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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54)화 (54/292)

54화 

* * *

“아가씨. 일어나실 시간입니……. 오, 이런.”

늦은 아침, 메이드와 함께 시아의 방을 찾았던 노집사 헤이든은 그만 놀라고 말았다.

오랜만에 저택에 돌아온 아가씨가 이불에 파묻혀 푹 잠들어 있진 못할 망정 산더미 같은 책 사이에서 옹송그려 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이든은 재빨리 담요를 가져와 책상에 엎드린 시아의 등에 덮어주며 방을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창문이 열려있었군. 아직까진 아침 공기가 쌀쌀한 시기였다. 바짝 긴장한 채 움츠러든 아가씨의 뒷모습이 노집사에겐 안쓰럽게만 보였다.

헤이든은 조심스럽게 시아를 깨웠다.

“이리 잠을 청하시면 온몸의 근육이 놀라고 말 겁니다.”

“…아. 헤이든.”

선잠이 들었었는지 시아는 곧장 부스스 일어났다.

“의술원에 가셔도 학문을 하시던 습관은 여전하신가 봅니다.”

헤이든이 주름을 부드럽게 접으며 미소 지었다.

그 말에 시아가 얼른 책상 위를 너저분하게 덮은 종이들을 치웠다. 헤이든은 일기장으로 보이는 노트의 끄트머리가 낙서에 가까운 수많은 필기 밑에 숨는 것을 보았다.

아하. 일기를 들키는 건 부끄러우실 테지. 헤이든은 일부러 시선을 돌려 시아가 책상 위를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이내 시아가 멋쩍게 머리를 긁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런 건 아녜요. 그런데 언제 시간이 이렇게, 아윽.”

밤새 엎드려 자서 허리가 배긴 모양이었다. 기지개를 켜다 말고 시아가 앓는 소리를 냈다. 결국 헤이든은 시아를 침대로 데려가 앉혔다.

“아침 식사는 물리라 할까요?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시면 뭉친 근육들도 긴장을 풀 텐데요.”

“요르문 님은요?”

“주인님이야 언제나 한결같으시지요.”

“또 오이 샌드위치만 먹고 밤을 새우셨군요. 맞죠?”

헤이든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무언의 미소에서 긍정의 대답을 읽어낸 시아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아가씨와 아침 식사를 하시겠다고 내려오시려 하긴 하셨습니다.”

“그럼 못 내려오셨다는 말이네요.”

“예. 결국 소파에 쓰러져 주무시더군요.”

시아와 헤이든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요르문 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구나.

“그럼 전 씻는 걸 먼저 할게요. 어제 깜빡 잠드는 바람에. 어차피 요르문 님이랑 아침을 먹을 게 아니니까요.”

“이런. 주인님이 아가씨를 기다리게 하셨군요. 안 그래도 어제 주인님이 밤늦게 씻으셔서 잔소리를 했던 참입니다만.”

“밤늦게요……?”

요르문이 씻으러 간 건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노을의 끝자락에서 어스름한 밤하늘이 번져오던, 아직은 이른 시간이었는데.

“하긴 두 분 주인님은 아직 한창이실 나이이니 밤도 낮처럼 느껴지시겠습니다만, 이 늙은이에게 해가 진 순간은 언제나 밤이랍니다.”

“아…….”

모호한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요르문 님은 저녁 식사 후에 어디에 계셨던 걸까. 헤이든의 대답엔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당장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거의 한 세기를 살아온 노집사의 말이었으니까.

“그럼 물을 데워놓겠습니다.”

방 정리를 마친 메이드를 먼저 내보내고, 뒤이어 헤이든이 물러났다.

문을 닫기 직전, 시아의 부름이 헤이든의 발을 붙잡았다.

“헤이든.”

“예, 아가씨.”

온화하게 주름진 노인의 얼굴은 구전설화에 나오는 현자 같았다.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도 왠지 털어놓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어젯밤 그녀가 일기장을 붙들고 치열하게 고민했던 과거의 한 조각도 이 노집사라면 빛바랜 필름을 꺼내 추억을 되짚어보듯 읊어줄 것 같았다.

“헤이든은 요르문 님을 제외하고 켈튼가의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나요?”

잠시 기억을 되짚어 보던 노집사는 아련한 눈으로 대답했다.

“…켈튼가에 몸담은 이래 단 한 분도 없었습니다.”

“요르문 님의 부모님이라든가, 아니면 친척 누님이라든가…….”

“제 기억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십니까?”

시아는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제겐 요르문 님이 유일한 가족이잖아요. 이 집이 제 고향이고요. 요르문 님도 그러실까 싶어서…….”

“오, 이런. 마음이 여리기도 하시지.”

시아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되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헤이든이 알아서 오해를 해준 것 같았다.

“아가씨.”

노집사는 이제 완전히 시아를 향해 돌아서 있었다. 그녀는 제게도 손녀와 다름없었던 소중한 사람이었다.

문득 아가씨가 훌쩍 컸다는 것이 느껴졌다. 친우가 죽고 평생 고독하게만 살 것 같던 요르문이었다. 어느 날 주인이 홀린 듯이 데리고 온 아가씨는 작고 어리기만 했는데.

‘주인님을 보듬어주실 나이가 되셨구나.’

이제 그녀는 어엿한 켈튼의 사람이었고, 요르문의 단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헤이든은 문가에 서서 더는 시아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눈시울이 뜨끈해지는 것이 괜히 주책맞아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주인님은 외로운 분이시지요. 구십 평생 그분을 모셔오면서 단 한 번도 가족이라 불릴 만한 사람을 곁에 두시는 걸 본 적이 없었습니다. 친척까지 포함해서요.”

헤이든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아가 아까부터 말없이 바닥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굳은 얼굴과 복잡한 눈빛. 아마도 헤이든 본인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탓일 터다.

이럴 때 상대를 빤히 바라보는 건 무례한 짓이다. 아가씨가 무안해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주인님이 아가씨를 이토록 귀애하시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헤이든은 시아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방을 나섰다.

* * *

또 하루가 흘렀다.

수도 모르간 남부. 이른 저녁의 대극장 세인트 밀레아나 돔엔 사람이 북적이고 있었다. 바로 앞 대로의 가로등마다 금술을 단 짙은 현수막이 펄럭였다. 마치 황제라도 행차한 것 같은 분위기였다.

[폭풍우 치는 28번지의 밤]

현수막에 적힌 제목 위로 주역 배우들의 프로필 사진이 교차되어 있었다. 마리는 한참 동안 오늘의 주역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질적인 엔진 소리를 듣고 곧장 거리를 향해 소리쳤다.

“시아 켈튼!”

갈리프콜 연기를 뿜으며 느릿하게 달리는 마차들 사이로 고전적인 외관을 자랑하는 켈튼의 마차가 미끄러지듯 멈췄다.

마부석에선 제복을 갖춰 입은 기사가 내려서 마차의 문을 열었다. 시아는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계단을 내려오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마리를 보고 잰걸음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바빠서 약속도 다 잊었다더니 그래도 제때 왔네?”

“누구랑 한 약속인데. 당연히 지켜야지.”

마리는 냅다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냈다.

“카트린에게 다 들었어. 너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며? 어쩜 진짜 서운하다. 내가 너 의술원 스케줄 맞춰준다고 수업 날짜도 바꾸고 왔는데.”

마리는 양손을 허리춤에 떡 걸치곤 볼을 부풀렸다. 시아보다 한 뼘은 훨씬 더 작은 마리는 단발의 오렌지 블론드를 보기 좋게 말아 양옆으로 볼륨을 낸 상태였다. 그 모습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내고 있는 마리를 보고 있자니 마치 토라진 푸들이 귀를 흔드는 것 같아서 순간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웃어? 너 지금 웃었냐고. 내가 화내는 게 웃겨? 정말 서운해서 못 살겠네. 패트릭이 고백한 것도 다 모르는 척했다며. 그때 내가 카트린이랑 너 위한다고 앨리어스 그 자식이랑 싸우고 다니느라 개고생을 했는데.”

“미안해. 정말로. 내가 요즘 진짜 정신이 없었어.”

“연락도 뜸해지고. 동창회 때도 우리가 먼저 연락했잖아.”

“회복과에 사람이 부족하다 보니까…….”

“흥. 시아 넌 맨날 그 핑계야.”

마리는 이제 팔짱을 낀 채 떡하니 짝다리를 짚고 있었다. 마리를 오래 봐왔던 시아는 그 자세에서 단박에 위험신호를 감지했다.

진짜 화났구나.

시아는 결국 사람 많은 대로 한복판에서 마리의 팔을 감싸 안고 애교 섞인 사과를 해야만 했다.

“마리.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연락 못해서 미안해.”

“됐어. 이 거짓말쟁이야.”

의술원에 가도 우릴 잊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키 차이 때문에 시아의 품에 쏙 들어간 마리는 서운함을 담아 웅얼거렸다.

오랜 친구가 그러고 있으니 복잡미묘한 마음이 심장을 콕콕 쑤셨다. 양심이 찔릴 때와 비슷한 미안함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아이작이 나한테 반차계를 직접 써줬다고 하면 믿어주겠어?”

히익. 내내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있던 카트린에게서 질겁하는 소리가 났다.

마리는 벌떡 시아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되물었다.

“뭐? 그 짠돌이 대머리 독수리가? 너보고 쉬라고 했다고?”

“…오늘부터 휴가도 냈는걸.”

“정말로? 그 인간이 휴가도 받아줬단 말이야?”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술원 원장이자 시아의 직속 상사인 아이작 맨틀러 교수에 대한 악명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담당 교수로도, 상사로도, 심지어 의술사와 환자의 관계로도 만나기 싫은 사람이었다.

마리는 한숨을 푹 쉬며 시아의 양팔을 붙들었던 손을 떨어뜨렸다.

“하, 어쩔 수 없지. 켈튼 아가씨. 대머리 독수리가 인정했다고 하니 이번엔 넘어가 줄 수밖에 없네.”

“마리.”

“왜.”

“내가 이따가 술 사줄게. 그것도 네가 좋아하는 바에서.”

일순 마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카트린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시아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마리는 단단히 화가 나선 이따가 뭐라고 말할 거라느니, 이것도 저것도 서운하다고 할거라느니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는 불같은 성격만큼이나 순식간에 화가 가라앉는 편이었다.

“정말?”

“정말.”

“거기 비싼 거 알지?”

“알지.”

시아가 설핏 웃으며 긍정하자 이번엔 마리가 시아의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

“두말하기 없기다? 그럼 얼른 들어가자. 이러다가 늦을라. 시아, 있지. 오늘 주역인 에단이 말이야, 글쎄…….”

시아는 이내 신이 난 마리에게 끌려가기 시작했다. 카트린은 한 발짝 뒤에서 두 사람을 뒤따라갔다.

해가 저물며 분홍빛 노을이 구름 위를 길게 적셨다. 대극장의 크리스털 돔 위로도 아름다운 노을이 파도처럼 부서졌다.

깜빡. 대로에 늘어선 가로등이 하나둘 밝아오기 시작했다. 곧 세인트 밀레이나 돔의 벽면에도 노란 조명이 켜졌다. 극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의 난간에도 층층이 조명이 번져나갔다.

수도의 랜드마크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곡선의 건물은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 아래 황금빛 물결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낭만적인 감상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예쁘다.”

대극장 앞 광장에 멈춰 선 마리가 중얼거렸다.

“…연애하고 싶다.”

“하면 되지.”

마리의 말을 끊은 건 뒤따라오던 카트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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