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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52)화 (52/292)
  • 52화 

    “그래서 그때 시아 너 뒷담화 하던 애들 내가 일일이 손보러 다녔잖아.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짜증이 난다니까? 네가 뭘 잘못했다고 그 난리…….”

    “잠시만. 카트린, 네가 애들을 손보고 다녔다고?”

    “어머? 얘 좀 봐? 그때 패트릭 좋아하던 애들이 한둘이 아니었잖아!”

    애들이 패트릭을 좋아했다니. 다들 단체로 눈이 이상해졌나 봐. 시아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아까 전에 만난 패트릭은 그럴 만했다. 사람 좋은 인상에 적당히 잘생겼고, 무엇보다 착한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너 오늘 좀 이상하다? 혹시 어디 아파? 기억이 오락가락하는데.”

    “아, 아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시아는 말끝을 흐렸다. 수화기를 쥔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왔다.

    ‘…바뀌었어.’

    그녀가 알던 원래의 시대가 바뀌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과거에 발을 디딘 것만으로도 이미 역사는 그전과 완전히 같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마도 시대의 종말을 막기 위한 시간 여행이었다. 두 번의 시간 여행 동안 역사를 바꾸려는 의도가 다분한 행동들을 했었단 말이다.

    첫 번째 시간 여행 땐 이렇게 달라진 건 없었는데.

    정말로?

    ‘사실 달라진 걸 내가 눈치채지 못한 거라면?’

    쿵. 심장이 뚝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백지장처럼 새하얘진 머리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뭐가 달라졌지? 내가 알던 3587년은 어디로 갔어? 마리. 카트린. 난 여전히 시아 켈튼인가? 요르문 켈튼의 양딸이자 의술원에서 근무하는 시아 켈튼이 정말로 맞는 건가?

    이 시대의 나는, 뭐지?

    “하긴. 너 의술원 힘들어서 연락도 거의 끊기다시피 했었으니까. 그 대머리 독수리가 아직도 너 막 굴리고 그래?”

    “카트린. 나 물어볼 거 있어.”

    “뭔데?”

    시아는 곧장 폭풍 같은 질문을 카트린에게 쏟아냈다.

    * * *

    “시아, 너 진짜 이상한 거 알지?”

    처음엔 질문하는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더니 카트린은 어느새 시아를 걱정하고 있었다.

    “미안. 요즘 정신이 좀 없어서.”

    놀랍게도 카트린은 시아가 기억하는 카트린의 모습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했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칼리지, 갈리프도흐까지 함께 다녔던 둘도 없는 친구. 키리스 교수 연구실에 들어갔다던 최근 근황까지 그대로였다. 마리도 가정교사로 일하는 건 여전했다.

    처음에는 안도감에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뒤늦게 의문이 썰물처럼 밀려들어 왔다.

    나 때문에 바뀐 과거가 고작 패트릭 하나뿐이라고?

    시간의 흐름이란 아주 촘촘하게 짜인 실크와도 같다. 실 한 오라기를 잡아당기는 순간 얽혀있던 다른 실들이 모조리 형태를 잃고 어그러진다.

    큼직한 사건들이 달라진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가령 메이슨 비렌체가 더 이상 ‘비운’의 발명가는 아니게 되었을 것이라든가, 재키 레이븐이 잡힘으로써 죽었어야 할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든가.

    ‘그래. 그 두 사람의 행보도 찾아봐야겠어.’

    하지만 그녀가 바꾼 과거가 고작 그것뿐일까.

    시아가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에 나타났기 때문에 단상에서 자리를 비운 라크시스. 그녀와 라크시스가 우편국을 방문한 탓에 줄에서 밀려나 제때 전보를 보내지 못한 사람. 미도리 셰프의 식당에서 테이블 예약을 놓친 탓에 연인에게 고백을 실패한 사람. 시아가 마지막 남은 스크롤을 사버린 바람에 스크롤 대신 마차를 탔다가 면접에 늦은 사람.

    사소한 차이가 얼마나 큰 변화를 불러왔을진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나비가 일으킨 아주 작은 날갯짓이 폭풍이 되어 제국을 뒤덮을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시아 켈튼을 둘러싼 시간이 크게 뒤틀려 있지 않다면. 예컨대 요르문이 수많은 고아들 중 굳이 그녀를 입양했고, 마리와 카트린이 여전히 그녀의 친구이고, 갈 생각이 없었던 올해의 갈리프도흐 동창회에 하필이면 참석해 수상한 일기장을 받았던 사실이 그대로라면.

    그것이야말로 역사에 개입한 것이 누구인지 진지하게 의심해 봐야 할 부분이었다.

    하지만 시아의 사고는 아직 여기까지 도달하진 못했다. 생각보다 기억대로 흘러온 역사를 보고 묘한 위화감을 느낄 뿐이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상황을 하나씩 파악해 나가는 것이 지금 시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시아, 그럼 내일 약속은 취소할까? 마리가 섭섭해하긴 하겠지만.”

    “아냐. 나 괜찮아. 그런데 진짜 미안한데 우리 무슨 약속을 했었지?”

    참다 참다 이젠 답답해졌는지 카트린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수화기에서 이어졌다.

    “‘폭풍우 치는 28번지의 밤’ 말이야! 마리가 자기 좋아하는 배우 나온다며 봐야 된다고 닦달했던 뮤지컬!”

    28번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불현듯 이틀 전의 새벽이 떠올랐다. 메이덜린의 랭험 노스 스트릿. 수화기 너머로의 초대. 뒤틀린 창틀의 테라스 하우스. 붉은 드레스. 금발의 남자. 수면제를 탄 찻잔.

    폭풍우 치는 밤. 살인마의 미소.

    헨리! 헨리 던로의 집이 28번지였잖아!

    시아는 태연한 척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도 다 잊고 덜컥 소리치고 말았다.

    “카트린, 그거 재키 레이븐 나오는 내용 맞지!”

    * * *

    부티크 블레어의 직원들은 이미 한참 전부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천장마다 달린 샹들리에 한 알 한 알이 모두 다이아몬드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만큼 천문학적인 액수를 벌어들인다는 곳이었다.

    황궁보다도 화려하다던 그레이트 로얄 호텔의 최상층을 방불케 하는 VIP 룸. 찾아오는 손님조차 조심스럽게 카펫을 밟는다던 부티크 블레어의 중심에서 불편한 정적이 이렇게 오래간다는 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시아, 마음에 안 드니? 다른 데로 갈까?”

    요르문은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자 아까부터 신경이 쓰였던 딱딱하게 굳은 시아의 낯이 훨씬 더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황궁에서 열리는 승전 기념 연회에 시아가 같이 가주겠다고 하자마자 그녀의 퇴근 시간에 맞춰 곧장 예약해 두었던 부티크였다. 요르문은 시아의 눈치를 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아버지와 데이트할 때만큼은 세상 근심 없이 행복해하던 딸이었다. 요즘 의술원에서 힘들어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던데. 블레어 스트릿에서 옷도 사주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 오늘 하루만큼은 환하게 웃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설마 이젠 내가 불편해진 거니? 시아. 사실은 데이트하고 싶었던 남자가 따로 있었다든가.

    내 딸이 사춘기라니. 아니지. 어느 놈팡이가 널 이렇게 괴롭게 하는 거야. 사춘기를 겪기엔 그의 딸이 이미 한참 나이가 지났고, 그녀의 근심이 고작 패트릭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까맣게 모르는 요르문은 순식간에 최악의 상황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배고프면 식당부터 갈까? 아르카나 쪽에 씨즐턴식 향신료로 양념한 양고기 스튜집이 인기라던데.”

    요르문이 벌떡 일어나 지금까지 골라뒀던 드레스들을 모두 물렸다. 물린 옷만 해도 어지간한 부티크의 두세 달 어치 수입은 되는 금액이었다. 부티크의 직원들은 애써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니, 시아야?”

    “…아, 죄송해요. 요르문 님. 옷은 굉장히 마음에 드는 걸요.”

    거짓말. 요르문은 걱정스레 시아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기는커녕 누가 들어도 관심 없는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눈치 없이 이 가게에 오래 머물렀나 보다.

    “아니다. 우리 일단 나가자. 나가서 바깥바람을 좀 쐬고 맛있는 거라도…….”

    “아가씨. 이 옷은 어떠실까요? 요즘 다시 유행하고 있는 마도 시대풍 드레스랍니다.”

    떠나려는 두 사람 앞에 직원이 다급하게 내민 건 은은한 광택이 도는 유백색의 드레스였다.

    올망졸망한 꽃 장식이 달린 자그마한 모자와 금장 핸드백, 유백색 가죽 구두와 세트로 제작된 드레스는 목 끝까지 잠긴 단추와 보기 좋게 잘록한 허리 디자인 탓에 옷걸이에 걸려있는 것만으로도 고아하면서도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이건…….”

    켈튼 아가씨의 몸짓이 뚝 멈췄다. 홀린 듯이 손을 들어 모자 장식을 만져보는 시아를 보고, 직원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까 보신 드레스는 본 연회에 어울릴 디자인이지요. 이런 가벼운 드레스는 한 벌 가지고 계시면 유용하게 입으실 수 있답니다. 간단한 티 파티라든가 모르간 근교로 놀러 가실 때 말이에요.”

    “디자인이…….”

    “호호. 유행은 다시 돈다고들 하잖아요? 저희 부티크 블레어에서는 소설가 어셔의 연작 중 ‘폭풍우 치는 28번지의 밤’을 모티브로 작품을 만들고 있답니다.”

    시아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 모습을 직원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

    켈튼의 아가씨가 관심을 보이는 것 같자, 룸에 있던 모든 직원들은 즉시 발을 놀려 관련된 모든 옷이며 장신구를 행거가 터져라 가지고 들어왔다.

    옷이 늘어날수록 레이디 켈튼의 손끝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아가씨의 취향이 이거였구나. 어쩐지 파티 드레스엔 영 관심이 없어 보이더라니.

    직원은 명찰을 다시 한번 바로잡으며 헛기침을 했다. 영업용 미소를 장착한 채 열띤 설명을 이어나갔다.

    “지금 보고 계신 건 미스 로렌 허슬러를 모델로 한 디자인이랍니다. 그리고 여기 이건…….”

    대마법사 요르문 켈튼의 유일한 딸. 막대한 켈튼의 부를 상속받는 것은 물론이요, 명문 갈리프도흐 출신에 단정한 외모로 진작 유명 인사였으나 요르문이 싸고도는 탓에 사교계엔 얼굴도 비치지 않아 취향도 성격도 근황까지 베일에 싸인 명문가의 아가씨.

    시아 켈튼.

    블레어 스트릿에 직접 방문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고 하는데. 아가씨의 취향만 잘 파악해 둔다면 이곳 부티크 블레어에서 다달이 로드 켈튼의 지갑이 열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직원은 시아의 눈길이 향한 곳을 재빨리 입력했다.

    짙푸른 정장에 어울리는 실크햇과 지팡이, 가죽 구두. 유백색 드레스와 세트로 만든 신사복이었다.

    옳다구나. 마음에 둔 남자가 있는 거야.

    “라크시스 옌을 모델로 한 디자인이에요. 마도 시대의 고전적인 분위기가 잘 살아있어서 방문하신 영애들께선 연인 분께 선물로 많이들 해가신답니다.”

    추리가 맞는 것 같다. 저 눈빛은 누가 봐도 남자 친구를 마네킹 대신 끼워 넣는 눈빛이 아닌가.

    “어떤 남자든 우아한 신사로 만들어주죠. 데이트가 두 배는 달콤해질 거예요. 대략적인 키와 체격을 말씀해 주시면 사이즈는…….”

    “거기까지. 됐습니다.”

    직원의 말을 끊은 건 잠자코 설명을 듣고 있던 요르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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