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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61)화 (61/292)
  • 61화 

    라크시스는 시아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그녀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중얼거렸다.

    “젠장, 걱정했잖아요. 이렇게 말도 없이 빨리 와버리면 어떡합니까.”

    “그게 제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

    “알아요, 알아. 당신 마음대로 안 되는 거 아는데. 마류가 느껴졌다고요. 시아 당신이 이곳으로 오는 기척이 느껴졌어.”

    “그럼 원랜 뭘 하다가 온…….”

    “지금쯤 요르문이 탄 마차가 역에 도착했을 겁니다.”

    웬일로 마법을 안 쓰고 마차를 탔네.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역까지 느긋하게 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잠깐. 라크시스도 마차를 탔다면.

    “설마 요르문을 마차에 두고 온 거예요?”

    “마차 하나 혼자 못 타는 얼간이는 아니니까요.”

    마부가 텅 빈 마차를 보고 놀랄까 봐 마저 타고 오라고 했습니다. 라크시스가 덧붙였다.

    잔뜩 삐져버린 요르문이 툴툴거리며 마차에서 홀로 내리는 모습이 훤했다. 시아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열차가 엇갈릴 것도 아니었는데. 천천히 오지 그랬어요.”

    실제로 그의 체향엔 은은한 열기가 묻어있었다. 지금은 3518년 3월이니까. 봄이라고 해도 아직 쌀쌀한 시기라 꽤 두껍게 입고 왔을 터였다. 그런데 이렇게 뛰었으니.

    “…당신이 정확히 어디에 있을지 모르니까. 그때처럼 묘지에 파묻혀 있기라도 한다면.”

    라크시스가 말끝을 흐렸다.

    당신이 잘못되는 건 바라지 않는단 말입니다.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말이 이성을 붙들었다.

    시아는 나직이 말했다.

    “…그나저나 이것 좀 놓고 말해줄래요?”

    그러자 라크시스는 태연하게 떨어져 나갔다. 천천히, 마치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듯. 마침내 완벽하게 남남이 되어 마주 보는 상태가 되자 웬일로 라크시스가 먼저 고개를 돌려 시아를 피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얼마나 세게 안았었는지 그의 몸이 닿았다 떨어진 자리가 아직도 압박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시아는 물었다.

    “저 없는 동안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그걸 왜 묻습니까?”

    “사람이 안 하던 행동을 갑자기 하니까 놀라죠.”

    “안 하던 행동이요?”

    라크시스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라크는 원래 어지간한 일에도 침착한 편이었잖아요. 막 껴안고 그러니까…….”

    그의 눈매가 사탕을 훔치다 들킨 아이처럼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시아는 한참을 말을 고르다 이렇게 말했다.

    “라크답지 않네요.”

    “…저답지 않다고요.”

    “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백색 소음이 정적을 메워주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라크시스에게 그답지 않다는 말을 한 건 꽤 여러 번이었는데. 그 말을 뱉고 지금처럼 어색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시아는 허둥거리다가 뚝뚝 끊어 웃으며 루드윅을 가리켰다.

    “아, 이쪽은 루드윅이에요. 저도 그렇게만 소개를 받아서 달리 해줄 말이 없네요.”

    루드윅은 여전히 시아가 밀쳤던 그 자세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눈앞에서 일어난 극적인 상봉에 얼떨떨해 일어날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드윅, 이쪽은 라크시스 옌이에요. 제 여행 파트너죠.”

    루드윅이 바보처럼 되물었다.

    “여, 행 파트너요?”

    틀린 말은 아니지. 시간 여행도 여행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시아는 루드윅을 일으켜 세웠다.

    괴담 수집가와 유령으로 오해받은 시간 여행자 그리고 고대 마법사.

    기묘한 삼자대면이었다.

    “다시 소개하지. 고대 마법사 라크시스 옌이네. 이쪽 레이디는 내 피후견인 시…….”

    “그냥 케이틀린이라고 불러줘요.”

    라크시스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시아?”

    “생각해 보니 굳이 이름을 알려줄 필요가 없잖아요? 괜히 칠십 년 전에 자꾸 제 존재를 드러내서 좋을 것도 없고요.”

    라크시스는 시아의 목소리에 묘하게 기운이 없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까는 급하게 그녀를 찾아내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옷차림이 기묘했다. 청록색 얇은 상하의 위로 의사를 연상시키는 흰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무엇보다 시아에게선 피 냄새가 났다. 그녀의 얼굴이며 목덜미, 손과 팔에 자잘하게 새겨진 상처가 라크시스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사람은 그가 아니라 시아였다.

    “알았어요. 케이틀린.”

    라크시스는 시아의 장단을 맞춰주기로 결심했다.

    * * *

    “테러라고요?”

    “…네.”

    씨즐턴행 열차의 특등석은 놀라울 정도로 유달리 호화로웠다. 씨즐턴이 물가가 높기로 유명한 관광지였기에 씨즐턴행 열차의 승객 역시 대부분은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부유층 중에는 씨즐턴에 별장을 가진 사람도 많았고, 그런 승객을 위한 일명 ‘특급 호텔 칸’을 마련해 놓은 것이었다.

    몇 날 며칠을 잠들어 있어도 모를 만큼 푹신한 좌석과 그 옆에 놓인 커다란 침대, 샹들리에 조명 밑으로 늘어선 온갖 고풍스러운 가구들과 귀한 위스키까지. 케르딕 7세 풍으로 유명한 라크시스의 그레이트 로얄 호텔 최상층 방을 그대로 들여왔다고 해도 믿을 법했다.

    그런 특등칸을 통째로 차지하고 앉아있음에도 시아는 그저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초록 풍경을 감상하고 있을 뿐이었다.

    “데번셔 인더스트리의 데번셔를 노린 테러였대요. 아, 죽은 미스터 데번셔는 무기상이었고요.”

    침묵하는 두 사람 사이로 철컹거리는 열차 소리만 규칙적으로 내려앉았다. 시아는 한참을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건조한 입술을 열어 말을 꺼냈다.

    “저 때문이었을까요?”

    “무엇이 말입니까.”

    라크시스는 내내 시아의 맞은 편에 앉아있었다. 테이블 위의 간식거리엔 두 사람 모두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테러가 벌어진 거 말이에요. 재키 레이븐을 잡고 원래 시대로 돌아간 후에 바뀐 것들이 너무 많았어요.”

    시아는 천천히 그녀가 겪었던 칠십 년 후를 설명했다. 패트릭 그레이엄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든가. 기존의 재키 레이븐 소재 소설이 슈나이더 앨런 어셔가 쓴 연작으로 바뀌어버렸다든가. 예정에 없던 테러가 그녀와 오랜 기사 로건을 덮쳤다든가.

    시아는 엷게 웃으며 가방에서 앨런 어셔 연작을 꺼내 라크시스에게 건넸다.

    라크시스는 책을 받아 든 자세 그대로 시아를 계속해서 응시하고 있었다.

    “미스터 비렌체는 잘 지내고 있나요?”

    시아의 눈에 서서히 물기가 고여 들었다. 투명한 눈물에 창밖 풍경이 유리알처럼 비치더니 이윽고 방울져 툭 흘러내렸다.

    “릴리 알펜은요?”

    “시아, 진정해요.”

    “무서워요. 라크, 여기서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광룡의 봉인을 찾는다 한들 원래 제가 살던 시대가 엉망이 된다면 소용없잖아요.”

    “시아.”

    라크시스는 책을 내려놓고 시아의 옆자리로 옮겨 가 앉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나, 표정만큼은 메말라 있었다.

    “봉인을 찾아다녀도 파괴를 막을 수 없다면요? 광룡이 부활하는 걸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칠십 년 후의 제 시대가 불타는 건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결국 시아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라크시스는 그런 그녀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그의 품에서 시아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을 때, 라크시스는 그녀를 나직이 불렀다.

    “시아.”

    눈시울이 잔뜩 붉어진 얼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실 제가 당신에게 일기장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 꽤 놀랐었는데.”

    “라크가요? 전혀 안 그래 보였는데.”

    “당신이 시간 여행자였으니까요.”

    라크시스는 시아의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코트를 벗었다. 그녀의 자주색 눈동자가 얇은 물 막을 씌워놓은 것처럼 투명하게 들여다보였다.

    “시간 여행은 마법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인간에게 시간의 이동이란 허락되지 않은 것이니까요.”

    라크시스는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시아의 눈가를 콕콕 찍어 물기를 닦았다.

    “당신이 여기서 무엇을 해서 미래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섬세하고도 상대를 신경 쓰는 손길이었다. 시아는 그가 내민 손수건에 얌전히 부은 눈을 맡기고만 있었다.

    “불변의 역사라는 게 존재할 수도 있고, 당신이 말한 것처럼 여기서 일으킨 아주 작은 일이 거대한 나비효과를 만들어냈을 수도 있죠.”

    라크시스는 몸을 일으키곤 시아를 가로질러 창으로 손을 뻗었다. 창문을 조금 밀어 올리자 열차의 속도를 이기지 못한 공기들이 시원하게 밀려들었다.

    검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갑갑한 열차가 아닌 맑은 바깥바람을 맞으니 조금씩 속이 가라앉고 있었다.

    시아는 이제 어느 정도 평상시의 상태로 돌아온 것 같았다. 라크시스는 다시 시아의 맞은편 자리로 되돌아가 앉았다.

    “다시 말하지만 무엇이 정답인진 아무도 몰라요. 시아 당신도 칠십 년 후의 미래에서 벌어지던 모든 일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죠.”

    “어차피 당신의 시간 여행은 광룡의 봉인에 묶여있고, 그건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죠. 그러니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요.”

    그가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홍차를 내밀며 말했다.

    “어쨌든 당신이 재키 레이븐을 잡은 덕에 릴리 알펜이 살아남았던 거니까.”

    * * *

    “상처나 좀 보여봐요.”

    “한두 곳이 아닌데…….”

    “폭발 현장에 있었다면서요. 파편이 박혀있을 수도 있는데. 그게 위험한 건 시아 당신이 더 잘 알지 않겠어요?”

    “그건 그렇죠.”

    애초에 라크시스와 시아, 요르문 셋이 사용하기 위해 예약한 특등칸이었다. 그러나 이 공간엔 지금 라크시스와 시아 둘뿐이었다.

    열차에 타기 전, 라크시스가 시아와 단둘이 할 말이 있다며 요르문을 밖으로 쫓아낸 탓이었다. 일등석 하나를 쥐여주고 내보낸 거라 큰 불만은 없어 보였지만, 어쨌거나 요르문은 언제든지 특등칸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서요. 지금 치료받지 않으면 손해인 건 시아 당신일 텐데.”

    라크시스가 재촉했다. 하지만 시아는 섣불리 상처를 보여줄 수가 없었다.

    ‘등도 다쳤다고!’

    로건이 감싸 안아준 탓에 복부는 괜찮았지만, 파편이 즐비한 사고 현장을 함께 뒹군 탓에 등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통증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다친 것은 분명했다.

    그녀가 의술사로서 환자의 다친 맨몸을 볼 땐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입장이 이렇게 바뀌니 간혹 쭈뼛거리며 환부 보이기를 거부하던 환자들이 단박에 이해가 갔다.

    시아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괜찮겠어요……?”

    “고대 마법사를 못 믿는 겁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시아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의자 뒤에 숨어 옷을 꼼지락꼼지락 벗었다. 맨몸에 흰 가운을 거꾸로 돌려 등판이 앞으로 가도록 입은 제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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