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아아아아악! 여보―!’
‘엄마아아! 엄마, 무서워. 엄마아아…….’
‘시아, 시아! 정신 차려! 당장 피해야 한다!’
백작의 지휘 아래 제국군은 몰살당하고 있었다. 곧 백작이 손을 들어 하늘에 거대한 불덩이를 띄웠다. 운석처럼 떨어지는 불덩이가 포장도 안 된 흙바닥을 마구잡이로 팬다.
쿵. 쿵. 쿵쿵. 쿵쿵쿵쿵. 시아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호흡이 곤란해져 온다. 아득한 기억 속에서 고개를 든 트라우마들이 목을 옥죄어왔다.
“헉… 허억…….”
마리를 만나러 가던 길. 멈춰 선 마차. 귀가 찢어질 듯한 폭발음. 마차를 집어삼키던 시뻘건 화마. 저를 낚아채던 로건과 온몸을 때려 부수는 충격. 사방에 널린 죽음의 파편들.
‘아가씨―! 피하십시오!’
분명 다른 상황들인데. 백작에게 있어선 영지를 지키기 위해 응당 해야 했을 일일 텐데.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변했다. 지나치게 가빠오는 숨에 머리가 핑 돌았다. 팔다리가 쥐가 난 듯 저려왔다. 가슴까지 쥐어짤 듯 저려오는 지경이다.
과호흡 증상이었다.
침착해, 시아 켈튼. 시아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감쌀 종이봉투를 찾았다. 그러나 이곳은 그 무엇도 없는 3300년 경의 슈테른베슈테크였다. 창문으로 훤히 비쳐드는 뜨거운 불덩이의 폭격은 시아의 공포감을 극대화시킬 뿐이었다. 시아는 나풀거리는 튜닉의 소맷자락을 급히 모아 코와 입을 막았다.
“헉, 헉, 흐읍……! 커흑, 헉, 하윽.”
시아는 그대로 쓰러졌다.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는다. 목구멍의 점막이 저들끼리 들러붙어 입 안이 바짝 말라버렸다. 전신이 아릴 듯이 저렸다.
정신이 아득해져 간다. 과호흡 증상으로 실려 오는 환자들 중 과호흡 그 자체가 트라우마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해가 될 것 같다.
괴로워. 죽을 것 같아. 제발 숨을 멈춰줘.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그걸 가물가물 인지했지만 시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누님?”
요르문이었다.
* * *
시아의 방 밖에는 세 남자가 모여있었다. 요르문의 부름에 그녀가 대답이 없자 라크시스가 나섰다.
“시아. 라크시스 옌입니다.”
루드윅이 멋쩍게 물었다.
“자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럴 리가요.”
모두가 잠들어 있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은 성장한 상태였다. 감옥에서 고생하지만 않았어도 더 깔끔했을 차림이다. 코트에 재킷과 베스트, 구두와 모자, 지팡이까지. 누가 봐도 그들은 야회에 가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안 자는 거 압니다. 시아. 바깥 상황을 봤으면 알겠지만 백작은 지금 우리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어요.”
안에서 기척이 들렸기 때문이다. 바닥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듯한 느낌. 발소리인가. 시아는 일어나 있었다.
복도엔 그들을 빼고 아무도 없었다. 하긴 한밤에 적군에게 기습을 받았는데, 얌전히 성안에 붙어있을 사용인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지은 죄가 있는 그들은 조바심이 났다. 라크시스의 손에 들린 작은 보석함 때문이었다.
아스타의 백골이 감싸 안고 있던 봉인의 보관함.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온 그들은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은 보석함 안에서 영롱하게 빛을 내는 무결점의 별 모양 마정석, 즉 광룡의 봉인을 발견했다.
아니, 정확히는 백작이 없는 틈을 타 잠겨있지 않았던 그녀의 방을 뒤져서 봉인을 훔쳐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봉인은 오토마톤의 심장처럼 맥동하지는 않았다. 마류 탐지기는 미미하게 반응했다. 사실 마류 탐지기는 마력 그 자체를 측정하는 기구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마류 이상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마류 탐지기 역시 조용한 게 정상이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라크시스와 요르문은 확신했다.
이건 현자의 별, 바로 광룡의 봉인이다.
감히 그들 사이에 끼어들지 못한 루드윅만이 그들이 현자의 별이라 확신한 마정석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라크시스가 재차 문을 두드렸다.
“광룡의 봉인을 찾았으니 빨리 이 성을 빠져나갑시다. 제국으로 건너가 시간 여행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됩니다.”
시아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문틈 사이로 새어 나왔다. 미약한 소리였으나 라크시스의 신경은 곧장 날카로워졌다.
불규칙한 공기의 흐름. 지나치게 빠르고 밭은 호흡은 마치 몇 분 내로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위태로웠다.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불길한 예감이 라크시스의 전신을 타고 위급 상황을 경고하고 있었다.
“젠장, 시아!”
앞뒤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라크시스는 문을 박차고 방 안으로 달려들었다.
* * *
“정신 좀 차려봐요, 내가 보입니까?”
시아가 네, 하고 대답할 정신이 있었다면 이렇게 그녀의 침실에 뛰어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아는 심장이 터져라 숨을 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지? 만일 그녀가 이런 환자를 마주했다면 머뭇거림 없이 당장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건 쓰러진 시아를 반쯤 안아 올려 상태를 확인한 것뿐이다.
극도의 무력감이 라크시스를 감쌌다. 라크시스는 스스로가 바보 같다고 느꼈다.
루드윅이 다급하게 침대보를 끌어내려 시아의 얼굴을 덮었다. 풍선처럼 부푼 침대보 밑에 그녀의 얼굴이 가려졌다. 얼핏 호흡기를 압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라크시스가 매섭게 루드윅의 손을 쳐내며 쏘아붙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루드윅은 아랑곳 않고 다시 침대보를 시아의 코와 입가로 가져갔다. 얻어맞은 손등은 벌겋게 부어있었다.
“과호흡이에요.”
“과호흡? 대체 무엇 때문에…….”
“가멜에서 겪은 공포 때문에 퇴역하는 동료들을 자주 봤어요. 아마…….”
루드윅은 창밖으로 펼쳐진 불화살과 총탄의 현장을 슬쩍 바라보았다. 루드윅의 고개가 향하는 곳에 라크시스의 시선이 귀신처럼 따라붙었다.
“…전쟁 때문이군.”
“이런 광경을 처음 봐서 놀랐거나, 과거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기 때문에 공포를 느꼈거나. 아마 그럴 거예요.”
루드윅은 놀랍도록 침착했다. 그가 지금까지 괴담을 수집하러 다니며 겪어왔던 수많은 돌발 상황 덕분이었다. 괴담을 찾으러 가멜 식민 전쟁에 참가했던 경험이 괴담의 실체인 레이디 켈튼을 살리게 될 줄이야.
“이건 레이디 켈튼이 스스로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정신적인 문제가 원인이라면요.”
괜찮아요, 레이디. 백작이 이곳을 지키고 있어요. 저 불길은 이곳까지 절대 못 오니까 두려워하지 말아요. 숨을 천천히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어요. 천천히, 네. 잘 하고 있어요. 손을 잡아줄게요. 그렇지, 천천히 내쉬어요.
루드윅은 시아의 손을 주무르며 끊임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시간이 지나자 놀랍게도 시아의 숨소리가 한결 차분해졌다. 여전히 할딱거리기는 하지만 시아는 이제 주변에 누가 있고 자신이 어떤 처치를 받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시아가 진정이 되고 있는 건 분명 다행인 일인데. 루드윅이 처치를 시작한 이후, 라크시스는 이상하게도 속이 불편해지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느끼는 불편함이다. 잘못 끼운 단추를 보는 것처럼 신경이 자꾸 거슬리고 머릿속을 메운 답답함이 가시질 않았다.
라크시스는 시아에게 가장 가까이 있음에도 스스로가 마구간에 쌓아놓은 짚단처럼 버려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기껏 훔쳐낸 광룡의 봉인이 쓸모없는 돌덩이처럼 보였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완벽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원하지 않는 대로 일이 처리된 적은 없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견뎌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라크시스는 곧 스스로가 지금 상황을 상당히 불만스러워한다는 걸 알아챘다.
무엇이 문제이기에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시아는 제 팔에 머리를 뉘고 게슴츠레 뜬 눈을 몽롱하게 굴리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에 비치는 건 자신이 아니라 루드윅 젤마니였다.
“안정을 되찾게 한다면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나?”
“그것까진 저도 모릅니다. 전 군인이었지 의사는 아니니까요.”
아귀가 단단한 라크시스의 손이 하얗게 질린 시아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루드윅의 손을 자연스럽게 밀어낸 라크시스는 마디와 마디를 얽어 그녀와 완전히 손을 맞물렸다.
곧 라크시스의 눈동자에서 기이한 푸른 빛이 찰나 명멸했다. 손에서부터 피어오른 무형의 기운이 시아의 손바닥을 삼키고 그녀의 팔을 따라 서서히 기어올랐다.
놀랍게도 거의 동시에 딱딱하게 굳어있던 근육들이 풀리고, 창백하던 뺨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치유사의 기적. 어릴 적 딱 한 번, 막냇동생을 낳다가 사경을 헤매게 된 어머니를 기적적으로 되살린 치유사를 보고 루드윅은 신의 존재를 막연하게 믿었더랬다.
루드윅은 봄날의 아지랑이가 레이디 켈튼을 포근하게 감싸 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시아.”
핏발 선 눈으로 시아가 천천히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의 눈가는 젖어있었다.
“…목이 따가워요.”
라크시스는 시아의 머리를 받치고, 그녀의 손을 잡느라 옴짝달싹 못하던 두 손을 조심스레 풀어냈다. 그녀의 머리를 꿇어앉은 제 허벅지에 뉘고, 자유로워진 두 손을 오목하게 모아 시아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입 벌려봐요.”
시아가 힘없이 입술을 벌렸다. 라크시스는 제 손가락 끝에 닿는 붉은 입술이 말랑하고 보드랍다고 생각했다. 그의 손가락을 타고 방울지던 물이 이내 주전자에서 따라내는 물줄기처럼 변해 시아의 목구멍을 적셨다.
시아는 재차 짧은 숨을 내쉬었다. 물을 넘기기 버거운지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바짝 마른 점막에 닿는 수분이 정말로 기꺼운지 그의 손가락을 빨아당길 기세로 물을 받아마셨다. 마치 그녀가 자신을 갈구하는 것만 같았다.
문득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환자를 앞에 두고 할 만한 상상은 아니었으나 지금껏 누구에게도 정염 따위를 느껴보지 못했던 라크시스는 이러한 본인의 생각이 명화나 유명한 조각을 보고 드는 감상과 비슷한 것이라고만 여겼다.
시아는 무사했고, 이제 그녀의 눈동자엔 오로지 자신만이 가득했다. 안정적인 숨소리가 듣기 좋은 음악처럼 들릴 지경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그걸 느끼고 나서야 라크시스는 지금껏 자신이 무엇에 불만이었던 것인가를 깨닫고 말았다.
내가?
설마. 라크시스는 막 움튼 새싹처럼 고개를 든 감정 위에 불신의 흙을 덮어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