약속하지.’

    ‘…거짓말 마. 에드먼드. 현자의 별을 노린 건 너잖아.’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스타. 그대의 영지를 구한 건 다름 아닌 이 몸이야.’

    아스타는 에드먼드를 밀어냈다.

    ‘타국의 군대까지 희생시키면서 날 속이려 든 계획은 정말이지 놀라웠어. 적의 적은 아군이라 믿게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너도 제국도 현자의 별을 노리는 이상 모두 내겐 적이야.’

    그 말에 에드먼드가 순간 표정을 지워냈다. 지금까지 아스타에게 애타게 매달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실망이로군. 로드 슈테른베슈테크.’

    에드먼드의 낯은 밀랍으로 빚어낸 듯 무표정하고 건조했다. 소름이 돋았다.

    뭐, 로드? 에드먼드의 말투는 이자벨라와 꼭 닮아있었다. 마치 이자벨라 왕비가 에드먼드의 입을 빌려 제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스타는 그때 깨달았다. 그가 이자벨라에게 완전히 넘어갔구나. 그가 내게 했던 걱정 어린 말과 행동이 모두 거짓이었구나.

    그리고 동시에 아스타는 이자벨라가 에드먼드를 꾀어내어 저지르려고 하는 짓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최초에 하나의 점이 있고 점으로부터 어둠(Kayal)과 빛(Galipe)이 태어났으니. 빛이 숨결을 토하여 대지에 생명이 내려앉았노라.]

    [빛의 후예여, 다무스의 자손이여. 천칭을 들어 어둠으로부터 영토를 지키라.]

    [맥동하는 붉음과 길잡이 별이 이곳을 수호하나니. 어둠이 도래하였을 때 비로소 영광의 빛을 되찾으리라.]

    고대에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었던 광룡이 나타나게 된 것은 갈리프의 아홉 사도 중 하나인 미옌이 갈리프를 배신하고 어둠의 힘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사도 미옌은 자신의 창조주인 갈리프를 어둠에 바친 대가로 막대한 힘을 손에 넣었고, 용이 사라진 대지 위에 스스로 광룡이 되어 강림했다.

    남겨진 여덟 사도는 그들의 주인 갈리프도, 사랑하는 형제도 잃었다. 어둠을 섬기며 광룡이 된 미옌에게 맞서 여덟 사도는 고통스럽고도 힘겨운 전쟁을 벌였다.

    그렇게 이레째 되던 날, 여덟의 사도는 마침내 광룡을 쓰러트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고작 사도에 불과했던 여덟 사도는 광룡이 가진 거대한 어둠을 파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여덟 사도는 광룡의 심장을 여덟 갈래로 갈라 자신들의 몸속에 직접 봉인했다고 한다.

    다무스는 바로 그 여덟 사도 중 하나였다. 그는 대륙 옆의 자그마한 섬에 신성한 영토를 선포하고 땅 밑에 미궁을 지어 스스로를 가둔 후, 제 피를 이어받은 두 명의 인간에게 미궁을 지키는 열쇠를 주었다.

    그것이 바로 왕가의 보물인 붉은 심장과 슈테른베슈테크가 지닌 현자의 별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신성한 피를 지닌 두 인간은 다무스를 기리는 신전을 미궁 위에 세웠다. 한 명은 왕가의 시초가 되었고, 다른 하나는 사제의 명맥을 이으며 미궁에 묻힌 어둠으로부터 다무스를 지키는 두 개의 기둥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전설을 대입해 보았을 때, 이자벨라가 하려는 짓은 명확했다.

    신전 밑 아주 깊숙한 곳, 미궁 속에 잠들어 있는 어둠의 힘을 깨우는 것. 그렇지 않고서야 제게서 현자의 별을 노릴 이유가 없었다.

    이자벨라에게 넘어가 버린 에드먼드가 이미 왕가의 보물인 붉은 심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황녀는 왜 어둠의 힘을 노렸던 것일까.

    아스타는 검은 마법사에게 몇 번이고 최후를 맞이하면서 그 이유를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에드먼드와 결혼하면서 다무스에 국교회를 들여온 이자벨라. 국교회의 사제복을 입고 있던 검은 마법사. 그리고 검은 마법사는 배신자 사도 미옌의 고대 마법, 바로 저주를 사용하는 자였다.

    그래, 이자벨라와 검은 마법사는 한통속이었구나.

    목적이 무엇인진 몰라도 검은 마법사는 어둠의 힘을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자벨라는 검은 마법사가 어둠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도록 국교회를 이용해 검은 마법사가 활개 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다무스를 통째로 집어삼킨 것이었다.

    ‘깨달았다고 해도 반복되는 시간을 바꾸진 못했지만 말이야.’

    그때였다.

    “렉시, 저길 봐라. 친위대 중에 저주에 걸린 자가 있다.”

    아스타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시선의 끝에는 아릴 듯이 파란 하늘을 비행하는 까마귀와 투구 틈새로 불길한 안광을 뿜어대는 친위대 기사가 있었다. 왕과 가장 가까운 기사였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래,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지. 여기까지 따라온 에드먼드도, 저주에 걸린 친위대도.”

    분명 성안으로 에드먼드의 기사들을 들일 땐 저주의 낌새가 없었다. 다행히 의식은 아직까진 아무런 이상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시그무트 아 함 다무스(위대하신 다무스여)!”

    여덟 사도의 이름을 복창하며 사용인들이 자그마한 종을 박자에 맞춰 쇠막대로 쳤다.

    “시그무트 아 함 울리아트(위대하신 울리아트여)!”

    까마귀가 길게 울었다. 음률 없이 이어지는 제례용 음악이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시그무트 아 함 팔리야(위대하신 팔리야여)!”

    거대한 바람이 제단 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공기의 흐름이 불길하게 변했다. 다가올 재앙을 예측하듯, 사제의 피를 이은 아스타의 눈에 들판을 가득 메운 붉은 기운이 비쳤다.

    그리고 이 모든 불길함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곳은 네 명의 이방인, 그중에서도 시아 켈튼이 서있는 자리였다.

    “저들이 바로 예언에서 말한 이방인이 맞는가 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레이디 켈튼이 밟은 들풀만이 저렇게나 파랄 수 없었다.

    신성한 기운이었다. 다무스에게 제를 올릴 때, 신과 자신이 연결되던 순간 뇌리를 관통하던 청명한 기운. 그것이 멀찍이 떨어진 시아 켈튼에게서도 느껴졌다.

    “조금 더 지켜보고, 의심해 보고, 고민한다고 하셨잖습니까. 주군.”

    “렉시, 네 눈엔 보이지 않니? 레이디 켈튼이 선 자리만이 푸르른 것을.”

    “…전 안 보이는데요.”

    알렉스는 불퉁하게 대답하다가 아스타의 눈동자에 기이한 힘이 감도는 것을 발견했다. 사제의 시선으로만 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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