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78)화 (78/292)

78화 

에드먼드는 아스타가 의식을 언급하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목엔 왕가의 보물인 큼지막한 루비와 함께 국교회의 성녀 상이 걸려있었다.

시아는 또다시 에드먼드의 눈치를 봤다. 이자벨라 왕비 때문에 개종까지 했다고 하는데. 처음엔 에드먼드가 국교회 기준으로 이단인 다무스의 제례 의식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져 인상을 썼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왕은 두통 환자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저 찡그림은 도대체 뭐지?

아스타가 재차 물었다.

“제국인은 보기 힘든 의식일 텐데. 궁금하지 않아?”

시아는 에드먼드를 관찰하던 시선을 황급히 거두었다. 제례 의식이라. 궁금하긴 해도 이 불편함을 견디면서까진 보고 싶지 않았다. 시아가 거절하려는 찰나였다.

“물론 궁금합니다. 이렇게 기회를 주신다니 영광으로 알고 기꺼이 참석하겠습니다. 로드 슈테른베슈테크.”

루드윅의 승낙이 한발 빨랐다.

시아가 대번에 놀라 루드윅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외쳤다.

“로드 젤마니!”

“하하, 살아있는 역사를 두 눈으로 볼 기회가 흔하진 않잖아요?”

아니, 불편하지도 않아요? 우린 현자의 별을 훔치다 걸린 도둑이라고요! 백작이 벼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니까요? 거기다가 이 분위기 어쩔 거예요?

시아가 벙긋거리며 나무랐으나 루드윅은 호기심이 앞섰는지 겁도 없이 백작에게 맞장구를 쳤다.

하여튼 못 말리는 사람이다. 시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좋은 선택이라며 아스타가 호탕하게 루드윅의 어깨를 두드렸다. 곰 같은 덩치의 루드윅이었으나 그는 아스타의 두드림에 몸을 휘청거렸다.

* * *

제단은 외성 밖, 영지의 끝자락인 절벽 위에 있었다.

초록이다 못해 새파란 들풀이 바닷바람에 고개를 이리저리 뉘었다.

절벽을 경계로 짙푸른 바다가 고독하게 넘실대는 것이 보였다. 천진한 아이들이 개와 함께 언덕 밑에서 점점이 뛰놀았다. 초봄의 찬바람에 여린 볼이 발갛게 부르텄다. 개는 만찬에서 접시로 쓰던 빵이 온전히 주어지자 신나게 물고 뛰는 중이었다.

고대 사제처럼 흰 로브를 걸친 아스타가 기다란 행렬 가장 앞에서 걸었다. 마찬가지로 흰 로브를 입은 알렉스가 제례용 단검을 든 채 그녀의 뒤를 따랐고, 론다니는 짐승의 뿔처럼 생긴 나팔을 길게 불며 걸었다. 어젯밤 승전 연회에서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이던 기사 대장 길버트는 깃이 목 끝까지 올라오는 로브를 입고 투레질하는 말을 달래며 고삐를 끌었다.

아스타는 한 손엔 현자의 별, 다른 손엔 염소의 목줄을 쥐고 있었다. 작고 하얀 염소는 오늘 의식의 제물이 될 예정이었다. 사람들이 영지의 포도와 밀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아스타를 따라 천천히 행렬을 이었다.

모두 성의 사용인들이었다. 오가는 길에 마주친 영지민들이 모자를 벗어 예를 표했다. 상점 일이며 쟁기질을 멈추고 제를 구경하러 행렬 뒤로 삼삼오오 따라붙었다.

수도자의 순례길을 연상케 하는 하얀 실루엣이 바람에 나부꼈다. 마치 중세의 역사를 담은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이었다.

시아와 라크시스, 요르문과 루드윅은 백작의 행렬 맨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었다.

시아는 점심 만찬 때 입고 있었던 짙은 검녹색의 벨벳 드레스 차림이었다. 코르셋과 파팅게일로 인해 거동에 제한이 생긴 시아의 속사정과는 달리 우아하게 퍼져나간 드레스 자락이며 가슴선부터 목 끝까지 올라온 얇고 주름진 슈미즈, 게이블후드의 가장자리에 달린 케르딕 양식의 진주 장식은 시아의 하얀 얼굴을 돋보이게 했다.

마도 시대의 레이디 옷차림과는 또 다른 고아한 느낌은 마치 시아를 고성의 안주인처럼 보이게 했다. 영지의 진짜 주인은 아스타였으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시아를 백작 부인이라 착각할 정도였다.

왜 백작이 아닌 백작 부인이라 착각할 정도였느냐 하면.

시아는 제 옆에서 나란히 걷는 라크시스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그나저나 라크는 신사복이 가장 어울릴 줄 알았는데.”

“알았는데?”

“그런 역사책 속 옷도 잘 어울리네요.”

라크시스는 자잘한 자수가 둘러진 언더튜닉 위로 고전적인 무늬의 더블릿을 입고 있었다. 이 또한 아스타가 입으라고 내어준 옷이었다.

풍성하게 부풀려 슬래시 장식마다 금사를 두른 검은 벨벳 가운을 무심하게 걸쳤다. 가운의 테두리에 장식된 흰담비 털이 바람에 부르르 떨었다. 늘 쓰던 실크햇 대신 깃털과 보석으로 장식된 모자를 쓰고 있으니 라크시스는 정말이지 슈테른베슈테크의 백작처럼 보였다.

타이즈까지 어울릴 줄은 몰랐는데. 이름이 호즈였나 뭐였나. 화려한 상의 밑으로 드러난 종아리며 허벅지의 실루엣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탄탄하고 조형적이었다.

조각상 같네. 정말로 사격이나 승마 같은 운동을 했던 걸까. 라크시스를 보니 중세의 귀족들이 왜 저런 옷을 자랑스레 입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내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딱 관광지에서 역사 속 의복 체험하기 행사에 참가한 것 같더니만. 원체 귀족적이고 수려한 얼굴의 라크시스는 살아온 세월과 지위가 있는 탓인지 정말로 중세 씨즐턴의 귀족처럼 보였다.

참 여러모로 완벽한 사람이다. 하긴 저러니까 재수 없고 저 잘난 소리를 해도 납득이 가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안 어울리는 건 딱히 없었던 것 같습니다만.”

지금처럼 말이다.

“참 라크다운 대답이네요.”

시아는 피식 웃으면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아아, 그래. 저답다는 말이 뭔지 진짜로 안 알려줄 겁니까?”

“왜요? 내기에서 질까 봐?”

“제가 질 리가.”

“대단한 자신감이네요. 그럼 난 무슨 소원 빌지나 생각해 놔야겠네.”

매끈하던 그의 미간에 서서히 주름이 패기 시작했다. 그간 라크시스를 만나면서 알게 된 건데 저건 승부욕이 발동되었다는 표시였다.

“어어, 머리 굴리지 말아요.”

“머리를 안 굴리면 생각을 어떻게 합니까?”

“말이나 못 하면. 그래도 양심적인 소원 빌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라크시스가 돌연 되물었다.

“그러는 시아 당신은 제가 무슨 소원을 들어달라 할 줄 알고 그런 위험한 내기를 합니까?”

위험한 내기?

“라크라면 분명 약 오르고 재수 없는…….”

라크시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재수 없는? 약 오르고?”

“어머, 미안해요. 사회생활 할 땐 이런 실수 안 했는데…….”

시아는 입을 가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손으로 가린 입은 웃음을 참느라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래서 능글맞게 놀려대던 거였구나. 라크시스가 당황한 표정을 보니 은근히 재미있었다.

놀리니까 재밌다. 지금껏 당한 게 꽤 여러 번이라 시아는 이때를 노려 아주 약 오르게 라크시스를 놀려댔다.

바로 뒤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요르문은 배알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이상한 구석에서 점점 닮아가고 있었다.

라크시스가 순간 정색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렇다면 나는 사회생활을 할 때처럼 매너를 갖춰 대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로 그 말을 해석해도 됩니까?”

정색한 라크시스의 얼굴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가웠다. 타고나기를 살짝 올라간 입꼬리 탓에 잘 웃는 것처럼 보이던 그였으나, 푸른 눈매가 날카롭게 굳어버리자 시아는 덜컥 긴장하고 말았다.

너무 놀려서 화났나.

“정말 미안해요. 라크를 함부로 대한다거나 그러는 건 아니었어요.”

라크시스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살짝 돌려 마주친 시선을 떨어뜨렸다.

처음 보는 무뚝뚝한 모습이었다.

“…라크. 화났어요? 그게, 제가. 아니에요. 제가 나쁜 말을 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아닙니다.”

라크시스가 괜찮다고 답했지만 시아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어떻게 사과를 더 해야 하나. 괜히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다가 성의 없어 보이면 어쩌나 싶어 시아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그녀에게서 눈을 돌린 라크시스는 제단에 도달한 행렬이 의식을 준비하는 걸 보는 척하며 은근하게 웃고 있었다.

이유는 몰랐다. 스스로가 왜 웃게 됐는지, 그녀에게 왜 웃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지, 그녀가 좀 더 당황해서 제게 달라붙는 모습을 왜 보고 싶은지 라크시스는 알지도 못했고 본인의 이러한 감정을 인지하지도 못했다.

다만 기분이 좋았다. 격식과 예의. 딱딱하고 지루한 사회생활을 제게 하지 않는다는 말은 둘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을 그녀가 허물었다는 뜻이니까.

옆에서 시아가 조마조마해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드레스 자락이라도 움켜쥐었는지 옷감이 구겨지는 기척이 났다.

“정말로 화 안 났어요.”

결국 라크시스는 미소를 참지 못하고 시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당신에게 화를 낼 리가.”

그때였다.

“두 분, 지금 수다 떨 때가 아니에요. 곧 의식이 시작될 거라고요. 이건 역사서에도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제례 의식이에요. 그러니까 얼른 저기 잘 보이는 자리로 가죠?”

루드윅이 시아와 라크시스의 사이에 불쑥 끼어들며 종알거렸다.

“…로드 젤마니는 눈치가 상당히 없는 편이로군.”

“제가요? 눈치가 있으면 있었지, 없는 편은 아닌데요. 지금 안 가면 의식 중간에 제단을 가로질러 자리를 찾아야 할 텐데, 그랬다간 더 눈치 없는 사람이 될걸요?”

“알겠어요. 그럼 로드 젤마니가 먼저 가세요.”

발갛게 달아오른 시아의 얼굴은 루드윅의 참견으로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드레스 자락을 탁탁 펴며 루드윅을 따라 성큼성큼 걸어갔다.

라크시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시아가 멀어져 갔다. 그러나 시아의 귀 끝은 여전히 빨갰다.

하지만 라크시스는 시아의 귀 끝까지 확인할 여력이 없었다. 순식간에 옆자리가 휑하니 빈 탓에 얼굴을 잔뜩 구긴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하하. 어서 따라가지, 라크. 서두르지 않으면 누님 옆자리에 로드 젤마니가 서겠어.”

요르문이 라크시스의 등을 툭툭 치곤 먼저 비껴나갔다. 요르문은 왜인지 속이 다 시원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심사가 뒤틀리고 말았다.

【 저주가 품은 진실 】

흰옷을 입은 사용인들이 제단 주위에 둥글게 자리하고, 사제 역할의 아스타가 제단 앞에 올라섰다.

구경하러 온 영지민들이 멀찍이 떨어져 바위며 그루터기에 주저앉았다.

집사 론다니의 뿔 나팔 소리가 허공을 길게 갈랐다. 그 소리에 맞춰 사용인들이 두 손을 모아 바닥에 엎드렸다. 함에서 현자의 별을 꺼내 든 아스타가 가느다란 줄로 매듭을 엮어 현자의 별을 목에 걸었다. 현자의 별의 주인이자, 슈테른베슈테크의 핏줄을 증명하는 상징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황금 잔에 담긴 와인을 들판에 뿌렸다. 작은 함성이 일었다.

제례 의식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의식엔 에드먼드 3세도 참석한 상태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