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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66)화 (66/292)

66화 

“이러면 안 되는데. 복원할 거면 제대로 했어야지. 이건 뭐 조각난 석상을 시멘트로 메워놓은 거랑 뭐가 달라.”

씨즐턴의 역사가 담긴 고성의 안타까운 현실을 본 고고학자가 조용히 분노했다. 하지만 나머지 세 사람은 루드윅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비 온 뒤 물웅덩이 위에 번진 기름 막처럼 무지갯빛이 너울거린다. 불안정한 마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시아의 외투 주머니와 요르문의 허리춤에서 맹렬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옷감을 뚫고 마류 탐지기의 흰 빛이 솟아 나왔다.

시아가 루드윅을 불러세웠다.

“로드 젤마니.”

“네?”

그도 어지간히 둔한 사람인 모양이다. 시아도 마법사는 아니지만 이런 꽉 막힌 공기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곧 볼 수 있을 거예요.”

루드윅은 그제야 시아와 라크시스, 요르문이 몸을 낮추고 방어 자세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바보같이 되물었다.

“뭐, 뭐를요?”

그 순간 바닥이 지진이 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아는 말했다.

“당신이 보고 싶어 했던 삼 층 복도 끝 방이요.”

크고 작은 돌조각들이 진동을 견디지 못하고 천장에서 떨어져 내렸다. 오래된 먼지가 뽀얗게 풍기며 구름을 만들어낸다. 벽돌과 벽돌이 맞부딪히는 거친 마찰음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케이틀린, 물러서요.”

라크시스가 시아의 앞을 팔을 들어 가로막았다. 다른 한 손엔 언제 나타났는지 지팡이를 쥐고 있다.

텅 빈 벽 가운데에서 벽돌 하나가 튀어나왔다. 바로 옆 벽돌이 뒤따라 튀어나오자 위, 아래의 벽돌이 바깥으로 돈다. 그 옆의 벽돌, 그리고 다음 벽돌. 뱀의 비늘처럼 꿈틀거리는 수백 개의 벽돌이 연쇄적으로 바깥으로 밀려나면서 삼 층 전체를 뒤흔들었다. 벽돌이 사라진 공간으로 거대한 문의 실루엣이 서서히 솟아올랐다.

두꺼운 장식 기둥과 아치형 석조 지붕이 지옥의 입구처럼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기나긴 탈피를 끝내고 완전한 형태를 드러낸 문은 마침내 움직임을 멈췄다.

슈테른베슈테크의 주인.

백작의 방.

사자 문양이 음각된 문이 방의 정체를 말해주고 있었다.

“…진짜로 삼 층 복도 끝 방이 있었어.”

루드윅은 뚝뚝 끊기는 걸음으로 홀린 듯이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손이 사자 조각 입에 물린 둥근 철제 문고리를 더듬더듬 쥐었다.

라크시스가 경고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라크시스는 여전히 지팡이의 끝을 문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마류 탐지기는 한참을 진동하다가 문이 드러난 후 잠잠해진 상태였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루드윅이 먼저 문틈을 벌리고 몸을 조심스레 비껴 넣었다.

“우리도 따라가 봐요.”

마류 이상 현상이 사라졌잖아요? 시아의 말에 요르문과 라크시스는 뒤늦게 시야를 가득 메우던 무지갯빛 마력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뜻밖의 상황에 긴장을 잔뜩 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세 사람은 루드윅을 뒤따랐다. 라크시스가 만지기 싫다는 듯 지팡이로 문을 비집고 열었다.

문을 넘어가자마자 그들을 반긴 건 스산하고도 쓸쓸한 어둠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먼지 밟히는 소리가 났다. 낡고 오래된 냄새가 비강을 가득 채우고 이내 눈알까지 아려올 즈음, 앞서간 루드윅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가 멈춰 선 건 드넓은 방의 한복판, 한때 윤기가 흘렀을 마호가니 책상 앞이었다.

“진짜 백작의 방이었나 보군요.”

루드윅이 세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말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

새하얀 끝이 보인다. 더는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는 명백한 죽음의 증거.

조각난 백골.

최후의 순간이 얼마나 절박하고 비참했는지를 보여주듯이 백골은 창에 꿰뚫린 채 작은 상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백작은 악마 숭배자라 불렸다 했지. 설마 종교재판이라도 받은 걸까.

시아는 입을 틀어막았다.

라크시스는 백골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가 지팡이를 놓고 거침없이 백골에 손을 뻗었다. 방에 들어올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먼지 쌓인 백골이 껄끄러울 법도 한데 라크시스는 마치 망자에게 예를 갖추는 것처럼 정중하면서도 확고한 손길로 백골이 안고 있던 상자를 빼냈다.

“봉인은 여기에 있었겠군요.”

있었겠군요? 그럼 지금은? 시아는 라크시스의 어깨 너머로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평범한 보석함처럼 보이는 상자 안쪽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기하학적 문양이 있었다.

“저 백골이 정말 백작이라면 말이야. 정말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였겠어.”

요르문이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인어의 눈물이라 불렸던 불안정한 광룡의 봉인을 보관할 때 자신이 만들었던 보관함과 흡사한 수준의 마법이 걸려있다고 했다.

“마류 이상 현상이 일어난 것치곤 허무한 결말이군요.”

라크시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봉인은…….”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봉인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시아는 당황했다.

광룡의 봉인이 없어진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애초에 마류 이상 현상이 감지되지 않았으면 모를까. 나 여기 있다, 하고 광고하듯 존재감을 드러내 놓곤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어쩐지 마류 탐지기가 다시 잠잠해졌었다.

“카얄이 가져갔을 가능성도 있을까요?”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걸쇠가 찰칵 잠기며 작은 상자가 닫혔다. 라크시스는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방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카얄이 왔다 한들 제가 이렇게까지 기척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죠.”

돌바닥 위로 구두 굽 소리가 느릿하고 선명하게 울렸다. 라크시스의 목소리를 따라 시아의 시선이 옮겨갔다.

“봉인이 사라진 원인은 아마 따로 있을 겁니다.”

그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성의 주인이나 썼을 법한 문장이 박힌 물건들이 가득했다. 슈테른베슈테크의 상징은 사자였나 보지. 복도에서 봤던 판금 갑옷보다 조금 더 화려하고, 옆을 바라보며 기립한 사자가 음각된 성주의 갑옷이 보란 듯이 대검 옆에 걸려있었다.

시아는 낡은 초상을 가린 벨벳 가림막을 쓸어내렸다. 뽀얀 먼지가 두툼하게 묻어나왔다. 이 방에서 유일하게 제 색을 유지하고 있는 그림에는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한 백작이 황갈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슈테른베슈테크 백작도 보통 인물이 아니었나 봐요.”

“정적인 화풍이 유행하던 시기에 이런 초상을 남겼으니 성격을 알 만하군요.”

어느새 시아의 등 뒤로 다가온 라크시스가 나직이 말했다.

“깜짝이야. 언제 왔어요?”

“온 줄 몰랐습니까?”

생각보다 시야가 좁군요.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그를 보자 헛웃음이 났다. 하여간 라크시스도 그 성격 어디 안 간다니까. 시아가 툴툴거릴 때였다.

“저어, 거기 두 분.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아차. 루드윅이 있었지. 지금까지 그의 존재를 잊고 너무 아무 생각 없이 광룡의 봉인이니 마류 이상 현상이니 하는 대화를 해버렸다. 괴담에 관심 많은 루드윅으로선 흥미를 가지고도 남을 주제인데.

이걸 어떻게 둘러대야 하나 머리를 맹렬하게 굴리고 있는데 라크시스가 그녀의 팔을 톡 건드렸다.

“시아.”

“라크, 지금은 케이틀린이라고 했잖아요. 하아, 로드 젤마니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요?”

쉿.

라크시스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소맷자락을 살짝 잡아당겨 그의 옆에 가까이 둘 뿐.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소리를 감지하는 동물처럼 그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 같은 반응이다. 메이슨의 연구실에 검은 코트의 마법사가 찾아갔던 밤에도 라크시스는 극도의 예민함으로 허공을 바라보았지.

시아는 단박에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렸다.

“아까부터 이런 소리가 들렸는데 말이죠. 분명 저희가 이 방으로 들어올 땐 밖에 아무도 없었거든요.”

루드윅이 잔뜩 긴장한 상태로 굳게 닫힌 방문을 가리켰다. 그가 우리를 불러세운 건 광룡의 봉인이나 마류 이상 현상 때문이 아니었다.

고요한 귓가에 밀물처럼 아주 작은 소리가 닿았다.

아득한 함성 소리. 두꺼운 문을 넘어 흘러들어온 웅성거림이 점점 실체를 갖추고 있었다.

다무스를 위하여! 갈리프에게 영광을!

승자의 포효, 패자의 비명. 환호 같기도 웃음소리 같기도 한 열기가 텅 빈 고성을 채워나간다.

찰나 시아의 머릿속에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매년 이맘때쯤 슈테른베슈테크 성에서 사람 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고성의 문을 닫은 한밤중에 아득한 함성 소리 같은 게 들려온다고 했으니까요.’

‘이 시기엔 역병으로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느라 축제는 열지 않습니다.’

“…괴담이야.”

깨달음을 얻은 시아가 중얼거리는 순간, 네 사람을 감싼 공기가 바뀌었다.

퀴퀴한 먼지 냄새가 사라지고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풀 내음과 섞여 코끝으로 날아든다. 쥐와 거미줄이 즐비하던 음습한 방에 서서히 온기가 고여 들었다. 은촛대에서 번져가는 빛. 벽에 비친 그림자에 기다란 깃펜이 자국을 남기고, 사람에게 길들여진 부엉이는 푸드덕거리며 창가에 자리를 튼다.

백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죽은 자의 유산이 아닌, 산 자의 공간.

이 모든 변화를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돼지를 굽든지 삶든지 할멈이 알아서 해. 난 아무거나 잘 먹는다니까?”

거대한 문이 벌컥 열렸다.

네 사람은 열린 문을 바라본 상태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너희들, 뭐니?”

네 사람이 마주한 건 역광을 등진 채 사자 같은 황갈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서있는 여자였다. 초상과 똑같은 얼굴을 한 그녀는 서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내는 사람이었다.

형형한 녹색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곧 라크시스가 들고 있던 작은 상자에 닿았다.

“내 방에서 뭐 하냐니까?”

가벼이 물어오는 목소리엔 사자의 기백이 서려있었다. 사자. 그래, 아주 오래 전 냉혈의 사자라 불리던 존재가 이곳에 살고 있었지. 눈앞의 저 사람처럼 압도적인 위엄을 뿜어내는 씨즐턴의 주인이 있었더란다.

그녀의 정체를 알아챈 루드윅의 두 다리가 벌벌 떨렸다.

“주군, 어서 나오시지 않고…….”

문틈 사이로 고개를 들이민 남자가 우뚝 멈춰 섰다. 백작의 방에 침입한 낯선 이들을 본 탓이었다.

“렉시. 이것 봐.”

“정말 징글징글합니다. 어째 주군의 방엔 날마다 제국 놈들이 들어가 있습니까?”

“왜긴 왜야. 내가 인기가 많은가 보지.”

“이런 인기라면 전 사양인데요.”

여자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렉시. 이제 해야 할 일은 알고 있겠지?”

렉시라고 불린 남자가 가슴께에 주먹을 두 번 두드리며 대답했다.

“감히 아스타 슈테른베슈테크 백작의 방에 숨어든 깜찍한 녀석들의 모가지를 따버리는 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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