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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56)화 (56/292)

56화 

“…그래?”

헬릭스는 당황한 마음을 애써 삼키며 되물었다.

서점 앞에 켈튼의 마차가 있는 것을 보고 혹시나 싶어 들어왔던 참이다. 책을 고르는 척을 하며 점원에게 시아의 행방을 물었고.

‘검붉은 머리의 아가씨라면 앨런 어셔 코너로 가셨어요.’

앨런 어셔 코너라는 말에 그가 읽었던 소설의 내용들을 열심히 상기시키며, 그녀에게 다가갔었다.

책에 열중한 시아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렸다. 그녀의 독서를 방해하기 싫어서 표지를 덮기만을 기다렸다가 말을 걸었던 건데.

앨런 어셔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그게, 음. 내용이 허무맹랑하거든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네?”

헬릭스는 재빨리 노선을 바꿨다.

“실제 사건이 바탕이 되었다 하니 궁금해서 기록관에 가봤거든. 그런데 다른 게 많더라. 미제 사건도 생각보다 많았고.”

“기록관이라면 갈리프도흐 고문헌 및 역사 기록관, 거기 말씀하시는 거예요?”

“응. 왜?”

헬릭스는 아까와 달리 시아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상관은 없었다.

이 눈이 바로 무언가에 관심을 보이는 눈이구나.

빛나고, 또렷하고, 예쁜.

헬릭스는 시아의 시선이 제게 향해있다는 사실에 숨을 참으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저도 한번 가보려고요.”

“하하. 앨런 어셔 때문에?”

“…그럴지도요.”

시아는 또다시 애매한 대답을 남겼다. 그러고는 곧장 카운터로 향해 점원의 귀에 대고 무어라 말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헬릭스는 불안해졌다. 그녀가 이대로 떠나는 걸까?

“헬릭스 전하. 전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시아가 도로 돌아와 짧은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문고리를 잡고 돌리자 서늘한 아침 공기가 헬릭스의 발치까지 밀려들어 왔다.

그 덕에 정신을 차린 헬릭스는 다급하게 뛰어나갔다.

“졸업생은 도서관 출입이 제한되어 있을 텐데.”

마차에 오르려던 시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헬릭스는 시아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재빨리 선수를 쳤다.

“같이 가자. 나랑 같이 가면 들어갈 수 있을 거야.”

* * *

“점심 먹었어?”

“정확히는 아침이지만요.”

시아와 헬릭스는 갈리프도흐의 내정을 걷고 있었다. 고즈넉한 중정은 하얗게 흐드러진 이팝나무가 가득했다. 분명 동창회 날에도 이 광경을 봤었지.

그간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새삼 시간 여행을 했음이 피부에 와닿는다. 동창회 후에 이 주는 넘게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중정엔 떨어진 꽃 하나 없이 나무가 그대로였으니까.

“배고프겠다. 이따 같이 간단하게 뭐라도 먹을래?”

“…아침을 정오에 먹어서요.”

“하하. 로드 켈튼의 생활 패턴이 극악인 건 유명하긴 하지.”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두 사람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하나는 제국의 황자였고 다른 하나는 미지의 레이디, 시아 켈튼이었으니까.

지나가던 학생들의 눈길이 두 사람에게 머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헬릭스와 달리 시선이 익숙하지 않은 시아는 조금씩 움츠러들었다.

시아는 헬릭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수많은 시선에도 태양처럼 당당했다. 학부 시절에도 인기가 많더니. 황자라서 대중 앞에 설 기회가 많기도 했겠지.

애초에 학과부터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가 헬릭스와 접점을 가진 것이라곤 요르문과 함께 황제를 알현하러 갔을 때가 전부였다. 그땐 완전히 예를 갖춰 황족인 헬릭스에게 고개를 숙이느라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었다.

도대체 헬릭스 전하와는 언제부터 이렇게 대화하는 사이가 됐지. 클럽조차 같이 해본 적이 없는데. 동창회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이 놀랍긴 해도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았으니까.

신기한 일이었다.

시아는 시선을 돌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때문에 괜히 여기까지 발걸음하신 거 아니신지…….”

“아냐. 나도 필요한 자료가 있었어. 어차피 왔어야 됐는데 잘 됐지 뭐.”

걷다 보니 어느새 도서관에 도착해 있었다. 사서는 헬릭스를 보더니 이미 언질받은 것이 있는 듯 두 사람을 들여보내 주었다.

“난 여기서 책을 찾아볼 테니까. 사서를 따라가면 고문헌 역사 기록실을 안내해 줄 거야.”

헬릭스는 정말로 볼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일반 서가를 향해 그대로 떠나버리자 시아는 도서관 로비에 덩그러니 남겨지고 말았다.

“절 따라오세요. 레이디 켈튼.”

이용객이 있을 때만 여는지 고문헌 역사 기록관은 어두컴컴했다. 사서가 하나둘 불을 켜자 오래된 종이에서 풍기는 콤콤한 냄새가 확 다가왔다.

“찾으시는 자료가 무엇이신가요?”

“3517년에서 3522년 사이의 신문들을 보고 싶은데요.”

사서는 곧 서가 한쪽에서 연도별로 정리된 두꺼운 파일을 꺼냈다. 관리가 잘 되어있는지 파일 위에선 먼지 한 톨 날리지 않았다.

펼쳐 든 신문은 시아가 익히 알고 있었던 모르간 타임즈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발행일자가 3517년으로 인쇄되어 있을 뿐이다.

사서는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기록관의 자료가 귀한 것이었기에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시아는 그의 눈치를 보면서도 거침없이 파일을 꺼내 일기장의 빈 공간에 메모를 시작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 * *

“아직도 보고 있어?”

“…헬릭스 전하.”

헬릭스는 어느새 양손 가득 빌린 책을 들고 있었다. 시아가 생각보다 기록관에서 빨리 나오지 않자 찾아온 모양이었다.

“필요한 자료는 찾았고?”

“데려와 주신 덕분에요.”

“보아하니 아직 의문이 덜 풀린 눈치인데.”

헬릭스는 고개를 갸웃 들이밀며 시아를 바라보았다. 시아는 어떻게 보면 간절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눈빛을 외면하려다 실패했다. 그의 눈동자가 대놓고 ‘널 도와주고 싶어’라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아는 결국 머뭇거리며 신문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황혼 국교회 말이에요.”

파일을 열자마자 시아가 확인한 건 헨리 던로의 최후였다. 지금까지도 제국 최악의 살인마로 꼽히는 그는 결국 광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고 적혀있었다.

재키 레이븐의 악명이 워낙 높았던지라 수많은 자극적인 기사가 몇 날 며칠 동안 연이어 실려있었는데, 개중 대부분이 재키 레이븐의 배후로 지목된 황혼 국교회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재키 레이븐의 검거 이후였다.

‘이거 단순한 이단이 맞나?’

제국 내에서 벌어진 강력 범죄 사건 중 상당수에 황혼 국교회가 연루되어 있었다. 그것도 처음 수사 땐 밝혀지지 않았다가 뒤늦게 현장 특정 표식이나 성서를 발견하곤 황혼 국교회가 관련되어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는 식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용의자를 잡지 못해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었다.

심지어 황혼 국교회는 사건 당시의 기사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첫째는 경찰에서 기자에게 사건 관련 정보를 넘기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황혼 국교회에 대해 조사한 사건들 대부분이 이상하게도 수사가 제대로 마무리 지어지지 못한 채 흐지부지 종결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기사엔 수많은 괴담이 사실처럼 실려있었다. 재키 레이븐은 사실 죽지 않았다든가, 현관에 흰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 사람은 악마의 지목을 받은 것이라든가, 모르간발 술란행 열차 중 4025호는 존재하지 않는 열차니 타선 안 된다든가.

그중 눈에 띄었던 건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 매몰 사고 현장에 나타났던 귀신이었다.

‘라크는 분명 광룡의 봉인 때문에 지하에서 매몰 사고가 벌어졌을 거라 했는데.’

시아는 의아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마도 시대의 종말 이후 황혼 국교회가 사실상 소멸되었음이 확인된 후, 그 많던 괴담의 원흉이 이단인 황혼 국교회였음을 경찰이 직접 발표했으니까.

고대 마법사 카얄은 광룡의 봉인을 파괴시켜 광룡의 부활을 꾀한다고 했었다.

그리고 라크시스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두고 있는 것에 비해 봉인의 마법 자체는 미약할지도 모른다고 했지. 복잡하게 설계된 금고를 여는 열쇠가 한낱 쇠막대에 불과한 것처럼.

애초에 요르문과 라크시스가 봉인이 아니라 마류 이상 현상을 연구하게 된 것도 봉인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불안정하던 봉인은 카얄에 의해 쉽게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러곤 오토마톤의 심장처럼 폭발한 것일 테고. 아르카나 중앙역 지하의 공사 현장에서도 광룡의 봉인이 파괴되었기에 매몰 사고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황혼 국교회의 짓이라고?

카얄이 광룡의 봉인을 파괴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이 사건들을 모두 황혼 국교회에서 벌인 걸까요?”

시아는 혼잣말에 가까운 물음을 뱉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헬릭스는 뒤늦게 답했다.

“…과장과 사칭이 섞여있을 가능성이 높긴 해.”

시아가 원래 이런 사건에 관심을 가졌던가.

잔뜩 찌푸려진 시아의 미간은 그녀가 신문 내용에 몰두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난 아직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많구나. 헬릭스는 시아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뇌 속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대부분의 사이비가 그러하듯 황혼 국교회에서도 신도들을 세뇌했을 거야.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으니까. 그게 불행한 어린 시절이든 뭐든 잘 파고들기만 하면 믿음을 보이는 건 시간문제일 거야.”

어쨌거나 헬릭스는 시아의 궁금증을 최대한 해소해 주고 싶었다. 사실은 그녀의 주의가 조금이라도 제게 더 머물렀으면 했던 것이었지만.

“재키 레이븐도 그랬다며. 아버지인 던로 남작이 극도로 보수적인 국교인이었다지. 죄 없는 부인을 간음한 자로 몰아가면서 어린 아들 앞에서 때려죽였다더라.”

“…아.”

헨리 던로는 그 후로 그런 아버지 밑에서 홀로 자랐다. 어머니를 죽인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바로 그 아버지로 인해 비뚤어진 관념을 가지게 된 것이다.

헬릭스는 모르간 타임즈가 아닌 다른 가십지를 꺼내 들어 보여주었다.

“옹호할 가치가 없는 살인자이지. 약혼자였던 스칼렛 포드가 그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고 해. 그녀가 다른 남자들에게 추파를 던진다는 망상을 해왔다고 재키 레이븐이 직접 진술했고.”

스칼렛 포드.

라크시스와 함께 헨리를 함정에 빠트리는 계획을 세우며 봤던 이름이었다. 심지어 그녀를 연상시키는 차림을 직접 하기까지 했었지.

그래. 헨리 던로가 재키 레이븐이 된 경위는 이제 알 것 같았다. 추악한 변명이 곁들여져 있다는 점에서 절대 옹호할 수는 없지만.

그런데 이게 왜 황혼 국교회와 관련이 있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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