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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59)화 (59/292)
  • 59화 

    “날 감싸고 대신 폭발에 휘말렸으니 골절이나 장기 손상이 있을 거야.”

    “시아.”

    “연기는 얼마 안 마신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기도도 확인해 봐야 하고…….”

    “시아, 정신 차려. 날 봐.”

    패트릭의 단호한 목소리에 횡설수설하던 시아의 목소리가 뚝 멎었다.

    “지금은 너도 환자야.”

    “…난 멀쩡해. 로건이 나 대신 다쳐서 나는 진짜로…….”

    “그렇지 않아, 시아. 제발, 응? 제발 한 번만이라도 널 먼저 살펴주면 안 되는 거야?”

    응급환자를 향해 뛰어가는 의술사들 한복판에서 패트릭은 울기 직전의 얼굴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레이엄 선생님! 안 오고 뭐 하세요! 그를 부르는 소리가 로건이 누워있는 수술방 밖으로 포화처럼 쏟아졌다.

    흐릿한 광경 속에서 애원하는 패트릭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였다. 시아, 시아! 그의 입술이 이름을 부르는 것 같다.

    등 쪽에서 욱신거리는 느낌이 났다.

    아, 그래.

    뒤늦게 현실감이 몰려든다. 로건이 아무리 감쌌다고 하지만 부상을 입은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왜 자신은 수술복을 입었던 걸까. 느리게 움직이던 모든 것이 갑자기 원래의 속도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긴박한 분위기가 사방에 가득했다.

    시아는 걸치고 있던 흰 가운을 벗었다.

    “부탁할게. 네가 로건 수술을 맡아줘.”

    그녀의 결연한 눈빛을 본 패트릭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최선을 다 할게.”

    그리고 시아는 정말로 수술 내내 수술방 밖에서 패트릭과 로건이 무사히 나오기만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시아는 그 사이 카트린에게 연락해 상황을 알렸다.

    “시아! 안 그래도 뉴스 보고 있었어!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난 괜찮아. 그보다 마리는?”

    “얘가 지금 마리 걱정할 때야? 신경 쓰지 말고 너부터 챙겨.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카트린의 호들갑스러운 걱정에 한결 안심이 되었다. 시아는 수술방 앞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손에 묻었다.

    “로건.”

    그는 그녀가 어릴 적부터 켈튼저에서 기사로 일해오던 사람이었다. 신경이 안 쓰이려야 안 쓰일 수가 없는, 헤이든과 마찬가지로 가족 같은 존재였다.

    “…이런 건 일기장에 없었어.”

    서대륙과의 전쟁이 한창인 건 알았지만, 일기장엔 이런 식의 테러가 일어났다는 말은 없었다. 이것도 그녀가 과거를 건드려서 벌어진 일일까?

    만약 그런 거라면 그녀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오늘의 참사가 언제고 그녀의 손발을 옭아매 시간 여행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정말로 내가 과거의 무언가를 바꾸었기 때문에 그런 걸까?

    로건.

    눈물이 차가운 테라조 타일 위로 툭 떨어졌다. 점점이 진한 자국이 번져나가는 바닥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시야 저 멀리에서 희끄무레한 빛이 느껴졌다.

    시간 여행의 시작이었다.

    다른 의미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슬픔에 잠길 새가 없었다. 시아는 곧장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 올라가 자신의 오피스를 열어젖혔다.

    이번에도 빨라. 다음 날 아침 시작되어야 할 시간 여행이었는데. 초점이 맞지 않는다. 이미 세상의 절반이 하얗게 보이는 시점에서 시아는 급하게 피 묻지 않은 흰 가운을 걸쳤다.

    이성이 끊기기 직전, 시아는 가까스로 가방을 낚아챘다. 마치 그녀를 기다려주었다는 듯, 그녀가 가방을 쥐자마자 시야가 창백한 백색으로 완전히 물들었다.

    【 주인 잃은 성과 괴담 수집가 】

    3518년 3월.

    하얀 증기가 선로를 따라 궤적을 그린다.

    - 이번 역은 아르카나 중앙역, 아르카나 중앙역 입니다. 내리시는 승객 여러분께서는 두고 내리는 짐이 없는지 다시 확인을…….

    경적을 길게 울리며, 소음을 뿜어내는 검은 몸체의 열차가 플랫폼에 천천히 들어섰다. 열차를 타려는 승객, 타지에서 올라오는 가족이나 친척을 기다리는 사람들 또는 열차를 구경하는 사람들. 북적이는 플랫폼을 헤집으며 멋들어지게 제복을 빼입은 역무원들이 수신호 대기를 위해 열차 출입문이 멈춰 설 곳에 열 지어 섰다.

    그 광경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기 충분했다. 역무원의 손에서 작은 녹색 깃발이 물결처럼 펄럭이며 플랫폼을 수놓았다. 이윽고 완전히 멈춰 선 열차는 열린 문으로 사람들을 토해냈다.

    “표를 확인한 후에 타실 수 있습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부인. B8은 한 량 더 뒤로 가셔서 타시길 바랍니다.”

    플랫폼의 처음과 끝의 풍경이 다른 것도 볼거리라면 볼거리였다. 특등칸이 위치한 앞부분엔 귀부인과 신사가 여유를 즐기며 열차를 오르고 있었고, 선착순으로 자리가 배분되는 뒷부분 삼등석에는 먼저 열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그 중간, 아니 중간보다 살짝 앞 칸에서 루드윅 젤마니는 역무원의 배웅을 받으며 내렸다.

    “미스터. 좋은 시간 되셨길 바랍니다.”

    “수고하세요.”

    루드윅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모르간의 매캐한 공기가 폐부 깊이 파고들었다. 모르간 특유의 우중충한 날씨가 썩 유쾌하지 않게 느껴질 법도 하건만.

    “아, 개운하다.”

    제국 중남부의 브라이던힐에서부터 장장 여섯 시간을 열차 안에 앉아있기만 해서 그런가. 아르카나의 바깥 공기가 이렇게 달콤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사실 루드윅의 최종 목적지는 아르카나가 아니었다. 깎아지르는 절벽 위의 사멸된 왕국 씨즐턴. 성직자들의 순례지로 불리는 시트리나 대성당과 아찔한 협곡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요새 도시 슈테른베슈테크의 고성. 중세의 전통을 여전히 고수하며 사는 조그맣고 아름다운 마을들. 바로 그 마을에서 돌고 있는 괴담이 그의 진짜 목적이었다.

    브라이던힐에서 제국 서부의 웨스턴체스터 철교를 지나 씨즐턴 제도까지 환승 없이 한 번에 갈 수 있는 열차가 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굳이 아르카나 중앙역을 경유하기로 한 루드윅의 판단은 비합리적으로 보였다.

    황궁과 제국 최대의 유흥가가 있다는 점에서 관광차 수도의 중심지를 방문했다면 모를까. 루드윅 젤마니는 유흥 자체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루드윅이 아르카나 중앙역에 내린 이유는.

    “어디 보자, 이쯤이라고 했는데.”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 재킷 단추를 여미고 코트 품 안에서 글씨가 가득한 종이를 꺼냈다.

    작년에 발행된 모르간 타임즈 지였다.

    [아르카나 중앙역 매몰 사고. 귀신의 저주인가, 부주의가 낳은 인재인가.]

    그가 지금 발을 디디고 선 아르카나 중앙역에는 사고가 일어난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귀신이 나타난다는 괴담이 돌고 있었다.

    그랬다.

    루드윅은 고고학자이면서 신화학자였고.

    동시에 괴담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자칭 괴담 수집가였다.

    “미스터. 괜찮으십니까?”

    루드윅이 열차에서 내릴 때 인사를 했던 역무원이었다. 그는 아까 루드윅이 열차 계단을 내려오면서 다리를 잠시 절었던 것을 봤던 터였다. 루드윅은 역무원의 반응이 익숙한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모자를 까딱였다.

    “괜찮습니다. 브라이던힐에겐 명예로운 훈장과도 같은 것이니까요.”

    모자챙을 쥔 거친 손가락에서 붉은 루비가 반짝였다. 역무원은 존경 어린 감탄을 뱉었다.

    “오. 세상에. 브라이던힐 출신이셨군요.”

    브라이던힐. 제국육군사관학교가 위치한 제국 중남부의 도시이자, 사관학교의 유명세 때문에 지명이 사관학교 그 자체를 지칭하는 말이 되어버린 곳이었다.

    “몇 년 전에 가멜에 다녀왔죠. 총알 스친 자리가 가끔 시리는 정도라.”

    남대륙의 제국령 식민지 가멜이 제국에 완전 복속된 건 얼마 전이었다. 간간이 제국에 대해 반감을 가진 무리가 가멜의 제국 정부 기관을 공격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곤 했는데, 아마 눈앞의 신사도 그 현장에 있었던 모양이다.

    “아이고. 모르간의 날씨와는 영 안 맞으시겠군요.”

    “하하.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요.”

    루드윅은 발목을 살짝 움직여 보이며 대답했다.

    “영광이었습니다. 미스터.”

    “그럼 수고하십시오.”

    역무원은 힘찬 악수를 건네고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정중한 걸음걸이로 멀어져 갔다. 그렇게 역무원이 사라지고 루드윅은 낯선 도시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다.

    상행선과 하행선이 동시에 드나드는 개방형 플랫폼에 또다시 사람들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루드윅이 내렸던 방향과 정반대에 위치한 플랫폼엔 아직 열차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으나, 부지런한 사람들은 진작부터 와서 열차를 기다리며 가족과 친구를 배웅하고 있었다.

    역사 기둥 사이마다 길쭉한 벤치가 등을 맞대고 나란히 놓여있었다. 루드윅은 수도 사람 구경도 할 겸, 점점 인파가 늘어나고 있는 서부 상행선 방향이 눈에 잘 들어오는 곳에 앉았다.

    신문 가판대에서 집어온 오늘 자 모르간 타임즈를 펼쳐 들고, 가방에서 고이 꺼낸 설계도와 나침반, 매몰 사고 당시의 지도를 겹친다. 뒤이어 구리 선이 덕지덕지 붙은 허술한 기계 하나를 꺼내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겉으로 보면 그는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일 뿐이다. 완벽한 위장이었다.

    “자취가 남은 모든 것은 실존하는 법이지.”

    루드윅은 그렇게 말하며 부품이 덕지덕지 붙은 기계의 전원을 켰다. 미약한 웅웅거림과 함께 계기판의 바늘이 움찔거리며 각 버튼마다 천천히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기계는 마류 탐지기였다. 마류학자도 마도 공학자도 아닌 그가 몇 날 며칠을 끙끙거리며 직접 만든 기계. 하지만 루드윅은 그 기계의 이름을 ‘괴담 수집기’라고 불렀다.

    마법. 물리학 법칙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는 기묘한 그 힘은 생각보다 많은 불가사의에 개입되어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찾아다닌 괴담도 마찬가지였다. 유령이니 귀신이니 하는 것들은 정령의 장난이거나 마법사들이 실패한 실험 결과물을 몰래 버려서 생긴 현상이었다. 사물이 공중에 떠오르고 없던 길이 나타나는 것도 짙은 마력이 고인 곳에서 일어나는 마법 현상이었다.

    괴담을 좋아하지만 그만큼 괴담의 실체를 까발리고 다닌 탓에 공포 소설가 연합회나 ‘월간 미스터리’ 따위를 출간하는 잡지사에선 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루드윅은 끊임없이 괴담을 찾아다녔다. 북부 지르가나의 마정석 광산 붕괴 사건 때부터였으니 그가 괴담에 빠진 지도 어언 오 년이 넘었다.

    바로 마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진짜 괴현상을 증명하고 싶어서였다.

    “이크. 역시 수도는 위험하구만.”

    오가는 인파에 그의 가방이 벤치에서 밀려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안에서 짐이 와르르 쏟아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온몸으로 막아낸 루드윅은 쭈그려 앉아 메모지며 펜 같은 잡동사니들을 줍고 있었다.

    그때였다.

    윙― 윙윙―

    벤치 위로 서서히 시선을 옮기던 루드윅의 입이 떡 벌어졌다.

    괴담 수집기가 진동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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