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50)화 (50/292)
  • 50화 

    그 의문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차탈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라크시스 옌도 내가 이렇게 나오리란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차라리 잘 됐다. 이 기회에 아예 그 기세를 밟아버리든, 죽었다 깨어나도 황제의 편에 붙을 수 없게 만들든 그 오만한 마법사의 단속을 해두어야겠다.

    뒤늦게 그의 의도를 깨닫고 경악으로 물들어 가는 제프리의 낯을 보며, 차탈은 아주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원래 공들여 만든 함정일수록 사냥감을 잡았을 때 쾌감이 큰 법이니까.”

    * * *

    켈튼의 사용인들은 꼭두새벽부터 남의 저택에 찾아온 고대 마법사를 슬그머니 피했다.

    “쯧.”

    활자 빽빽한 신문을 읽던 라크시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신문을 구겼다.

    헉. 홍차를 들고나오던 메이드 앤은 재빨리 찻잔과 주전자만 내려놓고 도망치듯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앤! 빨리, 빨리!”

    “애슐리!”

    부엌에 모인 메이드들이 몸을 웅크리고 숨죽여 수다를 떨었다.

    “그래서 마법사님은 아침부터 왜 오신 거래?”

    애슐리가 재촉했다. 메이드들의 귀가 모두 앤을 향했다. 댓바람부터 고대 마법사가 신문 한 부를 말아쥐고 켈튼저에 쳐들어온 이유가 다들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글을 읽을 줄 알았던 사람이 앤밖에 없었기에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앤은 염탐 담당이 되었다. 앤은 울상이 되어 말했다.

    “이번엔 잘 모르겠지마안……. 아마 훈장을 빼앗기셔서 화나신 게 아닐까?”

    “그게 무슨 소리야, 앤?”

    “신문을 보니까 황제 폐하께서 유능하고 모범적인 경찰에게 직접 훈장을 수여하셨다던걸.”

    슈나이더 앨런 어셔. 웬 배불뚝이 중년 경찰의 사진이 라크시스가 구겨버린 모르간 타임즈 1면에 대문짝만하게 박혀있는 것을 앤은 똑똑히 보았다.

    재키 레이븐을 잡은 영웅, 이 시대의 진정한 경찰 등 얼핏 봐도 대단한 수식어들이 제목과 함께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어머어머, 맞다. 그때 재키 레이븐을 잡은 사람이 사실 우리 아가씨와 마법사님이었다며.”

    “마법사님 성격에 슈나이더인가 하는 경찰이 훈장을 받게 둔 것도 신기하다.”

    “그러니까 화난 거 아냐? 공을 뺏긴 게 억울해서!”

    “그런가 봐. 하긴 저 성격에 그런 기사를 보고도 가만히 계실리는 없지.”

    라크시스 옌의 괴팍한 성격은 이미 켈튼저에서 유명했다. 사실 괴팍하다기보단 좀 더 복잡미묘했지만, 라크시스가 으레 볼 수 있는 귀족들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메이드들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고대 마법사를 괴팍하다고 표현했다.

    손찌검이나 희롱이 없고, 까탈스럽다고 알려진 입맛에 비해 식사를 무난하게 하는 걸 보니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옌의 저택엔 사용인이 아무도 없다고 한다. 가족도 사용인도 없이 드넓은 저택에서 생활하는 귀족이라니.

    어쩌면 옌의 저택에는 남들에게 보여선 안 되는 무시무시한 비밀이 있는 게 아닐까. 신체 부위가 담긴 유리병이라든가, 귀신 들린 사슴 가죽이라든가.

    분명 숨겨진 괴짜 같은 취미가 있을 거야. 마법과 기계에 빠져서 발명가라는 객식구까지 들인 주인님의 친구니까. 그 어떤 가문에서도 혼담을 넣은 적이 없다고 하지? 고자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결벽증이 있다던데. 맞다, 본인의 명예를 건드리는 사람은 가만 안 둔다며. 그러니까 지금 슈나이더라는 경찰을 죽일 듯이 앉아있는 거 아닐까? 눈빛이며 말 하나하나가 무서워 죽겠다니까. 저런 분위기를 풍기는 데 아무리 명화 같은 얼굴이라 한들 어떻게 혼담을 넣겠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수다에 메이드들이 모두 몰두해 있을 때였다.

    “다들 여기서 뭐 하세요……?”

    “꺄악!”

    뒷말을 하다 들킨 메이드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졸음 가득한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고 나자 목구멍까지 뛰쳐나왔던 심장을 겨우 가라앉았다.

    “죄송해요. 제가 놀라게 했나요?”

    “발명가님!”

    밤새 뭘 했는지 작업복 차림에 씻지도 않은 메이슨이 퀭한 눈으로 서있었다. 애슐리가 벌떡 일어났다.

    “또 밤새셨어요?”

    메이슨이 멋쩍게 웃었다. 애슐리는 샐쭉 웃으며 틱틱 대꾸했다.

    “이번에도 목욕물 데워놓으라고 하실 거죠? 오이 샌드위치랑요.”

    “하하……. 부탁드립니다. 샌드위치는 요르문 님 것도 같이 올려주세요.”

    “그러니까 요크 부인이 주무시라고 할 때 재깍재깍 주무시면 좋잖아요. 제때 자고 제때 일어나서 아침을 먹어야 건강해진다니까요?”

    대답 없이 계속 웃기만 하는 것도 주인님을 닮았단 말이야. 이 집에 온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는 메이슨은 어느새 가족처럼 받아들여져 있었다. 처음으로 장기투숙하는 손님이라 초반엔 낯을 가렸던 사용인들도 메이슨이 요르문과 다를 것 없이 기계에 빠진 허당이라는 것을 깨닫곤 어느 순간 스스럼없이 대하기 시작했다.

    메이슨은 결국 애슐리의 잔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슬쩍 자리를 피했다. 주방을 나가려다 말고 그가 뒤를 돌았다.

    “아, 맞다. 앤.”

    “네?”

    “고대 마법사님이 훔쳐볼 건 다 봤으면서 설탕은 왜 안 주고 도망쳤느냐는데요.”

    * * *

    “켈튼저의 메이드가 손님에게 낼 각설탕 하나도 아끼는 줄은 몰랐군.”

    라크시스는 옆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말했다.

    “하긴 설탕보다 중요한 건 이 새벽에 내가 왜 여기 왔느냐였겠지만.”

    벌벌 떠는 메이드에게선 두려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바보 같으니. 염탐을 하려거든 똑바로 하든가. 어차피 나중엔 저택에 내가 왜 왔는지에 대한 이유가 소문처럼 돌 텐데 굳이 지금 나서서는 말이야.

    그들이 뒷말을 한 건 딱히 신경 쓰이지 않는다. 시답잖은 이야기일 테니까. 다만 기껏 계획을 세워 관찰해 놓곤 이렇게 티 나게 허둥지둥 실수를 하는 꼴이 한심했을 뿐이다.

    살인마를 속여넘길 만큼 완벽한 연기를 하던 사람도 있는데.

    “죄, 죄송합니다.”

    “가봐.”

    앤은 땀을 비 오듯 흘려대다가 도망치듯 주방으로 가 버렸다. 라크시스는 그녀가 가든 말든 신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왜 애를 괴롭히고 그래.”

    라크시스가 왔단 소식을 들었는지 요르문이 어느새 응접실에 내려와 있었다.

    “괴롭히긴. 난 손님으로서 대접을 받고 싶었던 것뿐이야.”

    “손님답게 와야 손님 대접을 해주지.”

    요르문은 메이슨과 마찬가지로 피곤에 전 낯이었다. 요르문이 라크시스의 맞은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왔는데.”

    “…슈나이더 경사, 아니 슈나이더 경감이 사고를 쳤더군. 그놈의 입이 문제야.”

    차탈의 계획이 무색할 만큼, 재키 레이븐이 잡힌 이후 그 어느 신문사에서도 로렌 허슬러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았다. 물론 차탈은 그 후 또 한 번 집무실을 뒤엎으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그가 분노하는 모습을 목격한 건 차탈의 보좌관 제프리, 아니 마법으로 제프리의 눈을 빌려 차탈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한 라크시스였다.

    이쪽에선 분명히 경고를 했었다. 한 번 더 시아의 뒷조사를 한다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하지만 차탈은 그 경고를 깔끔히 무시했다. 술란에 있는 유령 무역회사에서 외부인이 자꾸 사장 가족의 정보를 들쑤시려 한다는 보고가 올라왔으니까.

    그렇다면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이 예의지. 라크시스는 노든 대공의 마법을 그대로 따라 했다. 남의 눈을 빌려 뭔가를 훔쳐본다는 추잡한 방식이 불쾌하긴 했지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그가 지금껏 까마귀며 올빼미, 길거리 행인들을 통해 자신과 시아를 꾸준히 관찰해 왔다는 걸 알고 있었던 라크시스는 차탈의 최측근인 보좌관 제프리의 뇌를 파고들었다.

    사실 진작 몇 번 시도했었던 마법이기는 했다. 차탈이 감지하지 못하도록 아주 희미한 마력을 제프리에게 주입해야 했으니까. 덕분에 황제의 회임 소식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어찌 됐든 차탈이 제프리에게 언론 조작을 전부 맡긴 건 큰 실수였다. 제프리는 제 머릿속에서 뛰노는 라크시스를 도무지 이길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제프리가 각 신문사에 연락을 돌린 후, 재키 레이븐을 잡은 영웅은 메이덜린 경찰서의 슈나이더 앨런 어셔가 되었다.

    그렇게 차탈이 시킨 임무를 정반대로 하게 된 제프리는 복귀 후 차탈에게 몇 번이고 죽을 뻔했다.

    ‘그렇게 다 손을 써놨건만.’

    재키 레이븐을 잡은 공로로 두 계급 특진에 포상금도 두둑이 받은 슈나이더는 결국 황제의 앞에서 훈장까지 받게 되었다.

    여기까진 다 좋았는데. 문제는 온갖 기자들이 몰려든 희대의 훈장 수여식에서 슈나이더가 한 말 때문이었다.

    ‘사실 재키 레이븐은 저 혼자서는 절대 잡을 수 없는 최악의 살인마였습니다.’

    ‘제게 도움을 주신 두 분이 아니었다면 전 아직도 살인마와 함께, 살인마가 죽인 시체를 수습하며 범인을 찾고 있었겠지요.’

    ‘이 자리를 빌려 라크시스 옌 경과 미스 로렌 허슬러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이상입니다.’

    라크시스가 건넨 신문에 떡하니 적혀있는 소감 발표문을 읽은 요르문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수분이 지나고, 요르문이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라크. 이 얘기 하려고 꼭두새벽부터 여길 온 거야? 켈튼저에도 신문이 배달되는 거 알긴 하지?”

    “어.”

    “그럼 이젠 갈 거지?”

    “아니.”

    “대체 왜 자네 집을 놔두고 내 집에 들락거리는 거야?”

    “…….”

    “보나 마나 말 상대가 없어서겠지. 안 그러나?”

    “…….”

    “누님이 있을 때가 그리워. 적어도 그때 만큼은 라크 자네가 귀찮지 않았는데.”

    그립다, 라.

    라크시스는 문득 고개를 들어 요르문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치곤 가벼운 언사에 농담조의 말투였다.

    그립다는 게 뭘까.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헤어져 왔다. 세상을 떠난 이가 곁에 남은 이들보다 많은 그였다. 이젠 그 누구를 만나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시아 켈튼은 가끔씩 생각이 나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그녀가 이 신문을 봤더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도대체 이 사람은 왜 이런대요?’

    ‘사람이 이렇게 뒤통수를 친다니까. 훈장까지 받았으면 입 싹 닫고 가만히 있으면 좋잖아요.’

    ‘갑자기 양심이라도 찔렸나? 메이덜린 경찰서에선 그렇게 거만하게 굴더니.’

    ‘안 그래요, 라크?’

    그런 얘기를 조잘조잘 늘어놓는다면 적어도 재미는 있었겠지. 기껏 찾아온 사람한테 집에나 가라고 하는 요르문 녀석보다는.

    역시 그때 술을 한잔했어야 했다.

    “헛소리 하지 말고. 요르문 자넨 눈부터 붙여야겠어.”

    라크시스는 거의 마시지 않다시피 한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갈듯 겉옷을 도로 걸치는 라크시스에 요르문이 당황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