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주인님께서 내일 손님들을 점심 만찬에 초대하고 싶으시다고 하셨습니다. 의복을 준비해 두었으니 큰 걱정 없이 주무셔도 될 겁니다.”
론다니는 촛대와 함께 내내 들고 오던 상자를 시아에게 내밀었다. 자그맣고 고급스러운 상자 위엔 슈테른베슈테크 가문의 사자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뭔가요?”
“주인님의 선물입니다. 내일 만찬 때 레이디께서 이 목걸이를 착용하고 나오셨으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조심스레 열어보니 아주 고전적인 디자인의, 그러나 끊임없이 관리해 광택이 여전히 아름다운 목걸이가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장식된 보석이 얼마 없다는 점에서 그리 화려해 보이진 않았으나.
‘이런 건 값을 매길 수가 없는 보물일 텐데.’
어머니에게서 딸로, 다시 딸에게서 그녀의 딸로 대물림되어 온 유서 깊은 보물이 틀림없어 보였다.
이 목걸이는 백작의 것이 분명했다.
“…이런 걸 저보고 하라 하셨다고요?”
“주인님은 언제나 뜻이 있기에 명하시는 분이지요. 레이디의 목에서 이 목걸이가 빛나길 바라는 이유도 분명 있을 겁니다.”
론다니는 그렇게 말하곤 방을 나갔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굴러가는 거야. 시아의 뇌는 과부하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소박한 자수의 두건을 두르고 로브를 입은 하녀들은 시아가 침대에 누울 때까지 따라다녔다. 여기에서도 푹 씻진 못하는구나. 상하수도가 제대로 발달되지 않은 곳이라 아쉬움이 느껴질 따름이었다.
백작의 손님은 벗을 드레스가 없어서인지 시중들 것도 별달리 없었다. 전기도 무엇도 없는 다무스의 밤은 아르카나와 달리 지나치게 고요했다.
온통 새까만 바깥 풍경과 텅 빈 거리. 절벽으로 밀려오는 얕은 파도 소리가 집채만 한 폭풍우 소리처럼 크게 느껴지고, 성안을 돌아다니는 기사들이 갑옷을 절그럭대고 있는 것까지 알아챌 만큼 조용한 곳이다.
그런데 아까 다들 술 먹고 뻗지 않았어?
“저기, 밑에서 무슨 소리가…….”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얼떨결에 대화가 차단되고 말았다. 시아가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는 사이, 하녀들은 순식간에 창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친 후 시아의 옷을 갈아입혀 그녀를 침대에 눕혀놓고는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방문을 밖에서 잠근 것 같은 소리가 났다.
피곤해서 그런 거지? 그런 거겠지? 급작스러운 손님맞이에 이 시간까지 잠들지도 못하고 차출된 하녀들을 애써 이해하려 하면서 시아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렇게 어둠에 잠긴 방에서 수십 분이 흐르고.
“아냐.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시아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긴 언더튜닉 차림으로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린 시아는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방을 더듬거리며 창가로 향했다. 묵직한 커튼을 걷어내고 조명이 되어 줄 달빛을 반기려는 순간.
“……!”
지옥이 눈 앞에 펼쳐졌다. 붉은 제국의 깃발과 함께 수백의 횃불이 외성을 뚫고 본성으로 달려들었다. 시아는 입을 틀어막았다.
기습이었다.
타다다다닥. 본성의 철문에 박혀 드는 따가운 총알 소리가 삼 층까지 들렸다. 성의 사용인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뜨거운 물과 돌을 성벽 위로 날랐다. 성벽의 옹이구멍에서 궁병들이 불화살을 날리자 제국군의 붉은 깃발에 시뻘건 불길이 옮겨붙었다. 위협적으로 솟아있던 수백의 제국군 창이 방어의 역할을 채 하지도 못하고 힘없이 고꾸라졌다.
제국군 사령관이 애타게 외쳤다.
“마법사는, 아직 마법사는 소식이 없나!”
드넓은 남대륙 벌판에서 서대륙 프리드실 공국 군대를 학살했던 경험은 절벽 오지에 위치한 성벽 요새 기습에선 무용지물이었다. 닿지도 않을 거리에 머스킷을 마구잡이로 격발하며 사령관이 애타게 외쳤다.
그때였다.
“이놈 찾아?”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전쟁터에 울렸다. 대낮처럼 훤한 성벽 위에 황갈색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휘날렸다.
싸우던 모든 병사들이 적군 아군 가릴 것 없이 그대로 멈춰 섰다.
냉혈의 사자, 백작이었다.
이윽고 성벽 꼭대기에서 육중한 무언가가 날아와 제국군 사령관의 발치에 반죽처럼 철퍽 떨어졌다.
고성의 사용인으로 일하던 남자였다. 이미 시체가 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제국군 사령관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남자는 제국군에서 잠입시킨 첩자이자 마법사였다.
“고작 이런 놈을 가지고 마법사라 한단 말이야? 내가 퍽 얕보인 것 같네.”
“이, 이런 악랄한 마녀 같으니…….”
마법사는 고급 인력이었다. 제국 본토에서도 턱없이 부족한 게 마법사였으나, 타국에 첩자로 보내기에도 마법사만큼 적합한 존재가 없었다.
무기를 소지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마법사는 그 자체로 총검을 뛰어넘는 무기와 같은 존재였다. 바깥과 연락을 할 때에도 굳이 전령새나 전달책을 쓸 필요가 없다. 의심을 피하기에 최적화된 존재들이니 제국의 고급 인력을 소모해 가면서도 케르딕 7세는 약점이 잡힌 마법사들을 첩자로 키워냈다.
부모, 자식, 배우자, 연인.
인질이 잡힌 마법사들은 케르딕 7세를 위해 일할 수밖에 없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 밤새 연회가 열릴 예정.]
[제국 측 마법사가 백작의 방에 잠입. 지하에 감금. 작전과 관계 없는 자. 예정대로 기습 작전 감행. 자정에 성문을 열어놓겠소.]
백작이 가장 무방비해지는 날. 불과 몇 달 전의 해전에서 제국군이 완패를 했으니 아마도 백작은 한동안 제국이 다시 공격해 올 여력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때마침 승전 연회가 백작의 생일날에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제아무리 전쟁터에서 날고 기는 백작도 술에 거나하게 취하면 지푸라기 인형이나 다름없을 터.
슈테른베슈테크 본성에 잠입시킨 제국의 마법사는 오늘의 기습 작전에서 성문을 개방하는 역할을 맡기로 했었다.
실패할 리 없었고, 실패해서도 안 되는 작전이었다.
‘위대하신 대 세페란테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현자의 별을 가져와라.’
‘…냉혈의 사자가 지킨다는 그 현자의 별 말씀이십니까? 불가능합니다, 폐하.’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제국의 붉은 군대지. 아, 그 얘길 했던가. 사슴 석상이 놓인 세레타 거리의 저택이던가. 그대의 딸이 참 귀엽게도 컸더군. 이름이 에이미였나. 가멜에서 공을 세운 사령관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던데.’
식은땀이 흘렀다.
황제는 잔인하게 웃고 있었다.
케드릭 7세는 사령관에게 친히 직속 부대와 첩자로 길러낸 마법사까지 붙여주었다.
사령관은 남대륙 가멜에 주둔한 프리드실 공국 군대를 기습 섬멸한 경험이 있었다. 뒤늦게 뛰어든 대항해시대에서 프리드실 공국을 비롯한 여러 경쟁자들을 제치고 제국의 위세를 드높인 전적이 있는 실력자란 소리였다.
황제의 말로는 첩자로 보낸 마법사가 제국군을 위해 항구를 비워두고 외성의 경비병을 처리해 둘 것이라 했다.
어려울 것이 없는 작전이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슈테른베슈테크항을 점령한다. 외성 문은 순식간에 열릴 것이고 본성에 잠입시킨 마법사가 술에 취한 기사들을 처리한다. 본성 문을 걸어 잠근 빗장을 불태우고 나면 이번 기습은 사실상 성공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첩자를 알아챈 거지? 오늘 저녁에 들어온 연락에서까지도 백작은 기습의 기, 자도 눈치채지 못했다는데.
백작의 기사들이 쓴 철갑 투구가 성벽에 자갈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투구 밑으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형형한 시선은 술에 절어있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냉철하고 예리했다.
백작이 연 연회는 거짓이었다.
‘다 알고 있었구나.’
슈테른베슈테크 백작이 허망한 표정의 제국군을 내려다보며 시원하게 웃어젖혔다.
“적에게서 영지를 지켜내는 걸 악랄하다고 하는 놈은 또 처음 봤네.”
성 밑에서 올려다본 백작의 머리카락은 사방에서 일렁이는 횃불에 비쳐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보였다.
차가운 피가 흐르는 맹수.
그녀는 적군에게 자비가 없기로 유명했다.
사령관은 제 지시만을 기다리고 있는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엔 하나같이 절망과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승산이 없었다.
하지만 도주할 수도 없었다. 이곳에 모인 병사들은 모두 황제에게 약점이 잡힌 사람들이었으니까.
백작이 손가락을 번쩍 들어 겁에 질린 제국군 무리를 가리켰다.
“여긴 그런 백병전이 통하는 곳이 아니야. 남대륙에서 프리드실 공국을 꺾었다고 자신감이 지나치게 높아졌던 모양이야.”
“겁먹지 마라! 마녀의 혀에 현혹되지 마라! 우린 제국의 붉은 군대다, 승리하지 못하면 죽음뿐이다!”
사령관이 외쳤다.
그러나 병사들은 하나둘 성호를 긋기 시작했다. 이미 한차례 공격으로 제국군이 우수수 죽어나간 탓이다. 화살이 꽂힌 동료의 시체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병사들은 하늘을 우러르며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죽음을 예감한 것이었다.
백작이 웃어젖혔다. 성의 사람들이 뒤따라 함성을 내질렀다. 앞에는 냉혈의 사자, 뒤에는 의지를 잃은 병사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사령관은 낯이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백작의 웃음소리가 어지간히 컸는지 시아가 머무는 방까지 어슴푸레 들렸다.
시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프리드실 공국. 시아가 사는 원래 시대에선 서대륙 전쟁 도중 제국에 패해 식민지화가 진행되고 있는 곳이었다.
지금의 프리드실 공국은 어떻지? 케르딕 7세 시절의 국제 관계는 어땠더라?
그런 생각을 하며 바깥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창문을 열었을 때.
“슈테른베슈테크의 검이여, 다무스의 자손들이여!”
백작이 투구를 썼다.
“이 땅을 침범한 무뢰배들에게 사자의 포효를 보여주어라!”
그녀가 하늘을 향해 검을 빼 들었다. 기사 대장 길버트가 뒤따라 외치고, 보좌관 알렉스는 기름 묻은 화살촉에 불을 붙였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오고 뒤이어 제국군을 향해 수백 개의 불화살이 포화처럼 쏟아졌다. 불바다가 된 성문 입구에서 지옥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 운명의 수레바퀴 】
시아의 낯이 급속도로 새하얗게 질렸다.
“허억…….”
정신이 아득해지며 잊고 있던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릴 적, 요르문 님과 떠났던 씨즐턴 휴양 여행. 묵직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시트리나 대성당. 접시 같은 모자를 쓰고 온화하게 인사하는 사제들. 한가롭게 오래된 마을을 거닐며 소금에 절인 고기나 양젖 치즈, 씨즐턴산 와인 따위를 구경하고 있던 그날.
‘공습이다! 서대륙 군이야!’
투두두두두. 프로펠러의 굉음. 세찬 모터 소리. 알약 같은 폭탄들이 적 전투기의 궤적을 따라 낙하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