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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62)화 (62/292)
  • 62화 

    시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라크시스 앞에 나타났다. 라크시스의 표정은 무심하리만치 태연했다.

    안심이 되면서도 괜히 무서웠다. 심각한 상처라도 있을까 봐.

    환자를 보던 자신의 표정도 저랬을까.

    “당신 가방에 핀셋 있죠? 그걸 좀 빌려야겠네요.”

    예상대로 그녀의 외출복을 뚫고 등에 박힌 자잘한 파편이 몇 있었다. 깊진 않았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라크시스가 건드리자 뒤늦게 아픔이 느껴졌다.

    “하기 전에 이걸로 소독해요. 의술 도구랑 환부 주변까지 다요.”

    “이렇게 말입니까?”

    “읏! 아흑……. 네에.”

    라크시스는 시아가 시키는 대로 찰과상에서 흘러 굳은 피까지 꼼꼼히 소독했다. 그의 손길은 섬세했으나 고통까지 막아주진 못했다. 시아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이를 악다물었다.

    디저트와 함께 나온 접시 위로 파편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시아는 거즈와 붕대를 꺼내 라크시스에게 건넸다.

    “다 됐으면 이걸 붙여줘요.”

    “아, 필요 없습니다.”

    그럼 이 상태로 옷을 입으라고? 아니면 나을 때까지 벗고 있으라는 건가? 뭐가 됐든 이상한 결론이었다.

    “손 줘봐요. 그게 제일 덜 민망할 테니.”

    갑자기 손을 달라니. 이유를 물으려 했으나 라크시스가 너무나도 단호하게 손을 요구하는 탓에 시아는 대꾸 한 번 못하고 손을 내밀었다.

    “자, 여기요.”

    라크시스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깍지 끼듯 얽힌 손가락이 민망해서 빼내려고 하자 그가 손에 지그시 힘을 주어 그녀의 손가락을 가뒀다.

    시아는 라크시스의 푸른 눈동자가 일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을 포착한 순간, 명멸하는 눈동자가 신호였다는 듯 그의 손과 맞닿은 지점에서부터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기운이 파도처럼 혈관을 삼키기 시작했다.

    “……!”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하고도 간질거리는 감각이었다. 온찜질과 냉찜질을 번갈아 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뜨거운 물에 들어갔더니 오히려 식은땀이 흐르는 것처럼 온몸이 차가워지는 기분인 것 같기도 하고. 몸이 날아갈 것 같다가도 물먹은 솜처럼 바닥에 붙어버리는 것 같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라크시스가 제게 하고 있는 것은 바로 마도 시대의 치유술이었다.

    상쾌한 혈류가 전신을 내달린다. 시아는 제게로 쏟아지는 마력 못지않게, 빨려 들어갈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강렬한 시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회복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루어졌다.

    마침내 치유술이 끝나고, 시아는 멍하니 라크시스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이게 마정석으로 회복받는 느낌일까요.”

    “마정석 따위와 비교하다니. 자존심이 상하는군요.”

    강렬하던 시선이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라크시스는 언제 손을 맞잡고 있었냐는 듯이 곧바로 손가락을 풀어버렸다.

    “고대 마법사의 치유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제국에서 몇 없는데. 고작 마정석이라니.”

    “몇 없다고요?”

    “황제나 그 직계 가족 정도가 전부입니다만.”

    마정석에 비유한 게 어지간히도 충격적이었나 보다. 아무리 평소처럼 어조를 평탄하게 고른다 한들 찌그러진 그의 미간은 도무지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아는 말했다.

    “지금까지 마정석 치유를 받을 만큼 다쳐본 적도 없었는걸요. 비교 대상이 마땅찮아서 그랬어요.”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군요. 이젠 어지간한 치유사는 시원찮게 느껴지겠네요.”

    제 마력을 따라올 자는 이 대륙에 없을 테니. 라크시스가 긴 다리를 느슨하게 꼬아 앉으며 팔걸이 위로 몸을 기댔다.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이럴 땐 보통 고맙다고 하지 않나.”

    같은 높이의 좌석에 마주 앉아있는데도 그가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하여간 자존심 하나는 대단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라크시스의 모습은 그녀에게 익숙했다. 익숙한 반응일수록 상대하기도 쉬운 법.

    “아, 예. 감사합니다. 라크시스 옌 경. 고대 마법사께서 친히 저를 치료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황제처럼 느른하게 소파에 앉아있던 라크시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요?”

    “…이상하니까 하지 말아요.”

    “고맙다고 해달라면서요. 이런 걸 바란 거 아니었어요?”

    결국 백기를 든 건 라크시스였다.

    “하. 됐어요.”

    당신은 날 자극하는 재주가 날로 늘어가는군요.

    라크시스가 구시렁거렸다. 시아는 키득키득 웃었다.

    특등석 입구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실례하겠습니다, 로드. 레이디. 주문하신 점심 특선 요리가 도착했습니다.”

    관행적인 노크 후에 곧바로 트롤리를 밀고 들어온 승무원은 그 자리에서 멈칫했다.

    “아, 그.”

    난잡한 유희를 즐기는 높으신 분들이야 익히 들어 알고 있긴 했다. 남들에게 들키는 것조차 즐기는 취향의 사람들도 있다지.

    하지만 그걸 제 두 눈으로 목격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알몸에 의사 가운을 거꾸로 걸친 여자와 그런 여자를 다리를 꼬고 내려다보는 남자.

    노크를 하고 기다렸어야 했어. 특등칸을 예약하는 승객은 대부분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거물급이었다. 괜히 심기를 거슬렀다가 잘리기라도 한다면 어쩌지. 승무원은 황급히 눈을 내리깔고 고개가 바닥에 닿도록 땅만 보며 서빙을 시작했다.

    “이건 호, 홀그레인을 곁들인 송아지 채끝 스테이크입니…….”

    “두고 가요.”

    “예?”

    은발의 신사가 턱짓을 했다. 그의 턱이 향한 곳엔 미모의 여인이 여전히 어리둥절한 낯으로 앉아있었다.

    승무원은 홀린 듯이 여인을 바라보았다. 검붉은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은 곳마다 하얗게 빛났다. 그 탓에 여인은 대낮에 홀로 달 밑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대륙 가멜엔 별을 따르는 점성술사가 있다는데, 그들의 점술을 보면 이런 느낌이 들까?

    기묘한 기분을 느낀 승무원은 곧 은발 신사의 정중한, 그러나 적잖이 신경이 곤두선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동행인이 아직 먹을 준비가 안 된 모양입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다시 부르죠.”

    “죄송합니다. 로드.”

    승무원이 도망치듯 트롤리를 끌고 빠져나갔다. 다시금 둘만 남은 객실에서 시아가 물었다.

    “왜 그랬어요?”

    “무슨 뜻입니까?”

    라크시스는 팔짱을 끼고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승무원이 딱히 잘못한 것도 없었는데. 그녀는 왜인지 겁을 잔뜩 먹은 채 뛰쳐나가고 말았다.

    분명 라크시스 때문이다.

    “왜 저 사람을 쫓아내듯 보냈냐고요.”

    라크시스는 한참이나 시아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답지 않게 입을 벙긋댔다. 그에게서 대답이 금방 나오지 않아 재촉하려던 찰나였다.

    “…그야 당신이 아직도 그런 차림이니까요.”

    시아는 그제야 자신이 계속 헐벗은 상태였다는 걸 깨달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푹 익은 토마토가 되었다.

    “마, 말해주지 그랬어요!”

    “일부러 말 안 한 건 아니에요. 저나 당신이나 등 쪽 상처를 본다고 정신이…….”

    “옷 입고 올게요!”

    시아는 라크시스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가방을 낚아채 뛰어갔다. 특등칸에 달린 화장실에서 잠금장치가 찰칵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미쳤어. 바보야. 까먹을 게 따로 있지. 아냐, 치료가 끝난 지 얼마 안 됐었잖아. 일부러 안 입은 건 아니라고.

    방음이라곤 전혀 되지 않는 열차 화장실의 문 너머로 시아의 혼잣말이 쉴 새 없이 들려왔다. 그 모든 말을 고스란히 듣고 있었던 라크시스는 엷게 웃으며 홍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리고 수분 후.

    “라크! 언제까지 밖에서 기다리게 둘 참이야?”

    기다리다 지쳐 잔뜩 성난 요르문이 특등칸의 문을 벌컥 열었을 때.

    “둘이 무슨 일 있었어?”

    그가 목격한 건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라크시스와 목 끝까지 단추를 죄다 잠가 올린 채 애꿎은 원피스 자락만 구겨 쥐고 있는 시아의 뒷모습이었다.

    * * *

    라크시스는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며 말했다.

    “앉아. 같이 들지.”

    그 말과 동시에 특등칸 곳곳에 놓여있던 테이블과 소파가 빠른 속도로 카펫을 끌며 이끌려 왔다. 마법이었다. 요르문의 뒤에 서있던 루드윅은 달려오는 의자에 정강이를 부딪혀 신음을 냈다.

    그 소리에 라크시스와 시아는 요르문이 손님을 데려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요르문은 뒤늦게 몸을 비켜 루드윅을 드러내며 사정을 말했다.

    “이 친구도 마류 탐지기를 가지고 있지 뭐야.”

    “이 친구?”

    라크시스가 눈썹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되물었다.

    “알잖나, 라크. 난 태엽과 나사를 다루는 사람을 좋아하지. 아까 보니 탐지기가 산산조각이 나서 헤매고 있길래.”

    “괴담 수집기입니다, 로드 켈튼.”

    “맞아. 괴담 수집기라는 아주 귀여운 별명도 붙어있고 말이야. 마류학자나 마도 공학자도 아닌데 선택적 마류 탐지기를 만들었다는 게 놀랍지 않나?”

    “그게 그 ‘친구’를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인가?”

    테이블과 소파가 한곳에 몰려버린 탓에 특등칸은 순식간에 허허로워졌다. 열 명은 거뜬히 눕고도 남을 만큼 텅 비어버린 객실을 훑으며 요르문이 덩굴 자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그래. 혼자 벌집 같은 좌석에 끼어 앉아있으려 하길래 내가 데려왔네.”

    루드윅은 얼떨결에 요르문에게 붙잡혀 따라 앉았다.

    나름 이등석이었는데. 진짜로 벌집 같은 건 삼등석이 아닌가 생각하며 루드윅이 중얼거렸다.

    호출 벨을 눌러 두 명분의 식사를 더 주문하고 나자 객실엔 나이프가 접시에 잘그락잘그락 부딪히는 소리만 남았다.

    라크시스는 태연하게 고기 한 점을 목구멍으로 넘기곤 물었다.

    “그 쪽은 아까 아르카나 중앙역에서…….”

    “루드윅, 루드윅 젤마니입니다. 옌 경.”

    고고학과 신화학을 하고 있습니다. 루드윅이 벌떡 일어나 몸을 절반으로 접어가며 라크시스에게 악수를 청했다. 고대 마법사이자 갈리프도흐 학장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탓이었다. 시아는 화들짝 놀라며 루드윅을 돌아보았다.

    “…젤마니라고요?”

    젤마니라면 너무나도 익숙했다. 칠십 년 후 요르문의 의뢰를 받아 서대륙 전쟁에 마류 탐지기를 들고 간 젤마니 대위와 오페라 가수와 외도를 저지른 그의 아내 젤마니 남작 부인. 그 남작 부인의 거짓 피부병 왕진을 가느라 고생한 게 새록새록 떠올랐다.

    “예? 예에. 그렇습니다만.”

    루드윅은 자신을 아는 듯 보이지만 그렇다고 반가워하지는 않는 여자를 보며 말없이 눈만 굴렸다.

    “혹시 가멜 식민 전쟁에 참가하셨나요?”

    “오, 그걸 어떻게 아셨나요?”

    루드윅은 대번에 얼굴이 밝아지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가 손가락을 쫙 펴 올려 보이며 말했다.

    “이 반지 때문인가 봅니다. 하하. 브라이던힐 출신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전쟁에 나가진 않지만요.”

    브라이던힐.

    그 단어에 시아와 라크시스가 불현듯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겹쳐 들었다.

    ‘재키 레이븐의 사칭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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