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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60)화 (60/292)
  • 60화 

    ‘유령이다!’

    아르카나 중앙역의 유령. 흐느끼는 소리로 사람을 홀려낸 유령이 나타난 게 분명하다.

    루드윅은 짐을 줍던 것도 잊고 허겁지겁 괴담 수집기와 나침반을 들었다.

    계기판의 바늘이 터질 듯 몸을 부르르 떤다. 오, 젠장. 도대체 얼마나 강력한 사념이길래. 결국 전구 하나가 깨져나갔다. 루드윅은 직감했다.

    이건 진짜다.

    괴담 수집기에 달린 나침반의 화살표가 지금까지 루드윅이 바라보며 앉아있던 서부 상행선 쪽 플랫폼을 가리킨다.

    복작이는 인파 속엔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루드윅이 눈을 한 번 깜빡거리자.

    새하얀 옷을 입은 유령이 나타났다.

    동시에 괴담 수집기에서 연기가 나더니 펑 소리를 내며 그대로 터져버리고 말았다.

    루드윅은 멍하니 괴담 수집기와 유령을 번갈아 보았다. 이번 유령은 정말로 강력한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그 실체가 보이는지 오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유령을 피해 가고 있었다.

    “분명 아르카나 중앙역 유령은 흐느낀다고 했는데.”

    다만 소문과 다르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본래 괴담에는 사실과 다른 소문이 섞여있는 법. 그런데 아무리 봐도 유령이 이상했다.

    새하얀 실루엣은 마치 의사의 가운 같았고, 품에는 웬 슈트 케이스를 꼭 안고 있었다. 질끈 감은 두 눈이 달려오는 열차에 부딪히기 직전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봐요, 아가씨. 길 한복판을 막고 서있으면 어떡해요.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대낮에 이상한 옷을 입고 돌아다니니 원…….”

    중년의 부인 하나가 유령을 향해 핀잔을 던졌다. 그러자 유령이 그대로 바닥에 허물어지는 것이 아닌가.

    “어머, 어떡해! 아가씨, 아가씨! 괜찮아요?”

    부인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루드윅은 순간 유령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직전의 상황을 생각했을 때, 저 존재가 유령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기묘한 마력과 함께 나타난 여자.

    내가 먼저 정체를 알아야 한다. 그녀는 무엇일까?

    “케이틀린! 젠장. 비켜요. 그녀는 내 동생이에요!”

    루드윅은 그렇게 부르짖으며 쓰러진 여자를 안아 들었다.

    * * *

    “이봐요. 정신이 좀 들어요?”

    시아는 서서히 시야가 색을 찾아가는 것을 느꼈다. 오늘따라 어깨가 좀 아픈 걸 보니 정신이 들기 전에 단단한 것에 부딪혔나 보다. 아니면 마차에서 튕겨 나갈 때 다친 부위일지도 몰랐다.

    이놈의 시간 여행. 좀 곱게 보내주면 어디가 덧나나?

    방금 전까진 의술원 병동에서 복잡한 심경에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마주한 낯선 환경은 그런 걱정을 순식간에 날려버리고도 남는 수준이었다.

    시아는 천천히 사위를 둘러보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계획이 틀어졌다. 예상보다 세 번째 시간 여행이 이르게 시작된 것이다. 도착 장소도 일기장에 기술된 것과 다른 것 같은데.

    열차 바닥에서 눈을 뜨기로 되어있었는데 특유의 덜컹거림이나 증기 소리, 연료 냄새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둥근 원통형의 기차역 천장과 철골 뼈대, 그 사이에 규칙적으로 매달린 조명 따위만 눈에 들어올 뿐이다.

    ‘…아르카나 중앙역?’

    플랫폼 표지판에 그렇게 적혀있는 걸 보니 다행히 아주 낯선 곳에 떨어진 건 아닌가 보다. 시간이 어떻게 됐으려나. 라크시스와 만나기로 한 열차는 아직 출발 전일까, 아니면 이미 출발했을까.

    ‘씨즐턴행 열차가 출발했다면 우선 켈튼 저택으로 가야겠어.’

    헤이든과 요크 부인이 좀 놀라겠지만 라크시스에게 연락하기 위해선 그게 가장 안전하고 빠른 방법일 터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건 라크시스였다. 그녀가 예상보다 빠르게 왔든 늦게 왔든 그도 시아 본인만큼 당황하고 있을 테니까.

    ‘세상만사 다 통달한 것처럼 구는 사람이니 생각 외로 태연할지도.’

    “미스?”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

    웬 낯선 얼굴이 거무죽죽한 철골 천장 배경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부드러운 갈색 곱슬머리가 바짝 기울어 시아의 얼굴에 닿을락 말락 흔들리고 있었다.

    시아는 그제야 누군가의 체온이 제 등을 감싸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 누구세요?”

    “당신 몸에 손댄 건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도 그 자리에서 동물원 원숭이처럼 구경거리가 되는 것보단 이 편이 나았을 거예요.”

    “…제 몸에 손을 댔다고요?”

    “정신을 잃고 쓰러졌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몸에 손을 댔다는 말에 남자의 품에서 화들짝 빠져나왔다. 엉겁결에 밀쳐져 남자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아가 있던 곳은 아르카나 중앙역 플랫폼 기둥 뒤의 벤치였다.

    말을 들어보니 쓰러진 그녀를 안아서 벤치까지 데려왔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몸에 손을 댔다고 한 거구나. 시아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가방을 확인한 후 주변을 살폈다.

    시커먼 그을음과 함께 고장 난 기계가 보였다. 첫 번째 시간 여행 때 요르문의 실험체가 되었던 기억이 떠오르자 갑자기 신경이 곤두서 버렸다. 시아는 굴러다니는 태엽을 집어 올려서 남자의 눈앞에 들이댔다.

    “당신도 실험체 찾아다니는 마류학자나 공학자라든가, 뭐 그런 사람이에요?”

    남자는 뜻밖에 낯을 가리는 태도로 어물어물 대답했다.

    “실험체라니, 그런 건 아니에요. 저는 루드윅이고 당신을 일단 케이틀린이라고 했어요. 그, 동생이라고 둘러댄 건데 그래야 주변의 의심을 피할 것 같아서.”

    순발력은 대단하시네. 그런데 얼굴은 왜 붉힌담?

    루드윅은 시아의 손에서 태엽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그 과정에서 시선은 시아에게 내내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정되어 있었다.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요.”

    “…뭘 그렇게 묻고 싶은데요?”

    시아가 몸을 움츠리며 물러나자, 그만큼 루드윅이 다가왔다. 그의 반짝이는 눈동자엔 설렘과 기대, 호기심이 가득했으나.

    실험체를 바라보는 요르문의 눈빛과 다를 것 없는, 평생 갈구해 온 목표를 이룩하기 직전의 미칠 듯이 두근거리는 눈빛이었다.

    루드윅은 시아의 두 손을 모아 잡았다.

    “당신, 정체가 뭔가요?”

    * * *

    적절하게도 때마침 종을 울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곳곳의 역무원들이 고성에 가까운 안내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씨즐턴행 열차가 30분 후에 도착합니다! 10분 정차 후 다시 출발할 예정이니 승객 여러분들께선 늦지 않게 승차 준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바리바리 짐을 싸맨 사람들이 삼등석 칸이 들어설 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선착순에서 밀려나면 같은 값을 내고도 서서 가야만 했으니 경쟁이 치열했다.

    시아는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루드윅의 말을 이해하곤 퍼뜩 대답했다.

    “정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신이 갑자기 나타난 걸 봤어요. 아무런 낌새도 없이. 난 그저 눈을 깜빡했을 뿐인데.”

    대답 없이 적당히 넘어가려 했는데. 시아는 걸려도 아주 단단히 잘못 걸렸다고 생각하며 루드윅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스크롤을 써서 그래요.”

    “그런 입다 만 차림으로 기차역까지 스크롤을 쓰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아직 올 열차도 없는데.”

    “사람이 살다 보면 좀 급하게 나올 수도 있지, 거참 너무하시네.”

    “스크롤 안 쓴 거 다 알아요. 제 괴담 수집기는 스크롤의 마력엔 반응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괴담 수집기요?”

    저기 박살 난 기계가? 시아가 흘긋 기계를 내려다보자 루드윅이 한숨을 푹 쉬며 대꾸했다.

    “네. 제 괴담 수집기요. 당신 같은 유령이나 이상 현상을 감지하는 기계였죠. 당신 덕에 고장 나버렸지만.”

    고장 수준이 아닌데. 시아는 이젠 나사까지 퐁 튀어 오르는 기계를 보며 떨떠름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그런데 방금 유령이라고 했어요?”

    “네.”

    “저보고?”

    “…네.”

    “당신이 아르카나 중앙역의 유령인 줄 알았죠. 막상 만나보니까 아니긴 했지만요.”

    유령보다 더 신기한 존재였어요.

    루드윅이 배시시 웃자 시아는 괜스레 속에서 열이 끓어올랐다. 또 누군가의 관심거리가 되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관찰 대상이나 실험체가 되는 건 사양이다.

    “그 유령이라면 번지수 잘못 찾았어요. 유령이 나타났다던 매몰 사고 현장은 지하 선로 쪽이니까요.”

    시아는 단호하게 가방을 집어 들었다. 훤히 뚫린 플랫폼의 양옆으로 바람이 날아든다. 새하얀 가운을 펄럭이며 우뚝 선 모습이 일순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루드윅은 아무것도 못 하고 그 모습을 그저 올려다볼 뿐이었다.

    “루드윅.”

    “…네.”

    “동생이라고 거짓말까지 해서 구해준 건 고맙지만, 전 바쁜 사람이에요. 갈 길이 먼 데다 만날 사람도 있고요. 무엇보다 유령도 아니고요.”

    그럼 이만. 시아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몇 발자국 가지도 않았을 때였다.

    저 멀리 역 로비에서 플랫폼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다급하게 뛰어오르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실루엣이 구름 같은 인파를 헤치고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에, 짙푸른 정장과 감색 베스트. 흐트러진 은발 밑으로 조급하게 사람들의 얼굴을 훑는 새파란 눈동자.

    우아한 보폭으로 성큼성큼 플랫폼에 들어선 남자는 시아가 쓰러졌던 바로 그 자리에 서서 이렇게 외쳤다.

    “시아! 어디 있는 겁니까?”

    라크시스였다.

    그의 음성을 듣는 순간 지금껏 인지하지도 못했던 가슴 속 응어리가 탁 풀어졌다. 긴장으로 한껏 부푼 폐부에서 공기가 빠져나간다. 테러, 로건의 부상, 예상보다 이른 시간 여행.

    그럼에도 라크시스는 그대로였다.

    비록 시아가 어긋난 시간대에 도착했으나, 그가 그녀를 이렇게 찾아왔으니.

    시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라크!”

    그 소리에 그의 시선이 단박에 이쪽을 향했다.

    시아는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자신이 곧장 단단한 가슴팍에 충돌하듯 감싸 안겼음을 느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시아는 손에서 가방을 놓치고 말았다. 그 짧은 거리에 순간이동을 쓴 바람에 예기치 못한 충격이 발생한 탓이었다.

    시아는 새삼 그가 평소에 사격이든 승마든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코트 너머로 느껴지는 탄탄한 팔뚝이 자신을 으스러질 듯 껴안는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을 테니까.

    익숙한 숲 향. 달려오느라 번져 나온 그의 체향이 그녀의 목덜미에서부터 확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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