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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57)화 (57/292)
  • 57화 

    “그리고 덧붙이자면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종교는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어. 그 목적이 전쟁에서의 승리든 부족의 번영이든, 혹은 개인의 구원이든 말이야. 그게 비인도적이라는 생각이 등장하고 나서야 그런 종교의 위세가 꺾이게 됐지.”

    시아는 헬릭스가 어떻게든 그녀가 가진 의문을 해결해 주려 노력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 그녀가 사이비에 빠진 사람들이 왜 살인을 저질렀는가를 궁금해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시아가 고민하던 건 한 단계 더 깊은 지점이었다.

    재키 레이븐은 결국 자기만족을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 죽은 피해자들을 그들의 신을 위한 제물로 바치거나 자기 자신의 구원을 바라고 행동한 것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녀의 시간 여행과 맞물리는 시기의 사건들도 마찬가지였다. 현장에 남겨진 표식이나 발견된 성서로 사건의 배후에 황혼 국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뿐이지, 그것을 제외하면 특정 사고에 지나치게 미쳐있는 범인의 단독 소행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순결에 미친 재키 레이븐이라든가, 생명 창조에 미친 과학자라든가, 예술에 미친 애호가라든가, 제국 우월주의에 미친 정치인이라든가.

    붙잡힌 용의자 중 누구도 신을 부르짖지 않았다. 심지어 사이비 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교주 숭배조차 없다.

    즉, 광신도들이 벌이는 범죄라고 하기엔 규칙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었다.

    막막하고 혼란스러웠다.

    ‘이런 자료들만 봐선 부족해. 다음 시간 여행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할 수도 없고.’

    애초에 그녀의 행동으로 바뀌어버린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기 위해 찾아본 기록들이었다. 하지만 자료를 보면 볼수록 새롭게 생겨나는 의문들은 앞으로 남은 시간 여행을 불안하게만 만들었다.

    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라크시스를 다시 만나야 했다.

    혼자 끙끙거려봤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걸. 라크시스라면 미래가 바뀌었다는 걸 알게 되어도 태연하게 새로운 계획을 세우겠지.

    “…없다면 말이야, …내가 …도 될까?”

    구름 같은 말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시아.”

    하지만 다른 생각에 심취한 시아의 의식까지 닿지 못한 채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시아?”

    어쨌든 헨리 던로의 최후를 알아내긴 했고. 그래, 메이슨 비렌체는 어떻게 됐을까. 그도 나 때문에 운명이 바뀌었을지 모르는데.

    “시아, 듣고 있어? 어디 아픈 거 아니지?”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흐릿하던 초점이 돌아오며 헬릭스의 걱정 어린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차. 황자 전하께서 옆에 있는 걸 까맣게 잊었다. 설마 내가 지금까지 황자 전하의 말을 무시하고 있었던 거야?

    세상에.

    시아는 등에서 땀이 삐질삐질 솟아나는 걸 느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아니에요. 죄송하지만 다시 한번만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헬릭스는 시아가 제 말을 듣지 않았음을 알고도 기분 나쁜 내색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에게 답을 들을 수 있다면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할 수도 있었으니까.

    “부담스럽다면 거절해도 좋지만. 그래도 네가 신청을 받아줬으면 해서.”

    신청?

    “황자님께서 부탁하신 건데 거절할 순 없죠.”

    “…정말이지?”

    얼떨결에 황자의 제안을 긍정하고 말았다. 헬릭스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어느 정도였냐면 쿰쿰한 종이 냄새만 가득한 기록관이 순간 화창한 들판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덜컥 긴장감이 올라왔다. 황자의 반응으로 보아하니 이제 그가 무슨 부탁을 했든 더 이상 번복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헬릭스의 성격상 그렇게 무리한 일을 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모든 제국민은 황족에게 불복할 수도 없었다. 그것이 전통이고 황실에 대한 존경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시아는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공수표를 남발한 기분이다. 황자가 뭘 부탁했기에 이렇게 좋아하는 걸까?

    “그럼요. 그런데 실례가 안 된다면 제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다시 한번 여쭤봐도 될까요?”

    “그렇게 경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데.”

    “제가 감히 어떻게…….”

    “자꾸 그러면 내가 부담스러운걸. 연회 내내 그렇게 말할 셈은 아니지?”

    잠깐. 방금 이상한 단어를 들은 것 같은데.

    “…연회요?”

    “응. 키르 해협 전투 승전 기념 연회 말이야.”

    요르문 님이 같이 가달라고 했던 연회였다. 블레어 스트릿에 갔던 것도 연회 때 필요한 드레스를 맞추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연회에 간다는 걸 전하께선 어떻게 알았을까. 하긴 황족이니 황실에 들어간 연락은 어지간하면 다 알고 있겠지.

    그런데 연회랑 내게 한 부탁이랑 무슨 상관인데?

    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녀의 궁금증은 곧바로 해소되고 만다.

    헬릭스가 제국 신사의 표본이라고 해도 될 만큼 정중하고 완벽하게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레이디 시아 켈튼. 제게 당신의 첫 번째 춤 파트너가 될 영광을 주지 않겠습니까?”

    * * *

    다른 사람 앞에서 평정을 유지하도록 끝없이 교육받아온 황자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스멀스멀 배어 나오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전하.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셨나 봅니다.”

    헬릭스의 동갑내기 보좌관 레논은 레이디 켈튼을 마차까지 직접 에스코트해 태워 보내고 돌아오는 황자를 맞이했다.

    “그럼. 아직도 손이 떨리는 것 같아.”

    “그렇게 좋으십니까?”

    “응.”

    레논은 피식 웃었다. 장성할 대로 장성한 제국의 후계자는 봄을 처음 맞이한 나비처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다 키운 자식의 첫 연애를 보는 것만 같아서 레논은 괜히 제 심장이 다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댁까지 데려다드리지 그랬습니까.”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는데.”

    헬릭스가 본인이 타고 온 마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했을 때, 시아는 이렇게 한마디를 뱉었을 뿐이었다.

    ‘…아.’

    “아직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레논은 귀가 빨개진 황자를 보고 혀를 끌끌 찼다.

    “레이디 켈튼도 참 독특하신 분이네요. 대부분은 평생 한 번 타볼까 말까 한 마차를 구경이라도 해보고 싶어서 타겠다 하는데.”

    “켈튼의 마차를 타던 사람이니 황실의 마차는 눈에 안 들어왔을지도 모르지.”

    아직도 제 손 위에 조심스레 올라온 희고 보드라운 피부의 감촉이 생생했다.

    ‘레이디 시아 켈튼. 제게 당신의 첫 번째 춤 파트너가 될 영광을 주지 않겠습니까?’

    시아는 한참을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렸다. 거절당하면 어쩌나 초조한 마음에 애써 태연한 척 농담을 떠올리는 중이었는데.

    ‘…제가 오히려 영광인데요.’

    분명 그녀는 당황스러워했지만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하늘 끝까지 치솟았던 긴장감이 그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안도와 동시에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 깊숙이에서 용암처럼 흘러나왔다. 그대로 팔을 타고 손끝까지 번져나가 시아의 손이 닿은 곳까지 체온이 급속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가 이토록 환희했음을 눈치챘을까?

    헬릭스는 여전히 자신의 손이 뜨겁다고 느꼈다.

    “그렇게 좋아하시면서 왜 진작 고백해 보시진 않고.”

    “…접점이 없었는걸.”

    “그래서 그렇게 지금까지 레이디 근처만 빙빙 돌았던 겁니까? 레이디 켈튼이 졸업할 때까지 말만 몇 번 깔짝깔짝 걸다가?”

    “레논. 깔짝깔짝이라니. 내가 얼마나…….”

    “일단 타시죠. 레이디 켈튼이 마차 탑승을 거부해 주신 덕에 시간을 벌었네요. 내무부 회의에 참관하시기 전에 간식 정도는 드실 수 있을 겁니다.”

    헬릭스는 자신을 마차에 밀어 넣으려는 레논에 얼른 마차의 문고리를 잡고 버텼다.

    “내가 분명 못 간다고 했는데. 취소 안 했어?”

    “아, 레이디 켈튼과 점심 식사를 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거절당하실 것 같아서 따로 회의장엔 연락을 안 했습니다.”

    “너무하네.”

    “자자, 어서 갑시다. 황자 전하.”

    결국 레논에게 진 헬릭스가 마차에 올랐다. 갈리프도흐의 정문에서 내내 이목을 끌던 황실의 마차가 요란스럽게 멀어져 갔다.

    황실 마차가 사라진 거리.

    바로 그 건너편엔 지금까지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요르문이 경악한 채로 서있었다.

    * * *

    갈리프도흐에서 돌아온 시아가 맞이한 건 한바탕 뒤집어진 저택과 헤이든조차 달래기를 포기한 요르문이었다.

    “요르문 님.”

    “우리 딸 인기도 많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미련하게 네 데이트를 방해할 뻔했지 뭐야.”

    “헬릭스 전하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저도 전하께서 춤 신청을 하실진 몰랐는걸요.”

    “그 시간에 연구실에 가려 했던 내가 바보지. 눈치 없게 왜 대학에 가선.”

    시아는 진땀을 뺐다. 단단히 삐져버린 요르문은 황제가 와도 달랠 수 없을 정도였다.

    왜 하필 황자 전하가 날 배웅하던 걸 보셔가지고는.

    “아가씨. 먼저 올라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러다가 또 잠잠해지실 겁니다. 헤이든은 계단을 가리키며 눈짓했다.

    “아녜요.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거니까.”

    헤이든은 결국 눈치를 보다 자리를 떴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요르문의 칭얼거림을 받아주려면 보는 눈이 적을수록 덜 민망했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응접실에서 요르문과 시간을 보낸 후에야 시아는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슬슬 짐을 챙겨볼까.”

    세 번째 시간 여행은 내일 늦은 오전 중에 이루어진다. 일기장의 시아 켈튼은 의술원에서 환자를 보고 나오는 길에 곧바로 세 번째 시간 여행에 휘말렸다고 했다.

    그 바람에 흰 가운에 청진기만 건 채 빈손으로 열차 객실 복도 바닥에서 눈을 떴다고 했지.

    티켓 검사를 하던 승무원에게 승객이 아닌 것이 발각되어 하마터면 다음 정차역에서 경찰에 잡혀갈 뻔했지만, 정말 운 좋게도 마침 특등석에서 걸어 나오던 라크시스를 만나 그의 변호를 받고 유치장 신세를 면하게 된다.

    “일기장의 시아 켈튼은 라크시스를 만난 게 기막힌 우연이라고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하필 그녀가 떨어진 열차에 라크시스가 타고 있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마류 이상 현상.

    일기장에 따르면 라크시스는 세 번째 시간 여행에서 시아 켈튼을 매우 추궁했다고 한다.

    ‘당신 정체가 뭡니까?’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말도 없이 또 이렇게 나타나지. 이 괴상한 차림은 또 뭐고. 당신이란 사람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워지고 말아.’

    ‘내가 아는 건 당신이 마류 이상 현상과 관련이 있다는 것뿐이야.’

    ‘시아 켈튼. 말해봐요. 당신은 뭐죠? 당신의 이름은 시아 켈튼이 맞습니까?’

    하지만 일기장의 시아 켈튼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증거로 내밀 만한 미래가 적힌 일기장도 없었다. 그러면서 다짜고짜 본인이 칠십 년 후의 미래에서 왔다고 하면 누가 그런 말을 믿어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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