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누님, 보내주죠. 손이 저렇게 되도록 살려달라고 했으니.”
요르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일어났다. 연기가 어떻게 저리 자연스러울까.
새삼 그가 나와 같은 편이라는 게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첫 번째 시간 여행 때, 요르문의 연구실에서 실험체 취급을 받으며 뜨겁게 달궈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가 누님, 누님거리며 자신의 뒤를 쫓아다니는 지금이 훨씬 나았다.
“모르간 대교구에서 파견된 사제라 했지? 그렇다면 안전하게 모르간 대성당으로 보내주도록 하지.”
“그,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네. 배에서 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사양하지 마. 대마법사의 워프를 몸소 겪어볼 기회가 얼마나 되겠어?”
“아니야, 제발. 항구까지만 데려다주게.”
“백작이 그렇게 위험한 사람이라면 항구에 있는 배를 가만히 뒀겠어? 당신이 타고 온 배도 지금쯤이면 무사하지 않을걸.”
남자의 얼굴이 손바닥에 화상을 입을 때보다 더 파리하게 질렸다.
“아, 안 돼……. 배가, 설마, 아니야……. 백작이 가져갔다면 그게 대체 얼마어치…….”
요르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시아는 흠칫 놀랐다. 요르문이 위험해 보이긴 또 처음이다.
지금 보니 루드윅은 잔뜩 얼어있었다. 그도 요르문을 보며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사냥감을 은밀하게 옥죄어오는 덫처럼 요르문은 자연스럽게 남자를 몰아가고 있었다.
“얼마어친데?”
“오천 파운드야, 자그마치 은화가 오천 파운드…….”
“허, 오천 파운드가 넘는 은을 언제 백작이 공격할지 모르는 바다에서 그렇게 대놓고 실어날랐다고?”
“멍청한 새끼, 누가 은을 그렇게 날라? 당연히 윌리길리지. 그게 몇만 인분인데. 수십 박스가……. 잠깐, 너 이 새끼, 지금 날 속인 거야?”
“속이긴 누가 속여. 혼자서 다 불어놓고. 안 그래요, 누님?”
하하, 시아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지금 누가 봐도 요르문이 나쁜 놈이고, 손바닥이 홀랑 벗겨져 묶여있는 남자가 피해자처럼 보이는데.
윌리길리는 샤샤리아의 은어였다. 내러 지구의 음습한 뒷골목을 제집처럼 다니던 라크시스와 요르문은 윌리길리라는 말에 단박에 상황을 파악했다.
“백작이 왜 네놈을 가뒀는지 알겠어. 어떤 영주가 제 영지에서 가짜 사제 노릇을 하면서 약을 팔아재끼는 놈을 가만히 둬?”
수상한 사제의 정체는 샤샤리아 상인이었다. 물건이 물건이니만큼 샤샤리아를 중간에서 유통하는 자들은 대부분 범죄 조직과 연루되어 있었다.
어쩐지 사제치곤 영 세속적이더라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요르문은 처음 남자를 만났을 때, 사제라는 그의 말을 믿을 뻔했던 것을 떠올렸다. 교리에도 꽤나 통달해 있고 말끝마다 신을 찾는 걸 생각하면 진짜 사제처럼 보이기 위해 훈련이라도 받았던 모양이었다.
“한낱 갱단이 타국까지 와서 이런 짓을 할 리는 없을 테고. 누가 시켰어?”
“누가 시켰든 네 알 바야? 네가 짭새라도 돼? 제기랄, 돈을 얼마를 준다고 해도 이 따위 의뢰를 받는 게 아니었는데.”
남자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듯 본모습을 드러냈다.
불쌍한 사제 역할을 벗어던진 남자가 부둣가의 갱단이 쓸 법한 비속어를 씹어뱉으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순식간에 시아를 낚아챘다.
“……!”
도대체 어디에다 숨겨뒀었는지 그가 수도복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화상의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남자가 시아의 목덜미에 칼을 들이밀었다.
서늘한 칼날이 피부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에게서 위험한 악취가 풍겼다. 코 속까지 썩은 진물 냄새가 들어차 후각이 마비가 될 것만 같다. 본능적으로 몸이 떨렸다. 솔직히 이 상황이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됐고, 갱단 흰토끼발 알지? 얼마 전에 에이즈번 항구에서 있었던 살인 사건 말야. 그거 우리가 한 거야. 그러니까 거기 마법사, 좋은 말 할 때 날 데리고 나가는 게 좋을 거다. 예쁘장한 네놈 애인 얼굴에 칼자국 나는 게 싫으면.”
그럼에도 시아는 비명을 지르거나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요르문과 라크시스의 표정이 지나치게 침착했기 때문이었다.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시원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시원하다 못해 약 오를 지경으로 한참을 웃어젖힌다. 네 쌍의 눈이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요르문이었다.
“웃어? 이 새끼, 이게 지금 장난으로 보여? 내가 못 할 줄 알고? 엉? 당장 이년 목을 내가 따버릴 수도 있어!”
“와, 이거 봐라. 내가 그러라고 손목 풀어준 줄 알아? 은혜도 모르는 놈이네. 지금 누가 아쉬운 상황인지 아직도 모르나 봐.”
요르문이 이죽거렸다.
그사이 라크시스가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그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시아를 붙들어 맨 남자의 팔이 달달 떨리며 무형의 힘에 억지로 벌려지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남자의 팔이 라크시스의 마법을 이기지 못하고 경련을 일으켰다. 쇠가 우그러지는 것처럼 남자의 양팔이 기괴하게 비틀렸다. 그의 손에서 진물 범벅이 된 단도가 툭 떨어졌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라크시스가 지팡이의 끝으로 남자의 가슴팍을 툭 밀었다.
“끄으으아아아악!”
남자는 괴성을 지르며 그대로 허물어졌다. 불규칙한 호흡으로 헐떡이며 바닥을 굴렀다. 창살을 잡았을 때보다 더 고통스러워 보였다.
“누님, 가죠.”
요르문이 환하게 웃으며 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멍하니 있던 시아는 그제야 발을 뗐다.
“…아, 응.”
“많이 놀라셨죠? 이런, 누님의 옷이 너무 더러워졌는데.”
당장 갈아입기도 그러니 마법이라도 걸어드릴게요. 아냐,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제가 신경 쓰여서 그래요. 시아와 요르문이 서로 사양하는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횃불 주위를 맴돌던 날벌레 같은 불티가 바람결에 날려 빙그르르 돌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까부터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라크시스는 요르문이 시아를 챙기는 동안 그 불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곳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지하 감옥이었다. 감옥의 복도를 걷다가 시아와 자리를 바꾼 건 그녀를 위해서였기도 하지만, 그가 횃불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요르문.”
“왜.”
“손님이 올 것 같군.”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이 기다란 복도를 관통했다. 퀴퀴한 지하실 냄새에 가느다랗게 섞여든 훈내와 바다 내음이 라크시스와 요르문을 거쳐 시아에게도 닿았다.
지하 감옥 바깥의 공기. 시아는 그간 쌓인 눈치로 그녀의 뺨을 간질이는 서늘한 바람이 이동 스크롤을 쓸 때 고이는 바람과 같은 성질임을 알았다.
“때마침 선물도 준비되었으니 대화를 시도해 봐야겠군그래.”
그의 시선 끝엔 가슴을 부여잡은 채 기절한 남자가 있었다.
라크시스는 흐음, 하는 콧소리를 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빳빳하게 펴댄 코트의 깃 위로 내려앉은 먼지 한 점을 손가락으로 무심히 쓸어낸 후, 고급스러운 실크햇을 우아하게 머리에 얹는다.
자칭 갱단 흰토끼발이라는 남자에게 고통을 주입할 때 썼던 지팡이가 더 이상 흉기로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신사의 모습을 갖춘 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액세서리. 금장이 둘러진 짙은 나무 지팡이가 세월을 증명하듯 손잡이 위로 반지레한 윤을 빛냈다.
라크시스의 시선이 시아의 목덜미에 닿았다.
“이런, 요르문이 돌봐준 줄 알았는데.”
“아, 그게…….”
“가만히 있어요. 내가 해줄 테니까.”
섬세하고도 서늘한 손길이 인간에게 있어 가장 여린, 몇 안 되는 부위에 닿았다. 음습한 지하에서 한참 동안 냉각되었던 시아의 목덜미가 움찔거렸다.
가짜 사제의 협박으로 인해 칼날에 긁힌 상처였다. 검댕이라도 닦아주는 건가 싶었는데 라크시스의 손이 닿으니 따끔한 감각이 솟아오르며 점막이 외부 자극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느낌이 났다. 시아는 뒤늦게 아까의 인질극으로 생채기가 났음을 알아차렸다.
목덜미가 뜨거웠다. 맥박이 지나치게 빨리 뛰고 있었다.
그가 제 목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시아는 그의 시야를 가릴까 턱을 들지도 내리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이 정도는 생채기라 금방 나아요.”
“오염된 칼날, 비위생적인 점액, 외부 환경에 의한 감염. 당신이 치료를 할 때 가장 걱정하는 요소였던 것 같은데.”
그의 입술 새로 나온 숨결이 단어마다 깃털이 되어 그녀의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것만 같았다.
귀한 보물을 닦아내는 고고학자처럼 그의 엄지손가락이 상처를 조심스레 쓸었다. 궤적이 남은 자리에 홧홧한 기운이 감돌다가 이내 아릿하도록 시원한 감각이 차올랐다. 시아는 그것이 씨즐턴행 열차에서 라크시스가 제게 행했던 치유술과 같은 마법임을 깨달았다.
“됐습니다.”
“…고마워요.”
“빚이 또 생겼군요.”
라크시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멀어졌다. 이유도 모르고 압박되었던 숨이 그제야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간격으로 텅 비어버린 곳에 뒤늦게 이성이 돌아와 자리를 채웠다.
빚. 그에게서 얼마 만에 들어보는 소리인가.
아르카나의 미도리 셰프 식당에서 은근슬쩍 결제를 해놓고 다음을 기약하던 그때.
시아가 뾰로통하게 물었다.
“아직도 그 빚 타령이에요?”
“당연하죠. 비스크화 때문에 로드 젤마니에게 들킨 걸 보니 당신이 제게 빚을 갚을 날은 점점 요원해지는 것 같지만.”
라크시스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이상하게 머리에 열이 올랐다. 약이 오른다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었다. 어차피 저 남잔 제게 돈을 받을 생각이 없을 것이다. 발끝에 채는 게 금이요, 부동산일 테니까.
원래 시대의 화폐를 더는 사용해선 안 된다고 진작 결심했었다. 라크시스나 요르문에게 지금까지 신세를 진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신세를 질 예정이었다. 우리는 봉인의 파괴를 막기 위해 한배를 탄 입장이었으니까.
루드윅에게 미래 화폐를 들켜 정체가 탄로 났을 때, 앞으로 마도 시대에서 발생하는 모든 금전 문제는 전적으로 요르문과 라크시스이 해결해야 한다는 걸, 두 사람도 깨달았을 터였다.
물론 그에 대한 암묵적 합의는 지금보다 훨씬 이전에 진작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라크시스가 저렇게 신경을 살살 긁으며 능글맞게 굴자 괜히 부아가 슬금슬금 돋았다.
마치 마음에 빚을 지우려는 사람처럼. 빚을 갚을 때까진 그녀에게 계속 달라붙어 있을 것만 같아서.
농담 반, 진담 반.
시아는 입을 앙다물고 단단히 일렀다.
“언젠간 갚을 거예요,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