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연회는 끝을 모르고 무르익었다. 뱃가죽에 구멍이라도 났는지 음식을 아무리 담아도 기사들은 먹고 마시는 걸 그칠 줄을 몰랐다.
심지어 취하지도 않았다. 흥에 겨워 노래하거나 춤을 추어도 그들은 이상하게 전혀 취한 것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간혹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사람들이 있긴 있는데, 잠든 것 같진 않았다.
이거 술 맞는데. 시아는 잔에 혀를 쏙 들이밀었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심지어 독주다. 시아는 아직도 두 번째 잔을 채울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레이디 켈튼과 나머지 손님들은 피곤하면 들어가 쉬는 게 좋을 것 같네. 방은 준비해 뒀는데, 안내받고 싶으면 저쪽 집사에게 가서 물어봐.”
내가 피곤한 티를 냈었나. 아니면 누적된 피로가 얼굴에서 보인 걸까.
하지만 이런 과거를 여행해 볼 기회도 두 번 다시 없을 터였다. 영주인 백작도 그들에게 우호적이고. 이왕 케르딕 7세 시절에 떨어진 김에 이 시대의 씨즐턴을 좀 더 눈에 담아가고 싶었다.
시아가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아스타는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있기가 심심한지 단상을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그녀가 떠난 자리엔 허물처럼 벗어 던진 가운과 더블릿이 남아있었다.
기사 대장에게 가나 싶더니, 아스타는 연회장을 슬그머니 빠져나가고 없었다. 백작의 보좌관 알렉스가 그녀의 손에 종이짝처럼 끌려가고 말았다.
온통 먹고 마시는 풍경이다. 주최자의 진행도, 춤 순서를 기다리는 귀족 남녀도, 풍성한 악단도, 박자를 맞춰 홀을 울리는 경쾌한 발소리도 없다. 오페라는 당연히 없었다. 그렇다고 격식을 갖춘 만찬회도 아니었다. 마도 시대의 제국에서 길거리의 아무나 붙잡고 이게 정말로 영주의 생일 파티냐 묻는다면 미친 듯이 도리질 칠 광경이었다.
시대가 달라서 그런 건가? 사실 마도 시대의 연회도 시아에겐 그저 가까운 역사이기에 익숙한 것뿐이다. 케르딕 7세 시절을 책으로만 배웠던 시아는 활자와 전혀 다른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에 낯선 호기심을 느꼈다.
텅 빈 상석 옆에 덩그러니 남은 네 사람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라크시스가 입술을 뗐다.
“여러모로 예법과는 거리가 먼 곳이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라크시스는 그다지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마도 시대의 제국에서 건너온 사람으로서의 단순한 감상에 가까운 담백한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시아는 라크시스가 신경 쓰였다. 그의 속마음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의 고아한 외모가 슈테른베슈테크 성의 요란한 분위기를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도 시대의 제국 신사로서 상대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자리를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탓이다.
“실례하겠습니다. 로드, 레이디?”
짧은 더블릿과 브리치즈, 호즈를 갖춰 입은 남자가 정중하게 시아의 상념을 깨웠다.
“저는 슈테른베슈테크 성의 집사, 론다니입니다. 부디 론다니라 편하게 불러주십시오.”
와, 닮았다. 론다니라 스스로를 소개한 집사는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에 얽힌 괴담을 알려주던 노인의 젊었을 적 모습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노인을 닮아있었다.
그때 그 마을 어르신의 아버지는 이렇게 생겼구나. 씨즐턴이 몰락하고 백작이 악마 숭배자로 몰리며, 아버지가 고성의 집사로 일했단 이유만으로 돌을 맞던 어린아이가 떠오르고 만다.
“초면에 죄송하지만 혹시 자제분이 있으신지…….”
무의식적인 질문을 던진 시아가 스스로의 무례함에 입을 막으며 놀랐음에도 막상 질문을 받은 론다니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아이였는데, 다무스의 은총으로 얼마 전에 찾아왔지요.”
그 아들이 마을의 어르신이겠지. 론다니가 어떻게 죽음을 맞고, 남겨진 그의 아들이 어떤 인생을 살아가는지 알고 있던 시아에게 론다니의 기쁜 목소리는 예견된 비극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슬프게 닿았다.
꽁지머리를 리본으로 묶은 집사는 이 성에서 본 사람 중 가장 예법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는 시아의 급작스러운 질문에도 온화하고 절제된 표정을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었다.
“주인님께서 네 분을 방으로 안내하라고 명하셨는데, 혹 따로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론다니가 시아의 의자를 빼줄 듯 등 뒤에서 가만히 서있었다. 그 말인즉슨 얼른 일어나라는 재촉과 다름없었다. 웃으며 시아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지만, 만약 그녀가 재깍 일어나지 않으면 론다니에게 굉장한 무례를 저지르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라크시스는 시아가 머뭇거리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아쉬움이 역력히 묻어나는 저 표정을 모르고 지나친다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발코니의 용도는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쉬는 건 알아서 할 테니 연회의 즐거움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군요.”
라크시스가 말에 심지를 숨겨 대답했으나 론다니는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웃으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이 홀엔 발코니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인님의 명을 따르는 집사일 뿐이고요. 그러니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 * *
은촛대를 든 집사의 뒤로 네 사람이 나란히 걸었다.
세로로 큼직하게 난 아치형 창문엔 대리석으로 조각한 백합 문양이 있었다. 기다란 백합 그림자를 드리우며 복도를 은은하게 물들인 파란 달빛이 꼭 괴담을 확인하러 고성에 숨어들었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복원을 해놓은 탓에 생김새며 형태가 똑같았지만, 피부로 와닿는 생생한 시대감은 무시할 바가 못 되었다.
그나저나 세 갈래 백합 문양은 케르딕 7세 양식하면 흔히 떠올리는 그런 문양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시아가 창문을 쳐다보고 있었을 때였다.
“세페란테 제국의 케르딕 황제의 선물이죠. 주인님께 청혼을 하시면서 보내오신 선물 중 하나입니다.”
“케르딕 7세가 로드 슈테른베슈테크에게 청혼을 했다고요?”
제국 귀족이라고 해서 당연히 알 만한 사실이라 생각했는데, 레이디 켈튼의 반응은 정말이지 뜻밖이었다.
“…그렇습니다. 결과적으론 잘되진 않았지만요.”
“아아, 네에.”
게다가 딱히 제국을 편드는 것 같지도 않다. 그 점이 론다니로 하여금 긴장이 풀어지도록 만들고 있었다.
“에드먼드 국왕 전하께서 반대가 심하셨거든요. 놀라운 건 이자벨라 전하께서도 그 결혼을 반대하셨다는 겁니다. 저야 결과적으론 주인님이 슈테른베슈테크에 남아계시게 되었으니 좋았습니다만.”
왕비 이자벨라, 또는 이자벨라 황녀. 다무스의 현 국왕인 에드먼드 3세의 부인이자, 케르딕 7세의 여동생이었다. 제국에 언제나 강경한 정책을 펼쳤다는 에드먼드 3세가 첫눈에 반해 청혼하고, 개종까지 하도록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이자벨라 황녀는 후대에 미인으로 알려져 왔다.
론다니의 말에 따르면 이자벨라 황녀는 오라비인 케르딕 7세와 각별한 사이였다고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백작과 케르딕 7세 사이의 결혼을 극도로 반대했다고 한다.
국왕 에드먼드는 자신보다 더 정략혼을 반대하는 이자벨라를 보고 무척이나 당황했다고 한다.
놀라운 건, 이런 상황에서도 케르딕 7세 역시 타국의 왕족도 아닌 작은 섬나라 백작과의 결혼에 꽤나 진심이었다는 것이다. 론다니에 따르면 케르딕 7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슈테른베슈테크 백작에게 선물을 보내고 청혼을 했다고 한다. 백작이 거절한 선물만으로도 제국의 황궁을 한 번 더 짓고도 남을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케르딕 7세의 엄청난 애정 공세 그리고 이자벨라와 에드먼드의 극렬한 반대는 왕국과 제국 전역에서 엄청난 가십거리를 만들어냈다.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가 이자벨라 못지않은 세기의 미인이었다거나, 악마를 숭배하던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가 황제를 홀려 제국을 집어삼키려고 했다거나. 백작에게 홀린 오라비가 오죽 걱정되었으면 이자벨라 황녀가 앞장서서 결혼을 반대할 정도였다든가.
사실 애초에 청혼을 거절한 건 백작이었다.
하지만 소문은 무서운 법이라고. 안 그래도 악마 숭배자로 기록되었던 백작은 제국의 황제를 홀렸다는 이유로 후대에 결국 마녀라는 칭호로 제국 역사에 남았다.
시아는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남겨진 역사서에 따르면 케르딕 7세의 비는 아스타가 아닌, 제국 출신 귀족 캐서린 노팅엄이었다. 이 둘은 금슬도 좋아 정략혼이 일반적이었던 제국 황실 계보에서 사랑꾼 부부로 두고두고 회자되기까지 했다.
‘참 이상한 일이네.’
케르딕 7세는 왜 백작과의 결혼에 그토록 집착했을까?
케르딕 7세는 정말 백작을 사랑했던 걸까?
“이렇게 많은 손님이 한 번에 찾아오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준비가 미흡한 점은 미리 사과드립니다.”
방문 앞에 도착한 론다니가 상체를 숙이며 사과를 건넸다. 으레 하는 상투적인 인사로 들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미묘하게 뉘앙스가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손님이 한 사람만 올 줄 알았다는 것처럼. 다르게 말하면 손님이 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렸다.
“로드께선 이쪽으로, 레이디께선 절 따라 위층으로 오시면 됩니다.”
나만 그렇게 들은 걸까. 론다니와 눈을 마주친 순간, 그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육감과도 같은 본능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론다니는 그녀가 그 말뜻을 이해하고도 그냥 넘어가 주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루드윅도 요르문도 심지어 라크시스도 론다니의 말에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누님, 잘 자요.”
“요르문도 좋은 밤 되길 바라.”
그녀가 멍하니 있자 라크시스가 재촉해 왔다.
“시아.”
“알았어요. 라크도 잘 자요.”
아, 로드 젤마니도요. 시아는 건성건성 인사하며 집사를 따라 멀어져 갔다. 그런 시아의 뒷모습을 그제야 라크시스가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은촛대에 의지해 한 층을 더 오르고 나니 괴담의 근원지인 백작의 방이 있는 삼 층 복도가 나타났다. 론다니는 시아를 백작의 방 바로 옆으로 안내했다. 라크시스가 묵는 방 바로 윗방이었다.
“하녀가 상시 대기하고 있을 테니,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설렁줄을 잡아당기시면 됩니다.”
미리 기다리게 했는지 두 명의 하녀가 방문 앞에 서있다가 피곤한 기색으로 웃으며 시아를 맞이했다.
아래층에서 남자들의 방을 배정해 줄 땐 없었던 대접이었다. 시아가 레이디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을까?
중세의 느낌이 살아있는 고풍스러운 방이 그녀를 맞이했다.
다무스산 홍차만큼이나 다무스의 다기가 유명하다더니. 도자 기술이 뛰어난지 방 곳곳엔 덩굴무늬의 도자기 장식이 가득했다. 하다못해 자그마한 간이 변기까지 무늬를 새긴 도기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