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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58)화 (58/292)
  • 58화 

    심지어 세 번째 시간 여행의 일기가 적힐 당시, 시아 켈튼은 광룡의 봉인이 파괴되는 걸 막아야겠다는 결심조차 하지 않았다. 봉인의 존재도 몰랐고, 그녀가 마도 시대의 종말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될 줄도 몰랐으니까.

    미친 사람, 혹은 실험체 취급을 받기 싫어서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고 했다. 가만히 있다 보면 언젠간 3587년의 원래 시대로 돌아갈 테니까.

    “이번엔 아니지. 그나저나 뭘 챙기는 게 좋으려나.”

    두 번째 시간 여행도 일기장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메이슨 비렌체를 만난 것도, 오토마톤을 상대한 것도, 재키 레이븐 사건을 해결한 것도, 재키 레이븐의 악명에 숨어 움직이던 카얄 추정의 인물을 만난 것도.

    광룡의 봉인을 찾기 위해 움직일수록 예상치 못한 위험과 사고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 당시에 내가 봉인을 찾아 지하 공사 현장을 찾아다녔다면 예상치못한 매몰 사고에 휘말렸을 수도 있었다.

    시아는 꽤나 쓸 만했던 의술 도구들을 우선 챙겼다.

    상처 봉합을 돕는 치유 마정석, 마취 마정석, 혈액 정화 공급 마정석. 각종 수술 기구들.

    “…주사도 몇 개 더 챙겨왔고.”

    골절을 확인할 때 썼던 라크시스의 기계도 챙겼다. 꽤 유용했단 말이지.

    아. 치유 마정석은 메이슨을 치료하느라 저장된 마력을 다 사용했었다. 시아는 가방에서 치유 마정석을 도로 꺼내다가 미묘하게 달라진 점을 발견했다.

    “…거의 새거잖아?”

    분명 바닥이 보일 정도로 빛을 잃었던 마정석엔 마력이 가득 차있었다. 시아는 피식 웃었다. 보나 마나 뻔했다. 요르문 아니면 라크시스의 소행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챙길 것들은 챙겼고. 장롱을 열고 무채색으로 늘어선 셔츠와 바지를 꺼내려던 시아는 문득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일기장의 시아 켈튼이 탔던 열차가 씨즐턴행이었지.”

    씨즐턴은 제국 최서단의 제도였다. 본섬 씨즐턴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섬으로 둘러싸인 제도는 수도 모르간과 전혀 다른 온화한 기후의, 제국에서 가장 여행하고 싶은 관광지로 꼽히는 곳이었다.

    씨즐턴 왕국이 제국의 일부가 되기 전인 약 이백 년 전, 한 백작이 살았던 슈테른베슈테크 고성은 끝을 모르는 깊이의 검푸른 너울 파도와 어우러져 웅장하면서도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바람에 결결이 고개를 뉘는 초원과 마을을 둘러싼 드넓은 밀밭과 포도밭, 홍차의 원산지답게 곳곳마다 펼쳐진 푸른 차밭. 고행자의 걸음걸이처럼 느리게 돌아가는 풍차 사이에선 어떻게 사진을 찍어도 고전 영화의 주인공처럼 보인다고들 한다.

    시아는 셔츠와 바지를 몇 벌 챙기고는 한참을 고민하다 아끼던 원피스와 재킷도 한 벌 챙겨 넣었다.

    그렇게 시아가 한참 짐을 챙기고 있을 때였다.

    “아가씨, 들어가겠습니다.”

    “헤이든?”

    노크 소리가 들리고, 허락이 떨어지자 헤이든이 반쯤 들어오며 물었다.

    “아가씨 앞으로 서점 달리아에서 앨런 어셔 연작 전권을 보내왔는데 어디에 두는 게 좋으십니까?”

    마침 기다리던 짐도 도착했다. 시아는 반색하며 대답했다.

    “아, 제 방으로 가져다주실래요?”

    “예. 금방 올려드리겠습니다.”

    헤이든은 시아의 대답을 예상했는지 이미 메이드를 시켜 문밖에 책을 대령해 놓은 상태였다. 메이드 둘이 열두 편에 달하는 책을 책장에 차곡차곡 꽂자 시아는 그중 몇 편을 골라 가방에 챙겨 넣었다. 이는 순전히 라크시스에게 슈나이더의 만행을 고자질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미스 피셔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응접실로 내려가 보시겠습니까?”

    미스 피셔라면 카트린이었다. 무슨 일이길래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한담.

    “알겠어요.”

    시아는 잰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카트린?”

    “시아? 이제 받는구나. 혹시 지금 시간 되니?”

    수화기 너머로 마리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 허엉어엉엉어엉. 내가, 히끅. 시아는 직감했다. 마리 술 마셨구나.

    “마리가 술 마시자고 붙잡았지?”

    “역시 시아 넌 한 번에 알아듣는구나. 와서 얘 좀 말려봐. 너 아니면 마리 말릴 사람이 없어.”

    카아아트리이이인! 시아는? 시아는 온대? 마리의 혀는 이미 잔뜩 꼬여있었다. 안 봐도 훤했다. 보나 마나 공중전화 박스에 숨은 카트린을 찾아내 수화기에 바짝 달라붙은 거겠지.

    “거기지? 어제 먹었던 곳?”

    “응. 빨리 와. 진짜 사랑해, 시아.”

    전화는 그렇게 뚝 끊겼다. 당황스러운 나머지 그대로 굳어서 서있자 지나가던 메이드들이 힐끔거렸다.

    어쩔 수 없지. 시아는 방으로 올라가 간단한 외출복에 습관처럼 들고 다니는 그녀의 마법 가방을 들고 내려왔다.

    “시아, 이 시간에 어디 가니?”

    “아르카나에요. 잠깐 마리랑 카트린 얼굴 좀 보고 오려고요.”

    아직 서운함이 살짝 남아있는지 요르문의 입꼬리가 축 처졌다. 그러면서도 요르문은 곧바로 지나가던 사용인을 불러 마차부터 준비시켰다.

    “로건 데려가. 올 때 꼭 마차 타고 오고. 용돈 좀 줄까?”

    낮에 그렇게 토라지게 만든 게 미안해서 시아는 요르문의 용돈을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먹었을 땐 이미 손에 지폐가 한가득 쥐어진 후였다.

    “요르문 님…….”

    “로젠버그에 웰링턴 백작이 혼담을 넣었다던데.”

    아하. 그래서 마리가 술을 진탕 마셨구나. 집안에서 결혼하라고 또 난리였던 모양이다.

    요르문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도심에 크고 작은 사고가 많다는데. 조심하고.”

    “네. 안전하게, 조심해서, 다치는 곳 없이. 맞죠?”

    “그래.”

    요르문은 어릴 적에 외우다시피 가르친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시아를 보고 피식 웃었다.

    “잘 다녀와.”

    “네. 요르문 님.”

    * * *

    마차 창문으로 넘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이런 음주는 예상에 없었는데.’

    내일 있을 시간 여행을 대비해 오늘 밤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려고 했던 참이었다. 하지만 뮤지컬을 보러 갔을 때의 마리가 떠오르자 차마 술자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의술원으로 돌아가면 또 제대로 만나지 못할 것이다. 휴가를 낸 김에 친구라도 열심히 만나야지. 마리와 카트린은 오랜 친구였다. 그들을 서운하게 하는 건 시아로서도 괜히 마음이 쓰이는 것이었다.

    시아는 질주하는 마차 안에서 별이 총총 뜬 밤하늘을 감상했다. 세레타 지구 너머로 아르카나 광장의 시계탑이 조그맣게 윤곽을 드러냈다. 밤이 깊도록 꺼지지 않는 알록달록한 조명들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내며 빛을 발한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제국의 중심지. 칠십 년 전과 다를 것 없이 환락과 유흥으로도 제국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아르카나를 보니 문득 릴리 알펜이 떠오르고 말았다.

    ‘릴리 알펜은 결국 살아남았지. 그녀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던 중이었다. 시아가 타고 있는 마차 뒷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앞에서 사고가 있었던 모양인지…….”

    기사 로건이었다. 안 그래도 그 짧은 거리를 가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나 했더니. 그는 진땀을 흘리며 상황을 설명했다. 마차 한 대가 갑자기 역방향에서 달려들어 충돌사고가 벌어졌다고 했다.

    “도로가 뚫리려면 한참 걸릴 것 같은데 급한 일이 있으시면 옆 블록에서 삯마차를 잡아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정 안 뚫리면요.”

    시아는 열린 문으로 앞을 빼꼼 내다보았다. 날이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지만 연기가 나는 걸 보니 사고가 꽤 크게 난 모양이었다.

    경적을 울리던 마차들도 상황을 이해했는지 앞머리를 틀어 한 대씩 사고 현장을 빙 둘러 빠져나가고 있었다. 경찰의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졌다. 사고를 수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다리다 보면 되겠네. 시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차에 앉아있었다. 조금 늦어지는 것 정도야 괜찮겠지.

    그때였다.

    “아가씨―! 피하십시오!”

    끔찍한 폭발음이 잇달아 터지며 시뻘건 불길이 켈튼의 마차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뼈를 때려 부수는 듯한 충격과 함께 몇 번이고 시아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이명이 울리다 사라진다. 그렇게 구른 것치고 생각보다 통증이 얼마 없어 몸을 일으켜 보니, 수십 대의 마차에서 연쇄 폭발이 일어나 사방이 불바다였다. 비명과 시체로 참혹한 거리는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밤이 넘실거리는 불꽃으로 대낮처럼 훤했다. 이 정도라면 숨이 막히도록 뜨거운 공기에 고통스러울 텐데 이상하게도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 가씨……. 주인님께, 연락을…….”

    “로건!”

    왜 내가 멀쩡한가 했더니. 시아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가씨를 온몸으로 지켜낸 탓에 시아가 받았어야 할 충격을 로건이 모조리 대신 받고 말았다. 그의 등은 징그러우리만치 피부가 벗겨져 피가 흥건했다. 마차 파편, 유리 조각. 화상까지 입은 그의 옷이 불길에 녹아 피부에 엉겨 붙었다.

    시아는 가로등 앞에 나뒹구는 가방을 발견했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 안에서 스크롤을 꺼내고 곧장 의술원의 좌표를 입력했다.

    과거의 물건? 사람이 당장 죽게 생겼는데.

    닥터 켈튼의 오피스에 피투성이가 된 두 사람이 도착한 건 순식간이었다. 시아는 미친 듯이 호출 벨을 눌렀다.

    “켈튼 선생님은 휴가 가셨는데……. 어머나! 선생님!”

    빈 오피스에서 호출 벨이 울리자 의아해하며 문을 열었던 메이가 시아와 로건을 보고 새된 비명을 질렀다.

    “메이! 빨리요! 응급 상황이에요! 회복과 당직도 불러와요!”

    시아는 곧장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녀 역시 부상자였지만, 극한 상황에 몰린 사람은 원래 고통을 잊는 법이었다. 달려온 당직 의술사가 로건의 피가 잔뜩 묻은 그녀를 보고 흠칫 멈춰 섰다.

    “시아. 대체 이게 무슨…….”

    시아 역시 그를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오늘의 당직은 바로 패트릭 그레이엄이었다.

    “패트릭. 응급 환자야. 아르카나 시내에서 폭발이 있었어.”

    “안 그래도 방금 뉴스에 떴어. 서대륙에서 벌인 테러라며. 데번셔 인더스트리의 그 데번셔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던데. 시아 네가 그 자리에 있었을 줄은…….”

    패트릭은 시아의 몸에 난 상처를 보고 얼굴을 성마르게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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