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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76)화 (76/292)
  • 76화 

    시아는 라크시스를 가만히 불렀다.

    “라크.”

    “이제 좀 살 만합니까?”

    시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제게 물을 내려주는 길쭉한 손가락 너머로 은발의 마법사가.

    ‘라크가 저렇게 기분 좋아하는 건 처음 봤어.’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거예요?”

    “뭐가요.”

    “…웃고 있잖아요.”

    내가 웃고 있다고? 라크시스는 무의식적으로 제 입가를 매만지다가 그녀의 말이 정말이었음을 깨달았다.

    순간 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 눈에 서린 건 공포였다. 그녀는 제 어깨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러게. 뭐가 좋아서 그렇게 실실 웃고 있는 거니? 사랑놀음을 하느라 도둑질도 다 잊고 말이야.”

    서늘한 검날이 목덜미에 닿았다. 라크시스는 살갗을 저며낼 것처럼 위압적인 날붙이를 따라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 백작이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채 다 닦이지 못한 검에서 풍겼다. 사람을 죽인 흔적이다. 벗어든 투구 사이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전쟁의 불길 때문에 그런 것치곤 백작 역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백작은 시아에게 달려온 것이었다. 급작스러운 기습에 제 손님이 혹여 놀라거나 예상치 못한 위험에 처했을까 봐.

    레이디 시아 켈튼의 방이 외부 침입에 의해 강제로 열렸다는 신호가 있었다. 하녀로 위장한 마법사들로 하여금 그녀의 방문 걸쇠에 마법을 걸어놓으라고 명했었다.

    시아 켈튼이 죽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슈테른베슈테크의 멈춰있던 시간을 움직일 자였으니까.

    * * *

    아스타는 오래 전 악마 숭배자로 몰려 이미 한 번 죽었다. 역병이 돌고, 성난 영지민이 횃불을 들고 성으로 찾아와 영주의 몸을 창으로 꿰뚫고 악마 재판을 했던 것이다.

    아스타는 악마 숭배자도, 역병을 퍼트린 자도 아니었다. 사실 악마 같은 건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냉혈의 사자라 불리던 아스타도 선동당한 사람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횃불의 물결, 가장 선봉에는 이 모든 사태를 만들어낸 진짜 악마가 있었다.

    검은 마법사.

    사제복을 입은 악마.

    ‘나의 것을 돌려받으러 왔느니.’

    그는 배신자 사도 미옌의 고대 마법, 바로 저주를 사용하는 마법사였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검은 마법사가 섬뜩하게 웃으며 제 품에서 현자의 별을 가져가려고 하던 게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검은 마법사는 성스러운 금발에 천사 같은 얼굴로 검은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역설적이게도 아스타가 지금껏 마주한 사람 중 가장 악마 같은 존재였다.

    그에게 선동당한 영지민은 한때 아스타가 가장 사랑했던 백성들이었다. 사람들은 아스타가 영지를 배신했다고 했지만, 정작 배신당한 건 아스타였다. 그녀를 보며 웃던 이웃의 얼굴이 분노와 혐오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럼에도 아스타는 그들을 버릴 수 없었다. 선동당한 영지민들이 검은 마법사의 저주에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그랬구나. 대체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제야 눈치챘느냐. 하지만 이미 늦었단다. 이들은 이미 내게 영혼을 바쳤으니.’

    아우성치는 가냘픈 영혼이 아스타를 보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횃불을 들고 악마를 심판하자며 성난 목소리로 아스타에게 창을 들이밀었지만 그들의 가슴 깊은 곳, 저주에 묶인 영혼은 슬피 울고 있었다.

    검은 마법사는 잔인하게 웃었다. 그는 비극적인 선택지를 제안했다.

    ‘네가 사랑하는 인간들과 현자의 별. 둘 중 무엇을 택하겠느냐?’

    현자의 별을 넘긴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안다.

    그러나 영지의 군주로서, 백성의 삶을 책임지는 영주로서 아스타는 볼모가 된 영지민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창에 꿰뚫리고 피를 토하며 눈을 감았을 때, 아스타는 예언을 받았다. 신의 음성이 귓가에 먹먹하게 울려 퍼졌다.

    ‘네 운명을 움직일 이방인이 불현듯 찾아오리니. 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로다.’

    그리고 아스타는 자신의 생일이자 승전 연회가 열리는 날의 아침, 침대에서 눈을 떴다. 알렉스가 악몽이라도 꾼 듯 눈물 젖은 얼굴로 그녀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아……. 주군, 살아계시는군요. 제가, 당신이 창에 꿰뚫리는 꿈을…….’

    ‘꿈이 아니야, 렉시. 이건 이미 한 번 일어났던 일이야.’

    성의 모든 이들이 검은 마법사가 찾아와 영주를 죽이고, 영지민들의 손에 성이 불타는 끔찍한 꿈을 꾸었다고 했다. 아스타는 알렉스의 말을 듣고 확신했다.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의 모두가 그녀와 함께 과거로 돌아간 것이다. 회귀였다.

    하지만 회귀를 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운명이란 이토록 거대하고도 무거운 것이었나.’

    아스타는 또다시 같은 죽음을 맞이했다. 백작령에서 번진 역병이 왕국의 모든 곳에 도달하고,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다무스의 제단엔 죽은 염소의 시체와 피로 그린 별이 있었고, 다무스 신상이 불타올라 마을을 잡아먹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믿던 신을 악마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런 신을 마지막까지 모시던 사제인 슈테른베슈테크 백작을 악마 숭배자라 여겼다.

    아스타는 이 모든 일이 검은 마법사의 짓이라 확신했다. 마법을 이용하면 모두 충분히 꾸며낼 수 있는 일이었다. 현자의 별을 얻기 위해 철옹성 같던 영지를 무너뜨리고, 영지민들에게 불신을 심고, 종내에는 내게서 현자의 별을 가져가려 했던 것이겠지.

    다가올 미래를 알고 검은 마법사를 미리 잡아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가 입고 있던 옷이 제국 국교회의 사제복이라는 걸 알곤 영지에 얼씬거리는 국교회 사제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수색했다. 마침 제국의 마약상들이 왕비 이자벨라의 비호 아래 사제인 척 변장하고 다무스에 기어들어 올 때였다.

    아스타는 지하 감옥이 가득 찰 때까지 손닿는 모든 곳의 마약상과 사제들을 붙잡아 넣었지만 검은 마법사를 발견할 수 없었다. 도리어 국교회를 탄압한다는 오명을 쓰고 또다시 악마 숭배자로 몰릴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괴, 괴담이야! 죽은 슈테른베슈테크 백작의 귀신이다!’

    제 방에서 난데없이 이상한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괴담? 귀신? 지금 나한테 한 소리니?’

    ‘이건 진짜야, 특종이라고. 주간 미스터리에 당장 기고해야겠어. 아니야, 사진부터 찍어두자. 진짜 귀신이면 어떻게 찍히게 되려나? 내 지팡이, 지팡이 어디 갔지?’

    기이한 복장에 기이한 말투, 기이한 기계를 쓰는 자들이었다. 지팡이의 손잡이를 열자 도르래 걸쇠 같은 동그란 쇳덩이가 철컥철컥 펼쳐지며 이상하고 거대한 유리알이 튀어나왔다. 순간 불빛이 번쩍 하고 터져 아스타는 화들짝 놀랐다. 불빛을 터뜨린 기계가 태엽 장치이자 사진기라는 이름을 가진 마법 도구라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방금 그건 마법이냐? 번개의 정령을 부리는 자로구나.’

    ‘마법은 마법이지만, 아. 당신은 사진기를 모르겠구나. 이건 정령 같은 게 아니야. 마도 공학의 산물이라고. …잠시만, 사진이 찍히잖아. 당신 진짜로 귀신이 아니야?’

    ‘무례하구나. 난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 백작이다. 이 영지의 주인이자 너 같은 침입자로부터 이 성을 지켜내는 사람이지.’

    ‘그럼 지금은 도대체 언제…….’

    ‘날짜도 제대로 셈하지 못하는 것이냐. 참 바보 같구나. 정신이 오락가락하나 본데, 지금은 3385년이란다.’

    렉시, 이놈을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라. 아스타가 그렇게 말하곤 돌아설 때였다.

    ‘잠깐, 잠깐만! 난 침입자가 아니야!’

    ‘무슨 헛소리야?’

    ‘난 3518년에서 왔다고. 미, 미래에서 왔단 말이야!’

    뭐?

    미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목격한 모든 정황들이 저 침입자의 말이 진실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침입자는 전혀 다른 문명에서 온 사람 같았으니까.

    아스타는 침입자의 멱살을 붙잡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알렉스가 자신을 애타게 부르며 문을 두드렸지만 무시했다.

    ‘네가 진짜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면 증명해 봐라. 거짓이면 당장 목을 벨 테니.’

    ‘…당신은 곧 죽어.’

    진짜야. 오해하지 말고, 사실 나도 괴담 말곤 아는 게 별로 없단 말이야.

    침입자는 멱살이 잡혀 새빨개진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백작 당신은 악마를 숭배하잖아. 그, 뭐라더라. 카얄? 이단에서 신이라 일컫는 사특한 어둠 말이야. 당신이 역병을 퍼트려서 곧 이 영지가 망하게 된다고. 악마 재판을 받게 될 거야.’

    만약 회귀를 하지 않았더라면 아스타는 분노하여 침입자의 목을 쳤을 것이다. 그가 감히 그녀를 악마 숭배자라고 칭하며 카얄을 입에 담는 불경죄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스타는 이미 회귀한 후였다. 제 미래를 정확히 알고 있는 침입자에, 그의 목깃을 거세게 쥐었던 손에 힘이 풀렸다.

    ‘겁도 없구나. 아무리 진실이라 한들 영주의 앞에선 입을 조심하기 마련인데.’

    그 후 아스타는 침입자를 손님으로 대했다. 그에게서 정보를 얻고, 그녀가 가지고 있던 기억을 되살려 다가올 참극을 조금씩 막아냈다. 희망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아스타는 시간을 거슬러 온 이 사람이야말로 예언이 말했던 ‘이방인’이라고 생각했다. 반복되는 제 운명을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존재.

    그러나 아스타가 맞이하게 된 최후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스타는 창이 꽂힌 가슴에서 피를 쏟아내며 중얼거렸다.

    ‘…어째서 그대로인 거지.’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거대한 운명 앞엔 한낱 미물에 불과하단다.’

    검은 마법사는 또다시 잔인하게 웃었다. 아스타는 검은 마법사에게 이방인의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나 이방인은 이미 창에 꿰뚫려 죽은 상태였다. 바닥에 나뒹구는 이방인의 창백한 시체를 보면서 아스타는 통곡했다.

    예언이 거짓이었나? 신은 어찌 무고한 자를 이곳으로 이끌어 죽게 하였나. 죽는 것은 나 하나로도 충분했을 텐데.

    눈물로 흐릿하던 시야가 곧 암전되었다.

    그리고 아스타는 또다시 생일날 아침으로 회귀하였다.

    * * *

    ‘이번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아스타는 은발의 마법사를 내려다보았다. 이젠 더 이상 숨기지 않겠다는 듯 마구잡이로 풀어낸 그의 마력은 갈리프의 아홉 사도 중 하나이며, 이 땅에 현자의 별을 남긴 고대 마법사 다무스와 거의 흡사하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이 정도의 마법사가 이방인으로 온 건 처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아스타는 처음에 기대에 부풀어있었다.

    ‘이자라면 검은 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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