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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51)화 (51/292)

51화 

“웬일로 빨리 가네? 기다렸다 아침 먹고 가지 않고.”

“방금 전까진 축객령을 내렸으면서. 집주인이 허락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있겠나.”

“아니, 라크. 그새 토라진 거야?”

“토라지긴. 할 일이 생겨서 그렇지. 그럼 먼저 일어나지.”

무슨 할 일인데 그래! 요르문이 뒤에서 소리쳤지만 라크시스는 모자만 한 번 까딱이곤 응접실을 나섰다.

곧 그의 발밑에 둥그런 바람이 모여들었다. 공간이동 마법이 시작되고 있었다.

시아를 다시 만날 때까진 슈나이더가 터뜨린 폭탄을 잠재워야 했으니까. 신문사를 일일이 돌며 차탈이 개입할 여지를 막을 생각을 하니 골치가 아팠다.

그래도.

다음 시간 여행이 지금보다 순탄하다면 그녀와 대화할 시간이 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내 라크시스는 켈튼 저택에서 자취를 감췄다.

【 나비효과 】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고 날이 밝아왔다.

“아으…….”

간밤에 발작을 일으켰던 환자 때문에 꼬박 날을 새곤, 시아는 당직실 책상에서 겨우 쪽잠을 청했었다. 그리고 그 쪽잠이 이틀 동안 처음으로 눈을 붙일 수 있었던 기회였지.

“어머. 켈튼 선생님, 괜찮으세요?”

“네에……. 하하.”

오죽하면 젤마니 남작 부인이 걱정했을까. 왕진이 끝나고 의술원으로 돌아오는 마차에서 시아는 연신 하품을 해댔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했던 것 같다. 눈 밑이 퀭하고 뜨끈한 것이 잠이 심하게 부족한 기분이었다.

재키 레이븐 검거를 마치고 원래 시대로 돌아오자마자 시아가 맞이한 건 다름 아닌 출근길이었다. 그녀가 시간 여행을 한 줄 전혀 모르는(모르는 것이 당연하지만) 기사는 모시는 아가씨가 마차를 탈 때완 전혀 다른 몰골로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도대체 마차에서 뭘 하셨던 걸까. 분명 짐도 얼마 없었는데. 터질 듯한 가방 틈새로 비죽 튀어나온 붉은 옷자락에 의문을 가지며 기사는 아가씨를 친히 의술원으로 모셨다.

시아는 그 길로 곧장 출근부터 했다. 누가 일부러 짜기라도 한 건지 오늘따라 환자가 꾸역꾸역 밀려들어 와 마도 시대에서 가져온 짐을 정리할 시간도 없었다. 심지어 당직이라니. 시아는 하필이면 이날 당직 스케줄을 넣은 제 자신의 손을 원망했다.

당직도 순탄하진 않았다. 하필이면 또 혼자 회복과 당직이야. 그 김에 당직실에서 마법 가방에 쑤셔 넣어온 짐이나 몰래 정리하려 했는데 환자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정신없이 꼬박 날밤을 새우고 말았다.

다행히 다음 날은 젤마니 부인의 왕진을 다녀오는 날이었다. 평소였으면 부인의 말동무 상대가 되러 가는 길이 부담스러웠겠지만, 오가는 마차에서 눈을 붙일 수 있었기에 이번 만큼은 왕진이 기껍기 그지없었다.

“점심 먹으면 또 졸릴 것 같은데.”

왕진을 다녀오자마자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시아는 비척비척 의술원 건물을 가로질러 식당으로 향했다.

그 순간, 지금 제일 만나기 싫은 사람의 목소리가 시아의 발걸음을 덜컥 붙잡았다.

“켈튼 선생. 누가 보면 혼자 집도라도 한 줄 알겠어.”

시아는 고장난 오토마톤처럼 끼긱거리며 몸을 돌렸다.

“…아이작 교수님.”

“오늘따라 왜 이러나? 기운 좀 차려, 기운 좀. 환자가 자넬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나?”

뭐라고 생각하긴요. 젤마니 부인은 저더러 불쌍하다고 해주던걸요. 시아는 억지로 웃음을 쥐어짜며 사회생활용 미소를 지었다.

“반차 써.”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지금 회복과 인원 여유 있어. 다 죽어가는 사람 쉬지도 못하게 하는 상사 되긴 싫네.”

아이작은 한심하다는 눈빛과 걱정 어린 목소리로 시아를 옭아맸다.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다른 의술사였으면 반차는 무슨, 어떻게 하면 굴릴 수 있을까 생각했을 텐데. 그리고 지금 그쪽이 내 점심시간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 걸 당신은 알까?

아이작이 켈튼 가문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훤했다. 의술원에 공급되는 치유 마정석은 켈튼가의 소유인 북부 지르가나 마정석 광산에서 생산된다.

대마법사의 위상이니 뭐니를 떠나서 마정석 공급이 끊기면 의술원도 망한다는 소리였다. 요즘 갈리프도흐 의학과에서 대학원을 세워 의술사 양성 과정을 만들겠다는 움직임이 있어서 그런지, 의술원 원장인 아이작은 그쪽에 밥줄을 빼앗길까 봐 항상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하긴 이 사람이 눈치 보는 건 내가 아니고 요르문 님이지. 시아는 벌써 5분이나 사라진 점심시간을 보고 울적해졌다.

“자네 업무는 그레이엄 선생에게 맡겨둘 테니까.”

아이작이 선심 쓴다는 듯 품에서 반차계를 꺼내 멋대로 서명해서 내밀었다.

그레이엄? 누구지?

그레이엄, 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다. 하지만 그 인간은 시험에서 떨어져 의술원에 발도 못 붙여봤을 텐데. 그레이엄이 또 있나. 설마하니 회복과 업무를 다른 과에 떠넘기려는 건가. 진료과가 안 맞는 건 둘째 치고, 안 그래도 바쁜 의술원에서 업무를 넘겨버리면 있는 욕 없는 욕을 배 터지게 먹게 될 터였다.

그래도 내가 할 일은 내가 해야지. 내일부터 휴가도 넣어놨으니까. 퇴근하고 요르문 님이랑 기분 좋게 블레어 스트릿에 가려면 찜찜한 구석을 남겨선 안 된다.

그래서 그레이엄이 누구라고?

“…그레이엄 선생님이 누군데요?”

“오늘 진짜 상태가 안 좋긴 한가 보군. 패트릭 그레이엄 말이야. 왜, 자네 따라 의술원 들어왔다고 소문난 치 있잖나.”

뭐?

시아는 반차계를 떨어뜨렸다.

“젤마니 부인은 만나고 왔지? 그럼 됐네. 얼른 가. 썩 가서 쉬어.”

젊은 선생이 체력 관리도 못해서야. 아이작이 손수 반차계를 주워 시아의 손에 끼워주곤, 혀를 차며 멀어져갔다.

시아는 아이작이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분명 지금은 3587년 5월의 봄일 텐데.

몰아치는 서릿바람을 맞은 듯 피가 싸하게 식었다.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패트릭 그레이엄. 나 때문에 의술원을 못 들어갔다고 징징대던 찌질이. 동창회에서 시비 걸다가 나한테 뼈도 못 추리고 털린 놈.

마리와 카트린이랑 동창회 뒤풀이에서 분명 패트릭의 뒷담화까지 실컷 했었는데.

“…패트릭 자식이 왜 여기서 나와?”

* * *

시아는 그길로 곧장 회복과 동으로 뛰어갔다.

“어머, 켈튼 선생님. 점심 벌써 다 드셨어요?”

“잠시만요, 메이. 그, 그.”

혼이 나간 것 같은 몰골로 회복과 동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시아를 보고, 카운터의 메이가 벌떡 일어나 달려 나왔다.

“켈튼 선생님. 설마 뛰어오셨어요? 호출 넣은 거 아무것도 없는데.”

메이는 헉헉거리는 시아를 카운터 안쪽 의자에 앉혔다. 마침 갓 내려둔 커피가 있었다.

따끈한 머그를 건네며 메이는 시아의 손을 감싸 쥐었다.

“일단 숨부터 골라요. 안 그래도 오늘 켈튼 선생님 힘들어 보인다고 다들 난리도 아니에요.”

“패, 패트릭이라고 여기에 있어요?”

“그레이엄 선생님이요? 식당에서 못 만나셨어요? 길이 엇갈렸나 보네요.”

헐.

메이의 반응을 보아하니 진짜로 패트릭이 의술원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레이엄 선생님 부담스럽다며 피해 다니셨잖아요.”

“제가요?”

“네. 매일같이 얼굴 볼 사이는 아니라고 하시면서……. 아, 저기 오시네요.”

저 멀리 둘 셋씩 걸어들어오는 의술사 무리 중에 대학 시절 내내 봐왔던 더티 블론드가 확연히 눈에 띄었다. 강박적으로 목 끝까지 잠가둔 셔츠며 머리카락 한 올까지 완전히 빗어 올린 머리까지, 재수 없고 재수 없는 기억 속의 패트릭…….

‘이 아니잖아?’

대충 쓸어넘긴 머리카락 밑으로 잘 익은 주근깨가 보였다. 단정하면서도 편한 옷차림 위로 흰 가운을 걸친 패트릭은 그녀가 기억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시아는 패트릭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반사적으로 카운터 밑으로 몸을 숨겼다.

“시아!”

실패했다. 패트릭은 카운터 위로 동그랗게 솟은 검붉은 정수리를 발견하고는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뛰어왔다.

“여기서 뭐 해? 점심은 먹었어?”

“…아, 아하하.”

패트릭이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그 바람에 시아는 비좁은 카운터 밑에서 패트릭의 얼굴을 목도하게 되었다.

‘달라.’

그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을 더티 블론드는 그대로인데. 다른 사람의 유전자라도 섞였는지 생긴 게 전혀 달랐다. 날카롭고 야비한 얼굴은 어디로 가고 온갖 사람 다 친구 삼고 다닐 만큼 유순한 낯짝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시아가 아는 패트릭은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친근하게 굴 인간이 아니었다.

‘요르문의 친딸도 아니면서. 네가 진짜 귀족이라도 되는 것 같아?’

‘이년이 훔쳤어요! 제 시험지를 빼돌리고 자기가 수석이 된 거라고요!’

‘미안. 우리 클럽엔 너 같은 잡종이 들어올 자리가 없어서.’

‘…말도 안 돼. 네까짓 게 어떻게 의술원을 합격한 거야.’

상상만 해도 열이 끓어올랐다. 패트릭은 갈리프도흐를 다니던 내내 나를 무시하고 괴롭히던 녀석이었다. 물론 그 괴롭힘이 별 타격을 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저 자식이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열등감을 표출하던 기억이 생생한데.

“…너, 뭐야?”

시아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패트릭이 눈에 띄게 서운해하는 것이 보였다.

“…미안.”

미안? 지금 그 패트릭이 나한테 미안하다고 한 거야?

“친구로 지내자고 해줘서 이 정도 인사는 괜찮을 줄 알았어.”

지금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상황 파악이 안 된 시아가 멍하니 주저앉아 있자 패트릭은 뒤로 몸을 물리곤 서글프게 미소를 지었다.

“부담스러웠다면 미안해. 이따 병동에서 봐.”

* * *

“…걔가 나한테 고백했었다고?”

“시아, 왜 모르는 척해. 시아 네가 패트릭 고백 거절한 걸 모르는 동기가 없는데.”

강제로 반차를 당했으나 시아는 켈튼 저택으로 돌아갈 엄두도 못 낸 채 기숙사 로비의 공중전화를 붙들고 있었다. 그녀가 전화를 건 사람은 갈리프도흐 회복학과 동창, 카트린이었다.

“내가, 고백을 거절했어?”

“시아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의술원 진학하기도 바빠죽겠는데 연애가 웬 말이냐고.”

틀린 말은 아닌데. 갈리프도흐를 다닐 땐 정말로 연애 한 번 못해보긴 했었다. 의술원 입학시험은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했고, 의학과 출신이 아닌 지원자들에겐 생물학과와 화학과 학위를 동시에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긴 했지. 그랬기에 더더욱 학창 시절 내내 난 사람 꼴도 못하고 다녔다. 단벌 신사인 양 매일 같은 옷에, 머리도 대충 묶어 올리고 도서관에만 틀어박혀 있었는데.

누가 나한테 고백을 해?

지나가던 개미도 거들떠보지 않을 몰골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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