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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77)화 (77/292)
  • 77화 

    게다가 시아 켈튼이라는 여자.

    지금까지의 이방인들과도 또 다른 시대에서 온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녀에게선 마치 인간이 아닌 것 같은 기이한 마력이 느껴졌다.

    그런 시아 켈튼을 처음 봤을 때, 아스타는 본능처럼 깨달았다. 이 사람이다. 머릿속에서 멈춰져 있던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를 분명 들었다. 슈테른베슈테크의 핏줄을 타고 내려오는 사제의 직감이 외쳤다.

    다무스가 예언한 신에 가까운 이방인은 바로 시아 켈튼이다.

    ‘…그런데.’

    라크시스의 마력에 반응한 마류 탐지기와 괴담 수집기가 경보음을 울리며 마구 진동했다. 아스타는 낯선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낚아챘다.

    이방인들의 문명에서 사용되던 기계였다. 반원 모양 눈금 위로 바늘이 가장 높은 숫자를 가리키며 바들바들 떨었다.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급작스러운 마력 탓이겠지. 은발의 마법사가 위협에 가까운 방대한 마력으로 이 공간의 마법사들을 무력화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녀로 위장했던 마법사들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백작 본인 역시 두피에 맺히는 식은땀을 애써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있는 중이었다.

    라크시스의 옆엔 제 방에서 훔쳐 온 것이 분명한 보석함이 내팽개쳐져 있었다.

    ‘그래, 지금껏 수많은 이방인들이 내 방에 나타났었지만.’

    처음부터 현자의 별에 관심을 보인 이방인들은 이들뿐이었지.

    이방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자신의 편이 될 것이고, 삿된 의도가 없을 거란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이방인은 저를 괴담 속 귀신 정도로만 생각하던, 현자의 별에 관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자들이었다.

    제국인이었음에도 자신을 경계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다른 세상에서 온 손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의 이방인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이상한 차림의 여자와 압도적인 마력의 마법사. 이들이 현자의 별을 훔치려던 장면을 목격하기 전까진 말이다.

    아스타는 방심하고 있었음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배신감과 허탈함이 폐부에 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스타는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는 보석함을 집어 들었다.

    “난 나름대로 너희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했는데.”

    분노가 고요히 일렁인다. 아스타는 끓는 목소리로 말을 짓씹었다.

    그러나 분노 속에서 한 가지 의문이 피어올랐다. 이들은 미래에서 온 이방인이었다. 제국인이기는 했으나, 이 시대의 케르딕 황제와는 관련이 없는 자들이었다.

    케르딕 황제는 현자의 별을 거대한 마력 덩어리라 착각했다. 현자의 별을 빼앗으면 백작령이 무너지고, 다무스를 복속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제국군이나 제국인 첩자나. 그들은 황제가 지시했기에 사지인 백작령에 발을 들였다. 사실 그들도 케르딕 황제의 명이 아니었다면 굳이 목숨을 걸고 슈테른베슈테크에 올 이유가 없었다. 그 말인즉, 지금껏 현자의 별을 노렸던 수많은 적들은 케르딕 황제의 명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이곳까지 온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황제와 전혀 관련 없는 이방인들이 현자의 별을 훔치려고 했다. 그것도 처음부터 현자의 별에 대놓고 관심을 보이면서 말이다.

    ‘이들은 현자의 별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일까.’

    현자의 별의 진짜 정체. 고대의 미궁으로 향하는 열쇠.

    이방인들은 그것을 알고 현자의 별을 탐냈던 걸까.

    너희들은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온 거지?

    지금 당장 네 명을 고문실로 끌고가 밤새 고문할 수도 있고, 그러다가 살살 구슬려 속내를 알아낼 수도 있다.

    “…실망스러운 손님이었군.”

    하지만 아스타는 이들에게 묻지 않았다. 대신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계속해서 시아 일행을 관찰하고 감시하는 것을 택했다.

    아스타는 뒤늦게 달려온 집사에게 명령했다.

    “론다니, 손님들을 방으로 도로 모시거라.”

    * * *

    다음 날, 간밤의 제국군 기습에도 불구하고 론다니가 말했던 점심의 만찬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슈테른베슈테크 측에서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방적인 학살이긴 했지. 시아는 어제 목격했던 장면을 아주 잠깐 떠올렸다.

    하지만 기습은 기습이다. 예기치 못한 공격을 받았음에도 백작은 마치 모든 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제국군이 전진해 올 진로의 영지민까지 미리 다 대피시켜 두었다.

    이 모든 걸 제쳐두고, 정말로 놀라웠던 건 만찬에 참석한 뜻밖의 손님이었다.

    “다무스의 왕을 뵙습니다.”

    “백작…….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에드먼드 3세.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 백작과 동시대의 인물이자, 다무스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된 인물이었다. 이자벨라 황녀에게 첫눈에 반해 청혼하고 그녀를 위해 제국의 국교로 개종까지 한, 세기의 사랑으로 유명한 왕이기도 했다.

    루드윅은 생각했다.

    ‘기록된 것에 비해선 사랑 때문에 줏대 없이 휘둘릴 이미지는 아닌데?’

    거칠어 보이나 잘 빗어넘긴 회색 머리칼과 우묵하게 패인 볼. 눈썹뼈 밑으로 짙게 드리운 그늘은 에드먼드 3세의 인상을 신경질적으로 보이게 하면서도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드는 주목성이 있었다.

    타오르는 태양을 닮은 아스타와는 정반대의 인상이었으나 그렇다 해서 유약한 느낌은 아니었다. 에드먼드 3세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권위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의 목에서 오래 전 유실된 다무스 왕가의 보물이 반짝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큰 루비.

    바로 붉은 심장이었다.

    루드윅은 동경해 왔던 유명 배우라도 목격한 것처럼 에드먼드 3세를 열심히 구경했다. 루드윅에게 있어 에드먼드 3세는 살아있는 역사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의술사인 시아는 에드먼드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지나치게 수척해 보이는데. 어디 아픈 걸까?’

    퇴폐적이라면 퇴폐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눈 밑 그늘은 잠을 오랫동안 못 잔 사람의 증세와 같았다.

    설마 약이라도 했나?

    시아는 백작의 뒤에서 에드먼드 3세를 관찰하다 그만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마냥 냉담하던 회색 눈동자가 시아를 바라보는 순간 심기가 거슬린 것처럼 날카로워졌다.

    백작이 내어준 드레스는 3300년 경 말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자신을 찔러 죽일 듯이 노려보는 에드먼드 때문에 시아는 안 그래도 답답한 코르셋이 심장 깊숙한 곳을 확 조여대는 것 같은 긴장감을 느꼈다.

    “큰일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피와 재와 화약으로 얼룩진 영지를 보고도 큰일이 아니라고 하는 백작이나, 백작령에 방문하면서 전투라도 준비하듯 친위대란 친위대는 죄다 끌고 온 에드먼드 3세나 둘 다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에드먼드는 시아가 떠날 때까지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시아는 애써 몸을 숙이며 게이블후드의 자락으로 얼굴을 가리려고 했다. 등 뒤에 단단히 자리한 코르셋 때문에 결국 실패했지만 말이다.

    어젯밤 집사가 시아에게 목걸이를 건네며 참석하길 바란다고 했던 만찬은 사실 에드먼드 3세가 난데없이 영지에 방문하며 급작스레 준비된 만찬이었다.

    ‘예정에 없던 만찬인데 이렇게 많은 것을 준비했단 말이야?’

    아무리 봐도 며칠 전부터 공들여 준비한 티가 나는 만찬이었다. 에드먼드도 그걸 느꼈는지,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은쟁반을 보면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만찬에 참석한 시아의 일행은 먹은 걸 도로 게워내지 않도록 애를 써야만 했다.

    ‘제국 측에선 선전포고도 없었다는 말인가? 비겁하게 밤에 그만한 규모의 군대를 이끌어?’

    ‘전쟁에 비겁이 어디 있겠습니까. 살아남는 자가 승리할 뿐이니까요.’

    혓바닥으로 문지르기만 해도 부드럽게 으깨지는 촉촉한 거위 구이. 얇은 껍질은 바삭하게 구워내고 와인과 동대륙산 향신료를 오래 졸여내 풍미가 깊은 소스를 아낌없이 부었다. 버터와 치즈, 감자 따위를 버무려 채운 속을 나이프로 조심스레 가르면 톡, 하고 기름이 흘러내리며 고소하고 뜨거운 훈내가 쉴 새 없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 광경은 감상하기만 해도 목구멍에 육즙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거위 요리는 갑자기 방문한 왕을 대접하기 위해 주방장이 며칠 전부터 와인에 재우고 숙성시키며 혼신의 힘을 다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아스타와 에드먼드는 거위가 차갑게 식어 딱딱해질 때까지 손도 대지 않았다. 정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화가 이어진 탓이었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다음에 방문할 걸 그랬어.’

    ‘오늘이기에 오신 것 아닙니까? 일부러 친위대를 수백이나 대동하신 것도 말이죠.’

    ‘그게 무슨 말인가, 백작. 그대는 사람을 서운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군.’

    ‘저만큼 서운하실까요. 영지의 항구가 열린 것도, 외성의 경비병이 죽은 것도 모두 제가 원한 건 아니었는데.’

    ‘…내가 준 선물은 어찌하고.’

    이때 에드먼드 3세는 시아를 또 한 번 구멍이 나도록 노려보았더랬다.

    ‘데려오신 친위대가 선물이라면 거절하겠습니다. 주인의 목을 치지 않을 기사라면 이미 충분하니까요.’

    새하얀 식탁보 위에 풍성하게 차려진 과일이며 파이, 채소 따위가 그대로 남았다. 그 귀한 고기마저 남아 성의 사용인들은 간만에 훌륭하게 조리된 음식들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식사가 코로 넘어갔는지 입으로 넘어갔는지 모르겠어요.”

    “백작과 왕은 사이가 퍽 좋지 않아 보이더군요.”

    그러나 슈테른베슈테크의 사람들은 이런 광경이 익숙한 모양이었다. 어젯밤 연회에서 그렇게 고기를 먹고도, 만찬에서 남은 고기를 먹으며 즐거워했다.

    만찬이 끝난 후, 시아는 최대한 빠르게 만찬장에서 줄행랑을 치려고 했다.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초대해 주신 덕에 영광스러운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네요. 국왕 전하, 로드 슈테른베슈테크. 저는 먼저 물러가 보겠습니다.”

    에드먼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주자마자 호다닥 뒤돌아 나가려고 했는데, 아스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시아를 불러세웠다.

    “레이디 켈튼. 곧 다무스 제단에 제를 올리는 의식을 할 건데. 어때? 참석하겠어?”

    “제가요……?”

    다무스가 그저 씨즐턴의 옛 지명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 섬의 토착 신앙인가 보네. 다무스라는 신을 섬겨서 왕국의 이름이 다무스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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