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55)화 (55/292)

55화 

“카트린.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지 말란 말이야.”

“마리. 너 얼마 전에도 고백 받은 거 알고 있거든.”

“그건 생판 남한테 온 청혼서라니까. 가문 대 가문!”

“옛날에 귀족들은 다 그렇게 연애하고 그랬다면서. 지난번에 청혼서 보낸 남자는 잘생겨서 좋댔잖아.”

“지금이 옛날이랑 같냐고! 잘생겨도 성격이 안 맞을 수 있잖아. 연애 결혼, 연애 결혼 몰라? 아휴, 내가 말을 말지.”

마리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려본 카트린은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 대화를 안 받아줬다. 결국 마리는 구시렁거리며 다시 혼잣말을 했다.

“이런 곳에 잘생긴 남자랑 오면 얼마나 좋을까.”

시아는 조용히 웃으면서 마리의 감상을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뒤따른 마리의 말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로렌이 왜 라크시스와 사랑에 빠졌는지 알겠어.”

마리는 멈춰 선 시아를 돌아보았다. 혼이 나간 것처럼 멍한 얼굴이다.

시아도 한 땐 마리 자신과 함께 도서관에 박혀 앨런 어셔의 소설을 독파했던 사람이었다. 겉으로 표현하진 않아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잘생겼지, 매너 있지, 성격 좋아. 말도 예쁘게 해, 옷도 잘 입고. 이런 곳에 연인을 데려올 줄도 알지.”

마리는 감상에 젖은 눈으로 말했다.

“시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 * *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시아는 저택을 나섰다.

“어이쿠, 아가씨.”

저택을 관리하던 헤이든은 이 층에서 뛰어 내려오는 시아를 보고 흠칫 놀랐다.

“헤이든, 저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아침도 거르시고 이리 급하게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

“금방 와요! 요르문 님 일어나시면 같이 먹을게요!”

헤이든은 계단을 울리며 멀어져가는 굽 소리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요르문은 정오에 일어나 아침을 먹긴 하지만, 아가씨는 주인님과 달리 제때 식사를 하시는 편이었다.

로건! 예, 아가씨. 타시기만 하면 됩니다. 기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심지어 마차를 대기해 두라고 이미 말씀을 전달하셨나 보다.

하긴. 아가씨께선 한번 결심하신 건 곧바로 해야 직성이 풀리시지. 이럴 땐 요르문의 딸답다는 생각이 든다. 헤이든은 발길을 돌려 주방으로 갔다.

“준비를 조금 늦추게. 아가씨께서 잠시 외출하셨으니.”

시아가 달려간 건 켈튼 저택에서 가장 가까운 서점, 달리아였다.

문간에 달아놓은 종이 울렸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찾아오는 손님이라니. 점원은 오늘 입고되는 유명 작가의 신간이 있나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오래된 경첩이 손님의 출입을 알렸다. 점원은 빗자루로 가게를 쓸다 말고 오늘의 첫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입구가 잘 보이는 곳에 섰다.

“안녕하세요. 서점 달리아입니다.”

“앨런 어셔의 소설은 어디에 있나요?”

다짜고짜 묻는 손님의 얼굴은 굉장히 다급해 보였다. 이 시간에 뛰어오기라도 한 건가? 앨런 어셔의 소설에 뒤늦게 입문했다면 그럴 법도 했다.

앨런 어셔의 연작은 칠십 년이 다 되도록 제국민이 사랑하는 최고의 소설 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명작으로 꼽히는 ‘폭풍우 치는 28번지의 밤’은 뮤지컬과 영화로도 여러 번 나왔을 정도이니.

그러고 보니 요즘 한창 세인트 밀레이나 돔이 북적일 시즌이지. 점원은 흐뭇한 표정으로 아직도 숨이 차서 헐떡이는 손님을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점원의 뒤를 따라간 코너는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금박으로 제목을 박아넣은 양장본의 견고한 책등이 책장 하나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영화 대본, 극본이 밑으로 꽂힌 가운데 낯익은 흑백 초상이 모조 훈장과 함께 떡하니 전시되어 있었다.

[대 세페란테 제국이 사랑하는 소설가, 어셔 남작 위의 주인공]

[S. 앨런 어셔]

슈나이더 앨런 어셔. 초상의 주인은 칠십 년 전 메이덜린 경찰서에서 근무하던 바로 그 슈나이더 경사였다.

시아는 할 말을 잃었다.

“하…….”

“여기서부터 출간 순서대로 진열되어 있으니 천천히 보시고,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 주세요.”

직원은 시아의 한숨을 어마어마한 권수의 책 때문이라고 오해한 듯했다. 주문한 책은 배달도 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가 버렸다.

시아는 그의 첫 작이자 제일 인기작이라는 ‘폭풍우 치는 28번지의 밤’을 꺼내 그 자리에서 훑기 시작했다.

* * *

어젯밤, 장장 두 시간 반에 가까운 극을 관람하고 나온 시아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슈나이더 경사가 저런 이미지라고?’

‘시아, 너도 아쉬웠지? 소설에선 분위기 있고 고독한 미남이었는데. 연기로는 그 묵직하고 남자다운 느낌을 다 못 살린 것 같더라.’

‘뭐?’

마리의 맞장구에 시아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애초에 그녀가 기억하는 재키 레이븐 소재의 소설과는 전혀 내용이 달랐다. 원래 소설에선 연쇄 살인마 재키 레이븐의 정체가 끝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재키 레이븐 역의 배우가 대중을 기만하는 노래를 부르고, 경찰과 주인공인 탐정이 이를 미제 사건으로 남겨두는 것으로 끝이 났는데.

‘폭풍우 치는 28번지의 밤’은 시아가 바꿔버린 과거의 시간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 연작은 작가조차 유명하다고 한다. 앨런 어셔. 부티크 블레어에서도 언급되었던 이름이다.

재키 레이븐이 등장하는 원래 추리소설의 작가는 다른 사람이었는데. 시아에게 앨런 어셔는 처음 듣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앨런 어셔라는 작가는 슈나이더 경사를 실제로 본 적이 있긴 한 걸까.’

앨런 어셔의 작품에서 주인공인 슈나이더 경사는 젊고 유능한 경찰이었다. 맡은 사건은 언제나 해결하고, 그로 인해 실적도 높지만 상부의 시기와 질투로 조그마한 메이덜린 경찰서에 처박혀 있다.

치안과 범죄의 최전선에서 놀랍도록 실적을 보이는 그는 사실 묘령의 탐정 로렌 허슬러와 협력하는 관계였다. ‘폭풍우 치는 28번지의 밤’은 바로 슈나이더가 로렌 허슬러를 처음 만나는 편이었다.

앨런 어셔의 팬은 슈나이더와 로렌 허슬러가 연인 관계로 진전되기를 은근히 희망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끝끝내 슈나이더를 홀로 남겨둔다.

로렌 허슬러에겐 라크시스 옌이라는 연인이 있다는 설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이 굵고 남성적인 미를 자랑하는 슈나이더에게 로렌은 종종 마음이 흔들린다. 그때마다 이를 질투하며 로렌을 향한 사랑을 아낌없이 표현하는 라크시스를 보고 사람들은 제국 소설 주인공 중 가장 매력적인 사랑꾼이라 평했다.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시아로서는 어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처음엔 마리가 라크시스를 두고 한 감상에 당황해서 소설을 찾아보려 했는데.

‘로렌이 왜 라크시스와 사랑에 빠졌는지 알겠어.’

‘잘생겼지, 매너 있지, 성격 좋아. 말도 예쁘게 해, 옷도 잘 입고. 이런 곳에 연인을 데려올 줄도 알지.’

성격이 좋고 말을 예쁘게 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재수 없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 성격이면 연인부터 생길 리가 없었다. 뭐, 잘생기긴 했으니 또 모르지만.

하지만 막상 서점에 와서 읽기 시작한 소설엔 페이지마다 말 그대로 ‘소설’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작가 S. 앨런 어셔는.

소설의 주인공인 슈나이더 경사 본인이었다.

‘폭풍우 치는 28번지의 밤’을 덮은 후, 시아는 분통을 터뜨렸다.

“이 인간이 정말…….”

“누구 때문에 그러는 건데?”

“슈나이더, 아니 어셔 작가 말이에요. 경찰이 이렇게 거짓말을 많이 해도 되나? 누가 누굴 좋아하고 뭐, 누가 고독한 미남자…….”

시아는 질문에 대답하다 말고 멈칫했다.

그런데 지금 나한테 말을 걸 만한 사람이 서점에 있나?

시아의 고개가 뻣뻣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떡 벌어진 상체를 따라 각진 턱, 은근하게 올라간 입꼬리, 눈 밑의 보조개가 보였다. 여전한 다크서클과 결 좋은 금발을 보자마자 시아는 눈앞의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당황한 나머지 사레가 들렸다. 그럼 설마 내가 욕하는 것도 다 본 거야? 시아는 헛기침을 하며 새빨개진 얼굴을 한 손으로 가렸다.

“…헬릭스, 전하?”

“안녕, 시아?”

헬릭스가 환하게 웃었다. 시아의 헛기침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녀가 들고 있던 책을 받아 들곤 손수건을 건넸다.

“괜찮아? 내가 갑자기 말을 걸어서 놀랐나 보네.”

동창회 때도 과자 먹다가 그러더니. 황자는 미안한지 재빨리 점원에게 가 물을 얻어왔다.

하지만 시아는 동창회 때도 그랬다는 말에 물을 마시다 또다시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앞으로 네게 말을 걸 땐 인기척부터 내야겠는걸.”

“전하께서 여긴 무슨 일로…….”

“학생이 책을 사러 온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

헬릭스는 들고 있던 책을 보여주며 어깨를 으쓱였다.

[신과 마법, 엔트로피의 상관관계: 인간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생물학이라는 학부 주전공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천문학을 복수 전공하고 신화학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황자는 구매하는 책조차 남달랐다.

헬릭스는 시아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난 후, 그녀의 뒤편에 가득 꽂혀있는 책을 곁눈질했다.

“네가 앨런 어셔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제가요? 절대 아닌데. 누가 그래요?”

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황자는 대답이 없었다. 시아가 갈리프도흐를 다니던 시절, 절친한 동기인 마리 로젠버그와 도서관을 자주 드나드는 걸 보고, 사서에게 물어봤던 것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책은 무엇인가.

분명 앨런 어셔의 연작들을 읽었다고 했는데.

“어셔의 책을 사러 온 거야?”

“…네.”

헬릭스는 시아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좋아한다기에 진작 소장했을 거라 생각했어.”

“워낙 많기도 하고…….”

변명 같은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팬이라면서 책을 갖고 있지 않은 게 부끄러운 건가. 헬릭스는 이때다 싶어 시아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나한테 앨런 어셔 연작 특별 한정판이 있는데 이젠 다 읽어서 말이야.”

그녀의 포도알 같은 자줏빛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흥미가 동한 게 분명했다.

“이따 황궁에 돌아가면 보내줄게. 소장할 거면 한정판이 의미 있을 거야. 네가 어셔의 팬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헬릭스는 그녀에게서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대답을 듣고 말았다.

“…죄송하지만 제가 딱히 이 작가를 좋아하진 않아서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