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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72)화 (72/292)

72화 

분명 한 사람의 목소리인데, 지금까지 홀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왁자지껄함을 능가하는 포효가 한순간에 좌중을 압도시켰다.

수백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백작에게 향했다. 축제를 끊어내는 정적이 흘렀다.

기사들은 잔이면 잔, 고기면 고기를 든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개중에는 더러 들고 있던 손수건 따위를 맥없이 떨어뜨리는 자도 있었다.

오로지 주군의 명을 받들고, 주군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기사들은 백작의 목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아스타는 그런 기사들을 끝에서 끝까지 천천히 훑었다. 오직 그녀만을 바라보는 눈망울들은 전쟁터의 무인답지 않게 순수하고도 신뢰가 깊었다. 그런 이들의 주인으로 있는 만큼 백작 역시 그들의 삶과 피붙이를 온전히 지켜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스타의 어깨는 언제나 무거웠다.

아스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눈꺼풀 사이로 서서히 드러나는 것은 현자의 별만큼이나 이채를 띠고 있는 녹색 눈동자였다.

백작이 외쳤다.

“손님이 오셨다!”

찰나의 정적 뒤로.

“와아아아아! 주군의 손님이다아아!”

“다들 잔을 들어라아!”

우레 같은 함성과 함께 시아의 일행 머리 위로 이보다 더 시끄러울 수 없는 환호성이 쏟아져 내렸다.

* * *

“술, 할 줄 알지?”

상석에 앉은 백작이 어깨에 걸친 가운을 반쯤 벗으며 잔을 내밀었다. 풍성한 어깨 장식의 가운은 케르딕 7세 시절에 유행하던 제국 상류층의 복식과 닮아있었다.

다만 그 옷을 너무나도 대충 입고 있어 아스타는 백작령을 다스리는 냉혈의 사자가 아니라 방탕한 귀족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그녀에게선 무시할 수 없는 권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게 지배자라는 걸까.

시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백작이 주는 잔을 받아 들었다.

“로드 슈테른베슈테크께서 주시는 잔인데요. 영광입니다, 로드. 감사히 받겠습니다.”

동그래진 눈으로 시아를 쳐다본 백작이 또다시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 사회생활로 다져진 시아의 생존법이 신기하게 느껴졌던 탓이었다.

높다란 단상 위로 우뚝 올라선 권좌에서 내려다본 부하들은 백작이 있거나 말거나 저들끼리 연회를 즐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에 비해 제 옆에 앉은 시아 켈튼은 윗사람의 눈치를 상당히 살피는 편이었다.

분명 아까 본인을 로드 켈튼의 친척이라 소개했었지. 아스타는 지금까지 마주했던 수많은 제국인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제국 귀족치곤 정말로 특이한 사람이었다.

“난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아. 정말이야. 총칼 드는 기사들 중에서도 술 냄새만 맡으면 얼굴 벌게져서 자는 놈들이 있지. 싫으면 거절해도 돼. 믿기지 않으면 렉시에게 물어보든가.”

백작의 상석이 있는 널따란 단상 옆으론 시아 일행을 위한 간이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풍성하다 못해 음식이 흘러넘칠 지경인 테이블 맞은편엔 아까 시아 일행을 감옥에 가뒀던 적갈색 머리 남자, 알렉스가 서있었다.

“그렇지, 렉시?”

알렉스는 손에 든 유리잔을 말없이 홀짝일 뿐이었다.

“어라, 왜 대답이 없어?”

“맨날 술 상대를 해달라 하시다 절 술독에 빠뜨리신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제가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까요?”

알렉스가 잔으로 입을 가리곤 백작을 외면했다. 아스타는 기가 막혔다. 술 같이 먹어달라 할 때 냉큼 따라 나온 게 누군데 그래?

“보좌관이라고 있는 게 하여간 도움이 안 돼, 도움이. 너 때문에 레이디 켈튼이 겁을 먹잖니?”

“레이디 켈튼, 주군의 말을 믿지 마세요. 내일 아침 복도에서 눈을 뜰지도 모르니까요.”

알렉스가 실실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하, 네에. 아까까지만 해도 감옥에서 살벌하게 대치하던 사람에게 시아가 할 수 있는 반응은 시선을 피하며 술을 기울이는 것뿐이었다.

“주군! 아니, 주군 혼자서만 재미 보고 있었슴까? 손님들을 소개만 덜렁하시고 이렇게 독차지하는 법이 있슴까?”

기사 대장이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섰다. 옷을 갖춰 입은 것도, 그렇다고 기사답게 판금 갑옷을 입은 것도 아닌 언더튜닉과 바지 차림에 라크시스가 한쪽 눈썹을 슬쩍 밀어 올렸다. 저건 잠옷이나 다름없는 차림이다. 그런 부하를 가만히 두는 상관 역시 정상적인 연회 주최자의 차림은 아니었다.

아스타가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기사 대장이 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의 의미였다.

“아가씨는 어디서 오셨을까? 아, 참. 제국인들은 레이디라고 하던가?”

굳은살이 가득 박힌 거친 손이 그녀의 코앞에 있었다. 시아가 움찔 머뭇거렸다. 기사 대장은 제 손이 더러워 그러는 줄 알고 손수건을 꺼내 언제 묻었는지도 모를 기름들을 닦아냈지만.

시아의 속사정은 달랐다. 시간 여행을 시작한 후로 과거의 사람이 그녀에게 악수를 청한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시아가 ‘레이디’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엔 더더욱 그녀에게 손 대신 팔을 내민다. 그건 인사가 아닌 에스코트의 의미였다.

“너무 더럽소? 손님에게 예의가 아닌가. 그럼 내 금방 씻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쇼.”

기사 대장이 민망한 듯 손을 물리려 했다. 시아는 도망치려는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아니에요. 그보다 기사님 소개를 해줄 수 있을까요?”

“슈테른베슈테크령의 기사 대장 길버트 폰데라고 하오. 저쪽의 보좌관과 삼촌 조카 사이이지. 아가씨는 뭐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기사 대장의 손을 짧게 붙잡았다 놓은 자리에 여운이 남았다.

시아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냥 미스 켈튼이라고 불러주세요.”

“하지만 주군께선 레이디 켈튼이라고 부르던데. 그것도 부르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나?”

“크게 차이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럼 레이디 켈튼이라 불러주세요.”

그 후론 끝없는 축제의 연속이었다.

술이 끊이지 않고 주방의 고기 창고가 동나기 시작했다.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부어라 마셔라 트로피 같은 잔을 입으로 가져다 댔으나 기사들은 취하지도 않는지 춤을 추고 뱃사람의 노래를 불렀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연회를 열었는가. 놀랍게도 오늘은 백작의 생일이라고 했다.

성대하고 격식 있게 열려야 할 연회치곤 그 흔한 무도회나 만찬이 없었다. 옛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시아에게도 영 이상한 연회였다. 대화에 오가는 주제 역시 영 이상한 것들이었다.

궁금해서 물어보니 몇 달 전 제국군과의 교전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단다. 백작이 그동안 바빴던 탓에 승전 기념 연회가 열리지 못했던 것이다.

영주의 생일은 영지민의 축제 날과도 같았다. 제국에서 밀반입된 샤샤리아가 다무스를 좀먹기 시작한 이래 점점 국고가 바닥나는 상황이었다. 백작은 귀족들을 불러 성대한 생일 연회를 할 자금으로 영지민에게 술과 고기를 보내고 저와 함께 전장을 누볐던 기사들을 위로할 승전 연회를 열기로 결심했다.

“역시 주군이셔. 안 그래?”

“제국 놈들 군함 포신이 시든 거시기처럼 푹 고꾸라졌다니까! 쇠구슬을 바다에 처박고 허무해하는 표정이 얼마나 웃기던지!”

오래 전 씨즐턴의 해군력이 백작에게서 나온 거구나. 시아는 기사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몇 달 전의 교전 상황을 짐작했다.

백작은 정말 강한 실력을 지닌 마법사였다. 괜히 대륙 본토와 가장 가까운 변방 요새에 있는 게 아니라고 할 만큼.

그녀의 손짓 하나에 제국 전열함의 돛이 불타고 대포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기사들은 해적처럼 제국 전열함에 올라타 백병전을 벌이고 능숙하게 배를 빼앗았다. 그렇게 빼앗은 배와 항복한 함장, 승조원은 그대로 슈테른베슈테크 영지의 재산이 되었다.

기사가… 맞는 거지? 적함에 붙은 불을 적군과 함께 끄다가 수염이 그을렸다며 껄껄 웃는 남자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기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시기의 범선은 목조로 제작되었습니다. 배 한 척을 만드는 데에 드는 나무가 상상을 초월하죠.”

이젠 시아가 갸웃거리는 표정만 봐도 뭘 궁금해하는지 훤히 들여다보게 된 라크시스가 말했다.

“그래서 적함의 불을 같이 꺼줬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불에 취약한 목조 특성상 아군의 전열함에 옮겨붙거나 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적함을 온전히 차지하면 해군은 그 비싼 배를 거저 얻게 되는 셈이니까요.”

시아의 의문을 해결해 주는 건 그녀에게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라크시스 본인에게도 상당한 이점을 가져다준다. 라크시스는 워낙에 다방면으로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었고 이를 소재로 대화하는 걸 즐기는 편이었다.

“전쟁이란 죽고 죽이는 상황의 반복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칠십 년 후의 전쟁이란 그런 건가 보죠?”

“그렇다면 여긴 안 그런가요?”

“당신이 마도 시대라 칭하는 시대엔 조금 더 잔인해지지만. 이 시대에서 전쟁이란 소수의 싸움에 가깝습니다. 병사들이 서로를 향해 총검을 겨누고 영주를 굴복시키게 되면 끝인 겁니다. 전쟁터와 떨어져 있는 한적한 영지에선 전쟁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있을 테니까요.”

게다가 시아가 궁금해하는 것들은 대부분 칠십 년이라는 시간의 격차가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녀의 질문에 답을 해줌으로써 미래의 상황을 예상해 보는 것도 라크시스에겐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었다.

섬세하게 세공한 유리알처럼 반짝거리는 두 개의 자줏빛 눈동자를 마주하는 만족감은 덤이었다.

“무고하게 죽는 사람들이 적다는 점에선 훨씬 낫네요.”

“시아 당신이라면 어떤 전쟁이든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건 그렇죠. 사람을 쏘는 건 쉬워도 치료하는 건 어렵거든요. 하지만 3587년의 전쟁은 소총보다 잔인한 무기로 이루어져 있어서.”

전투기에서 떨어지는 폭격이라든가 유독가스라든가 그런 것들 말이에요. 그런 무기들은 민간인과 군인을 구분하지 않거든요.

시아가 슬프게 웃었다. 라크시스가 가만히 대답했다.

“…배를 타는 사람들은 배의 운명이 목숨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죠. 배가 불타 없어지면 그대로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니. 그래서 본능적으로 배에 불이 붙으면 끄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전투며 아군 적군을 가리는 것 이전에 당장 생존 문제와 직결되니까요. 서로를 구해주는 것도 뱃사람들만의 공감대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시아는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라크시스 역시 굳이 그녀에게 더 말을 걸진 않았다.

이토록 생기 있는 삶이 느껴지는 곳에서 우울감에 빠져들고 싶진 않았다. 시아는 잔에 남은 술을 입 안으로 모조리 털어 넣었다.

입맛이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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