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53)화 (53/292)
  • 53화 

    “…로드 켈튼?”

    요르문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직원들은 당황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당황한 건 멍하니 옷을 구경하던 시아였다. 그가 시아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곤, 룸을 빠져나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요르문 님. 화, 나셨나?’

    태연하고 침착해 보이지만 시아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모종의 이유로 기분이 상해버렸다는걸.

    “시아야, 나가자.”

    하지만 부티크의 그 누구도 왜 요르문이 이토록 갑자기 화가 났는지는 몰랐다. 시아는 차마 되묻지 못하고 그렇게 부티크를 나오고 말았다.

    * * *

    두 사람이 부티크를 나와 향한 곳은 인근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였다.

    “홍차랑 블랙커피, 아니다. 홍차로 두 잔 주세요.”

    유리 온실을 개조했다는 카페는 마치 봄날의 정원처럼 화사한 생화가 가득했다. 수줍게 연인과 마주 앉은 레이디며 또래 영애들과 즐거운 수다를 떠는 테이블까지.

    의도해서 방문한 건 아니었다. 다만 부티크와 가장 가까운 장소였을 뿐이었다. 사실 시아도 요르문도 혼자 외출해서는 갈 리가 없는 곳이었다. 시아의 경우는 마리가 만나자고 성화일 때를 제외하곤 의술원 밖으로 나갈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고, 요르문의 경우는 시아와 만날 때를 제외하곤 딱히 레이디들과 만남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평소였으면 오랜만의 부녀 나들이에 두 사람 다 들떠 었을 것이다. 시아는 아까와 똑같이 굳은 표정이지만 귀 끝을 붉힌 채 턱을 괴고 시선을 돌린 요르문을 발견했다.

    요르문은 주변의 대화 소리가 만든 희미한 소음에 묻혀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달아오른 두 귀를 숨기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은은한 꽃 내음과 진한 홍차 향 속의 물빛 머리 마법사는 누가 봐도 눈앞의 여자와 부녀 사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정반대의 색을 가진 두 남녀는 전혀 다른 분위기와 신비로움을 풍기는 탓에 오히려 연인처럼 어울려 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의 유명세 때문에 진작 정체를 들킨 상태였다.

    가십 섞인 수군거림이 종달새처럼 날아들었다. 견디지 못한 요르문이 먼저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여전히 시아와 눈은 마주치지 못한 상태였다.

    “저어, 요르문 님.”

    시아는 종업원이 가져다준 찻잔을 요르문에게 내밀었다. 그녀의 부름에 요르문은 겨우 정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저 남자 친구 없어요. 있었다면 요르문 님께 먼저 알려드렸을 거예요.”

    시아는 요르문의 눈치를 살폈다. 요르문은 결국 두 손에 얼굴을 푹 묻고 말았다.

    “정말로……?”

    부끄러움을 가득 담은 한숨이 손 틈새로 미련을 뚝뚝 흘리며 길게 빠져나왔다.

    정답이었다.

    부티크를 나오면서 내내 요르문 님이 왜 저럴까 머리 아프게 생각했는데. 역시 딸의 애인 발언에 울컥 속이 뒤집혔던 모양이었다.

    이토록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니. 과거의 요르문과는 전혀 동일 인물 같지가 않다. 생긴 것도 비슷하고 마류학에 골몰해 엉뚱한 사고를 치는 것도 그대로지만.

    마도 시대의 요르문은 가족이 필요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달까. 친절하고 상냥했지만, 날 의지하고 정을 주진 않았다. 하긴 그땐 가짜 친척이어서 그랬을지도.

    지금의 요르문 님은 피도 안 섞인 내게 이렇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인데. 과거의 요르문은 어쩌다 홀로 살게 됐을까.

    요르문이 손가락 틈을 벌리며 벌게진 눈시울을 빼꼼 드러냈다.

    “사귀어도 돼. 물론이지. 하지만 나는 다만 사랑하는 우리 딸이…….”

    “어허. 여기서 울면 신문에 실리는 거 아시죠? 주간 아르카나 가십지 이런 곳에요.”

    가십지에 실리기 전에 사교계에 먼저 퍼져나가겠지만요. 시아는 뒷말을 덧붙이며 요르문에게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떡해요.”

    “왜, 무슨 일이야. 응? 시아야.”

    “요르문 님 때문에 눈만 높아져서 어지간한 사람은 눈에 안 들어오잖아요.”

    “…거짓말.”

    그렇게 말하면서도 요르문은 배시시 웃고 있었다. 어느새 요르문의 손은 테이블로 내려가 있었다. 사랑하는 딸이 달래주자 순식간에 토라진 것이 풀려버린다.

    시아는 요르문의 손등을 다독이며 마주 웃었다.

    “웃는 것도 예쁘지. 우리 딸.”

    “요르문 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걸 텐데.”

    “아니라고 하는 사람 있으면 다 나와보라고 그래. 눈이 단단히 삐었을 테니 말이야.”

    진한 홍차에 각설탕 두 개가 떨어졌다. 티스푼을 따라 흔들리는 결에 설탕이 서서히 녹아든다. 요르문은 시아가 홍차를 음미하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묻었지. 사랑스러움이.”

    “요르문 님!”

    이번엔 시아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요르문이 키득거렸다.

    “이따 다른 부티크에 들르자꾸나. 드레스 한 벌은 맞춰야 오늘의 데이트가 성공적으로 끝날 테니까.”

    “그러니까 아까 거기서 샀으면 좋았잖아요.”

    “괘씸해서 안 돼. 아니, 괘씸하다기보단…….”

    아냐. 괘씸해. 연인에게 선물? 그것도 라크시스 옌을 닮은 옷을? 요르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입을 마주 열 때마다 두 사람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긴장이 풀린 시아와 요르문은 한참 후에야 대화를 마치고 카페에서 나설 수 있었다.

    * * *

    산더미 같은 짐과 귀가한 시아와 요르문은 집사 헤이든의 지시 아래 준비된 만찬을 즐기고 여유로운 저녁 시간을 보냈다.

    사용인들은 새삼스럽게 아가씨의 존재감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같이 식사도 거르고 서재나 연구실에 박혀있던 집주인이 시아가 저택에 왔다는 이유만으로 정상적인 시간에 저녁 식사를 하고 디저트까지 즐겼기 때문이었다.

    봄기운을 품은 응접실은 장작불이 없어도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정석을 불 대신 놓은 벽난로엔 알록달록한 불티가 날아다녔다.

    요르문이 먼저 응접실을 뜨자 시아가 물었다.

    “먼저 씻으실 거예요?”

    “넌 느긋하게 목욕하는 걸 좋아하잖니. 내가 얼른 씻고 나올 테니 그다음에 네가 욕조를 점령하려무나.”

    시아는 멀어져가는 요르문을 향해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요르문이 계단 너머로 사라지고 나자 시아는 언제 그렇게 여유로웠냐는 듯 벌떡 일어나 부리나케 반대쪽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시아가 그대로 돌진한 곳은 그녀의 방이었다.

    “가방, 어디 있지?”

    다행히 침대 발치에 그녀의 슈트 케이스(겸 왕진 가방 겸 마법 가방)가 얌전히 놓여있었다. 직접 정리할 테니 절대 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가방을 닫을 때 끼워놓았던 옷자락이 같은 위치에 그대로 끼어있는걸 보니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시아는 다급히 가방을 열어 손을 깊게 넣고 휘저었다. 천으로 꽁꽁 싸맨 금속과 길쭉한 쇳덩이의 윤곽이 손바닥에 느껴지자 얼른 낚아챘다.

    두 번째 시간 여행 전, 요르문의 서재에서 가져간 리볼버였다.

    “결국 쓸 일은 없었구나.”

    잘된 일이었다. 사람을 쏘는 행위가 얼마나 잔혹한 결말을 불러오는지는 의술사인 그녀 본인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젠 요르문에게 들키지 않게 권총을 제자리에 돌려놓기만 하면 됐다. 요르문은 평소에 서재에 사용인들이 드나드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씻으러 갔으니 아마 지금 그의 서재는 비어있을 것이다.

    청소는 오전에 한 번 뿐이니까. 시아는 재빨리 방을 빠져나가 요르문의 서재에 도착했다.

    서랍 열쇠 구멍에 가느다란 머리핀을 꽂으려던 시아의 손이 멈칫했다.

    “…아직도 열려있네.”

    그녀가 리볼버를 꺼냈던 왼쪽 맨 밑 서랍은 처음과 다름없이 그대로 열려있었다.

    시아는 당황했다.

    요르문은 겉보기엔 무른 사람처럼 보여도 귀중품이나 연구 물품 하나는 철저하게 관리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것도 내가 시간 여행을 했기 때문에 바뀐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누군가의 사소한 습관마저 그녀가 일으킨 과거의 변화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요르문 님이 나를 가짜 누님으로 만났던 과거도 기억한다면…….

    ‘아냐. 설마. 칠십 년의 간극이 있는데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어?’

    하지만 과거의 시아 켈튼 때문에 날 입양했다면? 가짜 누님과 꼭 닮은 아이에게 시아라는 이름을 붙여 키운 거라면?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무엇도 생각하기 싫었다.

    돌연 아르카나 광장 시계탑의 종소리를 닮은 미지의 깨달음이 그녀의 뇌리를 울렸다.

    광활한 우주. 운명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간다. 수조 개의 톱니바퀴에서 철컥이는 소리가 귓가에 포화처럼 쏟아붓는 것만 같다.

    무의식의 세계,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물레가 새로운 실을 자아낸다. 운명의 실. 찬란한 붉은 실이 그녀의 몸을 휘감고 은하수의 별들 사이로 끝을 모르게 파고들었다.

    톱니바퀴도, 물레도 그 무엇도 실제로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시아는 본능적으로 시간의 물결이 방향을 틀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의도한 것도, 의도하지 않은 것도 모두 그녀의 시간 여행이 초래한 일이다.

    시아에겐 양부로 만난 요르문이 처음이었고, 지금껏 요르문에게도 시아는 양딸로 만난 것이 처음이었지만.

    이젠 알 수 없었다.

    요르문이 처음 마주한 건 가짜 누님인 시아 켈튼일까, 양딸인 시아 켈튼일까.

    마치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와 같은 물음이다.

    시아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내겐 지금이 현재이고, 광룡의 봉인을 지키기로 한 결심은 변함이 없으니까.”

    때론 진실을 모르는 게 약이 될 때도 있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선 더더욱.

    말아쥔 주먹에서 힘줄이 창백하게 도드라졌다.

    시아는 도망치듯 서재를 빠져나갔다.

    * * *

    그렇게 시아가 서재에서 나가고 난 후였다.

    딸깍―

    버튼이 눌리는 소리가 나고, 오래된 높은 책장 하나가 소음을 내며 옆으로 밀려났다.

    책장의 뒤로 보이는 풍경엔 각종 마류학 연구 기계가 가득했다. 중심에선 투명한 마정석이 선이 주렁주렁 연결된 채 받침대 위에서 하얀 빛을 뿜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림자 하나가 홀연히 나타났다.

    작은 열쇠를 들고 곧장 책상으로 향한 그림자는 왼쪽 맨 밑 서랍 앞에 쭈그려 앉았다.

    거침없이 서랍을 열고, 리볼버가 든 안쪽을 확인한 그림자는 할 일이 명확한 사람처럼 서랍을 빠르게 잠갔다.

    그림자는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곧 책장이 다시 닫히고, 서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금 고요 속에 잠겨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