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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71)화 (71/292)

71화 

“그렇게 말해놓고 칠십 년 후로 잠적해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을 어떻게 믿죠?”

“날 믿어보는 것밖에 방법이 더 있나요?”

“그 말도 맞군요. 그럼 기대하겠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기대한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그녀가 앞으로 그 빚을 갚기 위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는 것처럼.

그리고 그는 이곳에 요르문과 루드윅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얼굴이 벌게진 루드윅은 이미 경악하여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바보들 아냐? 기껏 탈출했으면 성 밖으로 나가기나 할 것이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돌벽에 메아리쳤다. 어디에 있어도 이목이 집중될 것 같은 소리에 시아를 비롯한 네 사람의 시선이 단번에 쏠렸다.

황갈색 머리카락이 미처 사라지지 못한 바람에 휘날리며 가라앉았다.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 백작이었다.

‘라크시스가 말했던 손님이 백작이었구나.’

아스타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녀는 감옥을 탈출한 네 명의 죄수를 보고도 그들을 포박하거나 도로 감옥에 넣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다만 헐렁한 더블릿의 소매를 걷어붙이며 비뚜름히 벽에 기대 그들을 재미있다는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같은 제국인 아냐?”

그녀가 바닥에 기절한 남자를 발로 툭툭 쳤다. 요르문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동향이라고 해도 이놈이랑 같은 사람 취급은 안 했으면 하는데.”

와하하하! 백작이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어찌나 시원스레 웃는지 백작이 아니라 한탕 하는 데 성공한 해적의 우두머리 같아 보였다. 사자는 사자인데 이렇게 보니 냉혈의 사자는 아닌 것 같다. 악마 숭배자는 더더욱 아닌 것 같고.

백작이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마침내 웃기를 멈추었을 때, 라크시스가 그녀와 완전히 정반대의 귀족적인 걸음걸이로 백작의 앞에 나와 섰다.

“로드 슈테른베슈테크.”

“로드? 그거참 어색한 말이네.”

로드는 귀족을 가리키는 제국식 호칭이었다. 아스타가 조용히 웃으며 다리를 느슨하게 꼬았다.

“당신은 이 감옥으로 우릴 가둘 수 없음을 알고 있었을 텐데.”

“하하, 재미있어.”

라크시스가 가만히 손가락을 들어 횃불을 가리켰다. 그러자 아까부터 날리던 불티들이 불가항력의 힘에 끌려오듯 속수무책으로 라크시스의 손가락 끝에 모여들었다. 자세히 본 불티에선 와글와글거리는 소리가 났다. 시아는 그중 하나가 조그마한 사람 형상으로 변해 발을 구르며 화를 내는 걸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불티는 바로 아스타가 부리는 정령이었다.

“당신도 원하는 게 있으니 우리를 지켜보았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백작은 대답 없이 팔짱을 끼며 콧소리를 냈다. 라크시스는 미미하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마약상을 당장 뿌리 뽑는 건 무리입니다. 놈에게 위치 추적기를 달아놓았으니 백작께서 일부러 놓친 듯 놈을 풀어주었으면 좋겠군요. 제국으로 도망친 놈이 명령을 내린 상급자에게 가도록 말입니다.”

내가 친히 그 상부를 줄줄이 묶어 다무스로 대령하도록 할 테니. 라크시스가 말을 마치자 백작이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너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야? 이렇게 약 팔러 오는 제국인이 지금까지 한둘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조직을 들쑤셔 놓으면 네 목은 괜찮고?”

“대신 이쪽도 원하는 게 있습니다.”

백작은 그녀의 질문을 막아버리는 패기에 살짝 놀란 듯 보였다. 불쾌하다기보단 신기하고 놀라운, 그래서 호기심까지 비치는 녹색 눈동자가 이채를 띠고 은발의 마법사에게 향했다.

“뭔데?”

“현자의 별.”

내내 올라가 있던 백작의 입꼬리가 처음으로 굳었다. 그녀는 웃고 있던 얼굴 그대로 입가에 힘을 준 채 라크시스를 꿰뚫듯 응시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침묵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시선과 시선이 맹렬히 맞부딪힌다. 그 사이에 사람이 있었다면 그들의 눈싸움만으로도 당장 몸에 구멍이 날 것만 같았다.

폭풍전야와도 같은 분위기에 시아와 요르문은 짐작할 수 있었다. 백골이 된 백작이 들고 있었던 나무 상자엔 광룡의 봉인, 즉 현자의 별이 있었을 터. 그리고 그 현자의 별이라는 건 제국이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 노려왔을 만큼 대단히 귀중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 물건(아마도 광룡의 봉인)일 테다.

라크시스를 보는 백작의 시선은 뭐랄까, 마치 현장에서 들킨 산업 스파이를 보는 것 같았다.

라크시스가 침착하게 말했다.

“가져가겠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걸 구경할 수 있게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사실 그 말은 거짓이었다. 광룡의 봉인을 찾고 나면 카얄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이쪽에서 숨겨둘 예정이었다. 라크시스의 마법이라면 추격해 올 백작을 피해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을 테니, 시간 여행이 끝날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봉인을 가지고 3518년으로 돌아가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걸까. 문득 의문이 들었다.

카얄이 고성에서 벌어지는 액자식 시간 여행을 모르고 있다면. 봉인이 3518년이 아닌 3300년 경 말에 숨어있다는 걸 카얄이 영영 알아채지 못한다면.

아예 다른 시간대에 숨어버린 봉인이야말로 어쩌면 정말 안전한 게 아닐까?

그때였다.

누군가의 굶주린 위장이 허허로운 지하에서 크게 요동쳤다.

“아, 하하……. 죄송합니다.”

라크시스와 아스타의 시선이 동시에 루드윅을 향했다. 하, 심각한 분위기였는데. 루드윅은 어쩔 줄을 모르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를 한참 동안 빤히 응시하던 백작이 말했다.

“다들 배고프지 않아?”

루드윅을 포함한 네 사람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도대체 언제부터였는지 딱딱하게 굳어있던 백작의 얼굴이 풀려있었다.

아스타가 미소 지었다.

“따라와. 배를 채워줄 테니.”

배를 채워준다고? 처음 봤을 땐 모가지를 딴다느니 뭐니 하지 않았어? 방금까지만 해도 눈빛으로 사람 죽일 것처럼 라크시스를 쳐다봤는데?

시아가 얼떨떨하게 백작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미 지하 감옥에서 나가는 계단을 반쯤 올라 있었다.

아치형의 문이 열리자 온기가 도는 연회장의 빛이 어두운 지하로 쏟아져 내렸다. 역광을 받은 아스타의 풍성한 곱슬머리가 황금빛으로 물든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시아 일행을 내려다본다. 게다가 제 성에 침입한 사람들에게 심지어 호쾌하게 식사를 제안하기까지 한다. 아스타는 정말로 사자라는 별칭이 어울리는 군주였다.

“뭐 해? 안 따라 나오고?”

아스타가 즐거이 웃었다.

* * *

그녀를 뒤따라 올라간 지상에는 정말이지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할멈! 여기 고기가 다 떨어졌다니까!”

“아이고, 이 나리님아. 이 노인네 팔 떨어져라 요리하는 거 안 보이냐? 암만 기사 대장이래도 노인 공경은 해야 하는겨!”

“내가 할멈 잔소리 듣는 재미에 살지. 이리 줘봐. 옮기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넓은 대리석 기둥이 촘촘한 목재 대들보를 받치고 선 중세 고성의 홀은 아르카나 광장만큼이나 광활하기 그지없었다. 낮이었으면 오색찬란한 빛을 쏟아냈을 스테인드글라스는 홀을 밝힌 수백 개의 밀랍 촛대를 비추며 은은한 노란빛을 반사해 댔다.

홀에는 사람이 바글거렸다. 열차처럼 길쭉한 테이블 위로 뜨끈한 고기 기름내가 가득하다. 사자의 휘장이 길게 드리운 단상 아래로 자갈이 움직이는 것처럼 무수히 많은 머리통이 와글와글거렸다. 주인을 닮아 성정이 거침없는 기사들이 승전의 열기에 취해 횃불만큼이나 뜨거운 기쁨을 마구 토해냈다.

언더튜닉 차림의 우락부락한 덩치가 거대한 고기 접시를 들고 고함을 쳤다. 시아는 날 것 그대로의 축제 현장에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더 먹고 싶은 사람 없냐?”

“대쟝니이임! 그런 건 저희를 시키시지 그러셨어요?”

“얀마, 술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자식에게 어떻게 이 귀한 고기를 들어 나르라고 하겠냐.”

“대장님! 저도 다리 하나 뜯어주십셔!”

“네 건 네가 갖다 먹어라. 참 나, 부하라는 놈들이 어떻게 한 사람도 대장한테 먼저 와서 드셔보십쇼, 소리를 안 하냐?”

하얀 두건을 늘어뜨린 노파가 기사 대장의 옆을 지나며 끌끌 핀잔을 주었다.

“부하가 이러니 대장도 이러지. 앞으론 노인네만 남은 주방에 닦달하기만 해봐. 주인님께 당장 일러바칠 테니까.”

“아이, 할멈. 내가 다 잘못했어. 주군껜 말씀드리지 말자. 응? 내가 앞으로 잘 도와주고 할게, 응?”

“홀홀. 내 밤새 연무장을 돌게 해주지. 배 속에 거지가 든 시커먼 사내놈들 먹여 살리느라 뼈가 다 휘었다고 말야.”

시큼한 땀 냄새와 돼지기름 냄새가 고성의 유서 깊은 홀에 가득 찼다.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까지 냄새가 배어버린 것 같았다.

“제국인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지?”

아스타는 그녀의 부하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시끌벅적한 기사들에게서 시아에게로 옮겨왔다.

백작이 가두었던 여자는 검붉은 머리를 아무 장식 없이 풀어 헤치고 있었다. 바다 건너의 제국보다, 심지어 다무스 본성보다 훨씬 격의 없는 곳이 이곳 슈테른베슈테크 영지라지만 여자는 아스타의 기준보다도 훨씬 더 자유분방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실크인지 면인지 구분할 수 없는 바지를 입고, 가슴 중앙을 따라 장식이라곤 하나도 없는 단추가 달린 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모직이 분명한데 재단 방식이 전혀 다른 외투가 수도사의 옷처럼 무늬 없이 짙기만 했다.

그 곁의 마법사들도 다무스에 찾아오는 흔한 제국 귀족들과는 다른 복식을 하고 있었지만. 아스타는 공작새처럼 꾸미길 좋아하는 제국인들과 전혀 다른 느낌의 시아에게서 단순히 국경과 국적을 넘어선 이질감을 받았다.

그 이질감이 아스타에게 기묘한 안도와 충족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번엔 다르다.

‘네 운명을 움직일 이방인이 불현듯 찾아오리니. 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로다.’

시아 켈튼.

그녀의 자줏빛 눈망울을 마주하는 순간 아스타는 멈춰있던 시곗바늘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아스타는 눈썹을 까딱이며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레이디 켈튼 당신도 꽤 제국인답지 않지만 말이야.”

검붉은 머리 여자가 당황스러운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감췄다. 그러고 보니 감옥에 넣을 때 압수했던 가방을 그녀가 들고 있었다.

마법이겠지. 공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차원의 마법. 아스타는 굳이 시아가 들고 있는 가방을 지적하지 않았다.

백작은 이윽고 홀을 향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주모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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