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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65)화 (65/292)
  • 65화 

    켈튼의 마차가 길 건너편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씨즐턴에 위치한 켈튼가의 별장에 연락을 넣어둔 탓이었다.

    요르문을 발견한 마부가 얼른 마차를 다시 몰기 시작했다. 도로 끝까지 가서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려면 수분이 더 걸릴 것이다. 그 틈을 타 요르문이 시아의 팔에 달라붙으며 그녀를 걱정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누님, 불이 날 곳에 누님을 보내긴 싫어요. 그냥 저랑 라크 녀석 둘이 다녀오면 안 될까요?”

    라크시스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오토마톤의 심장 사건 이후로 요르문은 광룡의 봉인에 조금 더 집착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봉인이 아니라 봉인의 마류 이상 현상 때문에 다치게 될 시아와 라크시스를 걱정하는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시아에게 집착해 왔다. 마법사도 아닌 평범한 인간이라 더 그런 듯했다.

    “그 불 때문에 내가 이 시대까지 오게 된 건데. 이번엔 라크에 요르문 너까지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렇지만…….”

    “오토마톤의 심장도 제대로 못 잡은 얼간이가 뭐라는 건지.”

    라크시스가 무심하게 끼어들었다.

    “그건 그게 정말 심장처럼 펄떡펄떡 뛰니까……!”

    “시아는 그 심장을 움직이는 오토마톤에게서 뜯어내기까지 했지. 이번엔 봉인이 어떠려나 모르겠군.”

    “라크!”

    말빨로는 라크시스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요르문은 입만 벙긋거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로드 켈튼, 모시러 왔습니다.”

    때마침 마차가 도착했다. 마부가 내려 인사를 한 뒤 마차의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하. 전 여기서 헤어져야겠군요.”

    루드윅은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작별의 악수였다.

    “열차에 동행하게 된 것도 영광이었는데, 괴담 수집까지 함께 해주셨으니. 여러분께는 꼭 로드 슈테른베슈테크의 유령을 만난 후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두 분 다 유명하신 분이니 댁으로 전보를 부쳐드리면 되겠지요? 루드윅은 얼른 마차를 타라는 듯 손짓했다. 그러나 세 사람 중 누구도 마차를 타지 않았다.

    그때, 요르문이 안타까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느슨하게 늘어뜨렸다.

    “이런. 로드 젤마니는 내가 매정한 사람으로 보였나 보지?”

    “무슨 소리십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더 섭섭한데.”

    “같이 가지.”

    루드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대단하신 마법사가 같이 가자고 하는 곳은 켈튼가가 소유한 씨즐턴의 별장이었다.

    “제, 가요?”

    “방 많아. 자네 하나 더 들어와도 상관없다고.”

    요르문은 마부를 향해 손짓했다.

    “자네, 이름이 뭐지?”

    “매튜입니다, 로드.”

    “그래, 매튜. 여기 있는 신사분 짐도 좀 실어주지 않겠나?”

    얼떨결에 들고 있던 여행 가방을 빼앗긴 루드윅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경악했다.

    “더 실으실 짐은 없으십니까?”

    “로, 로드 켈튼.”

    아무리 열차에서 친구 먹자고 하긴 했지만 갑자기 이러시면 제가 부담이. 루드윅은 그 큰 덩치를 어쩔 줄 모르며 횡설수설했다.

    시아는 그 모습을 보며 그저 웃고만 있었다. 모든 건 씨즐턴에 도착한 후 열차에서 내리면서부터 계획된 상태였다.

    두 번째 시간 여행 당시 만났던 메이슨 비렌체도 예상외로 광룡의 봉인을 찾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이번 세 번째 시간 여행도 일기장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으니, 루드윅 젤마니 역시 어쩌면 봉인의 단서가 되어주지 않을까.

    ‘로드 젤마니를 주시하는 게 좋겠어요. 그가 만나러 간다는 노인을 같이 만나보는 건 어떨까요?’

    이런 시아의 의견을 실제로 실행시킨 건 다름 아닌 요르문이었다.

    “전 이미 예약해 둔 호텔이 있는데…….”

    “쉿. 별장에 가서 같이 괴담 이야기나 더 하자고. 어때,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저 때문에 자리가 부족한 건 아닌지…….”

    “일단 타게.”

    요르문이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루드윅을 마차에 밀어 넣었다. 대낮에 벌어진 납치의 현장이었다. 나머지 세 사람이 꾸역꾸역 마차에 올라타 내릴 문을 봉쇄하고 난 후에 마차는 출발했다.

    * * *

    ‘괴담만큼이나 이상한 상황이야.’

    별장 창밖으로 보이는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며 루드윅은 홍차를 홀짝였다. 코끝에서 진한 향이 머무르다 비강을 가득 채웠다. 이등석을 타는 그의 소득으론 쉽게 접하기 힘든 최고급 홍차였다.

    “노을이 참 예쁘네요.”

    “케이틀린.”

    켈튼의 별장엔 없는 게 없었다. 정원이면 정원, 사냥터면 사냥터. 이국적인 무늬의 타일로 꾸며놓은 방과 바가 차려진 라운지. 가끔 놀러 오는 별장이 아니라 귀족들의 본가와 맞먹는 수준의 대저택이었다. 실제로 넓디넓은 부지를 독점하고 있는 이 별장에선 시야에 아무런 방해물 없이 집 안에서 바다를 감상할 수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 밑으로 노을에 물든 파도가 분홍빛 포말을 쉴 새 없이 만들고 있었다. 시아는 루드윅의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으며 제 찻잔에도 홍차를 따랐다.

    “이런 호의를 제가 받아도 될지…….”

    “당신은 요르문의 친구잖아요. 요르문이 이런 대접 하나 못할 사람도 아니고요.”

    “로드 켈튼은 정말로 괴담을 좋아하는 사람이 맞습니까?”

    “정확히는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죠.”

    연기도 해버릇하다 보니 실력이 늘었다. 로렌 허슬러로 살았던 지난 시간 여행의 경력은 시아로 하여금 라크시스 못지않은 능글거림을 연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괴담을 확인하러 갈 때 저희도 같이 갈 수 있을까요?”

    시아는 생긋 웃으며 턱을 괴고 루드윅을 바라보았다. 가늘게 접힌 그녀의 긴 눈매가 나비 날개처럼 살랑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노을에 빛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이며, 분홍빛으로 물든 얼굴이 아름다웠다.

    “당신이 이곳에서 즐거웠던 만큼 우리도 당신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길 바라고 있는데.”

    이런 데에 면역이라곤 전혀 없는 루드윅은 얼굴이 새빨개져선 찻잔의 손잡이만 만지작거렸다. 시아는 그런 반응을 단지 루드윅이 괴담 현장을 공유하기 싫어서 그런 것이라고 착각했지만 말이다.

    시아가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꺼내 올려놓았다. 그녀가 루드윅 앞으로 죽 밀어 내밀었다. 요르문이 고쳐놓은 괴담 수집기였다.

    루드윅이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세 분 모두요?”

    시아가 대답했다.

    “네.”

    * * *

    “연기 실력이 늘었더군요.”

    “아, 봤어요?”

    회색빛 벽돌 일색인 슈테른베슈테크 성의 복도에 굽 소리가 메아리쳤다. 새파란 달빛이 아치형 창문으로 스며들자 네 사람의 그림자가 도둑의 꼬리처럼 길게 늘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학 다닐 때 연극회 동아리라도 해볼 걸 그랬나 봐요.”

    불 꺼진 관광지는 새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경비조차 발길이 뜸한 시각. 창백하리만치 하얗게 빛나는 은발의 마법사는 밤이 지배하는 시간과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연기가 꽤 재미있었나 봅니다.”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내가 루드윅을 반협박 반설득하는 건 언제 봤을까.

    분명 루드윅을 빼곤 아무도 없었는데.

    “생각 외로요.”

    복도 곳곳엔 씨즐턴 왕국 전성기 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쇠사슬을 엮어 급소를 가린 판금 갑옷의 투구 사이로 시선이 따라붙는 것 같았다. 시아는 마네킹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오싹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앞서가던 루드윅이 이 층 복도 끝에 설치된 펜스를 넘어섰다. 성의 뼈대로 보이는 양 쪽 두꺼운 벽돌 기둥엔 사자 문양을 수놓은 벨벳 금술 휘장이 천장부터 바닥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루드윅은 그중 오른쪽 휘장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휘장에 덮인 그의 등이 몇 번 꼼지락거리더니 거기에 있는 줄도 몰랐던 자물쇠가 철컥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신사 숙녀분들?”

    루드윅이 한쪽 팔로 휘장을 걷어낸 채 이제 막 펜스를 넘어오기 시작하는 시아 일행을 불렀다. 도둑이라고 해도 될 만한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그가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기둥의 곡면을 따라 휘어져 있던 얇은 철문이 열렸다.

    성의 일 층부터 꼭대기까지 이어진 나선형의 돌계단. 숨겨진 비밀 통로였다.

    “이쪽입니다.”

    “한두 번 와 본 솜씨가 아닌데요?”

    눈이 뱅글뱅글 돌아갈 것 같은 계단을 올려다보며 시아가 라크시스의 뒤를 따라 문턱을 넘어섰다.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은 처음이에요.”

    이 시기에 지어진 성은 다 이런 구조라서 아는 것뿐입니다. 루드윅은 멋쩍게 대답하며 문을 닫고 맨 뒤를 자처했다.

    성의 규모가 규모인 만큼, 고작 한 층을 올라가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계단이 나선형이라 층과 층이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듯했다.

    앞서가던 라크시스가 나직이 말했다.

    “이런 성도 참 오랜만이군요.”

    “하긴, 라크는 오래 살았다고 했었죠. 어땠어요? 이런 곳에 살았을 땐?”

    “아주 불편했습니다. 마도 공학도, 과학도 원시 수준인 데다, 마법사가 별로 없어 모든 것이 엉망이었죠.”

    마법사도 시대에 따라 수가 달라졌나? 마법사는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다. 그렇다면 비율도 비슷할 텐데. 마도 시대에 들어서면서 마력이 짙어지기라도 한 건가.

    “옛날엔 지금이랑 뭐가 달랐나 보네요?”

    “인구가 적었죠.”

    아.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인구 수가 적어서 그런 거였구나.

    라크시스의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불꽃만이 유일한 등불이었던 어두컴컴한 계단에 순간 파란 달빛이 기다란 문틈을 따라 펼쳐졌다. 삼 층에 도착한 것이다.

    문턱을 너머 삼 층 복도로 빠져나오자마자 그들을 반긴 건.

    “하지만 그 적었던 마법사가 이 성에는 살았던 모양이군요.”

    다름 아닌 마류 이상 현상의 징후인 무지갯빛 마력이었다.

    사건 사고가 워낙 많이 일어나서 그런지 그들이 서있는 삼 층 복도 끝은 나무 가벽으로 막혀있었다.

    “아무것도 없네요. 복도 끝이 벽돌로 막혀있어요.”

    루드윅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아쉽다는 어조로 투덜거렸다. 비밀 계단으로 빠져나온 그들은 지금 재건축되어 막다른 길이 되어버린 삼 층 복도 끝 벽과 관광객을 막기 위한 나무 가벽 사이에 갇혀있었다.

    원래 유적은 일부가 파괴되거나 유실되어도 발견된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하곤 하지만,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의 삼 층 복도 끝의 무너진 부분은 백작 귀신을 본 사람들이 워낙 실족사를 많이 한 탓에 새로 지어 올리면서 방을 아예 막아버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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