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아, 마침 다시 연락이 왔군요.”
슈나이더는 몸을 돌려 조심스럽게 통화를 하더니 이내 이렇게 말하며 수화기를 건넸다.
“…아, 예예, 장관님. 고대 마법사님을 연결해 드릴까요?”
“…….”
“받아보시죠. 기다리고 계십니다.”
슈나이더가 재촉했다. 라크시스는 한참이나 황동빛 수화기를 노려보다가 송수신기를 든 경관이 울상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곤 하는 수 없이 받아 들었다.
지직거리는 소음 속에서 ‘옌 경? 혹시 신호가 끊겼나?’ 하는 차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슈나이더 경사님! 뒷마당 창고에서 미라 세 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어이쿠, 이런 심각한 일이. 그럼 전 이만.”
슈나이더가 마침 잘 되었다는 얼굴로 경례를 하더니 쏙 빠져나갔다. 예전엔 거만해서 재수가 없더라니 오늘은 얄밉기 그지없다. 라크시스는 멀어져가는 슈나이더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젠 어쩔 수 없이 수화기를 귓가에 대야만 했다.
“…라크시스 옌입니다.”
* * *
수화기를 내려놓은 노든 대공은 이렇게만 말했을 뿐이다.
“건방지긴.”
그러나 그 짧은 한마디에 집무실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한밤중에 불려 나온 차탈의 보좌관, 제프리는 가만히 서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차탈은 매우 화가 난 상태였다. 당연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소식이 연달아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먼발치에서 온화하고 호탕한 대공의 대외적인 모습만 봐왔던 사람이라면 차탈이 화가 난 줄 모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차탈은 지금 웃고 있었다.
하지만 차탈을 오랫동안 모셔온 제프리는 주인에게서 이가 부서져라 악다문 턱의 힘줄을 보았다. 저건 보통 화가 난 게 아니다.
‘대공 전하. 극비사항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회임하셨습니다.’
누이의 임신 소식을 들은 차탈은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오랜만에 누려본 숙면을 방해받았음에도 그는 무덤덤했다.
‘이 소식을 전한 건 누구냐. 궁내부의 데임? 아니면 올가 웰링턴?’
‘…레이디 웰링턴입니다. 전하.’
황제는 후계자가 없고, 젊은 대공에겐 지지자가 많다. 정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차탈의 보좌관은 황제의 회임 소식을 접하자마자 대공저로 달려가면서 과연 제 주인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하며 긴장하고 있었다.
예상외로 차탈은 차분했다. 그의 머릿속은 차분함과 거리가 멀 테지만, 어쨌거나 제프리는 제게 큰 불똥이 튀지 않아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닌 밤중에 집무실로 날아온 한 통의 전화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평화를 깨고 말았다.
‘모르관 광역 경찰청에서 급히 올라온 소식입니다. 재키 레이븐이 잡혔다고 합니다.’
‘아, 그 유명한 살인마 말이지. 잘된 일이구나.’
‘그런데 그것이…….’
수화기 너머로 무슨 말이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차탈의 귀엔 더는 들어오지 않았다.
‘라크시스 옌과 켈튼가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제국의 유일무이한 고대 마법사와 유서 깊은 대마법사 가문의 가주는 황제의 편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차탈의 편인 것도 아니었다.
차탈은 그 사실이 아주 오래 전부터 거슬렸다.
라크시스 옌과 요르문 켈튼에게서 황위 계승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긴 했지만, 두 사람은 아군이 아닌 자로 두기엔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제국에서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조금이라도 사이가 틀어졌다간 누이의 뒤를 잇겠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될 터다. 기껏 비위를 맞춰놓은 의회도 돌아설 것이고, 애써 만들어둔 마음 넓은 군주의 이미지도 소용이 없어지겠지.
‘…레이디 켈튼이라고 했었나. 재키 레이븐을 잡았다던 사람 말이다.’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가명을 쓰고 다녔던 모양입니다.’
재키 레이븐은 수도에서 악명을 날리던 살인마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그의 이름으로 자행된 살인이 신문에 도배되면서, 제국민들은 점점 살인의 공포를 끝내줄 영웅을 바라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살인마를 무려 라크시스 옌이 직접 나서서 잡았다? 심지어 재키 레이븐은 경찰이었다. 내무부 소속으로 출범된 기관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경찰이 살인마를 잡진 못할 망정, 정체도 모르고 살인마와 하하호호 함께 일하고 있었다니. 라크시스 옌은 알아차린 재키 레이븐을 매일같이 얼굴 보는 동료들은 머저리처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다.
경찰 채용 과정에서 드러난 허점은 둘째 치고, 고대 마법사의 위용이 올라가는 건 순식간일 터다. 켈튼가의 협력으로 재키 레이븐을 함정에 빠트리기까지 했으니 이거야말로 대서특필 감이다.
탐정으로 위장한 레이디와 고대 마법사의 합동 작전으로 희대의 살인마 검거. 마치 한 편의 소설 같은 완벽한 서사 아닌가.
차탈 본인이 들어도 자극적이면서 통쾌한 내용이었다.
차탈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하하. 설마하니 자네가 재키 레이븐을 잡았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함께 있던 레이디 켈튼의 공이 컸다지?’
‘수고했네. 자네 덕분에 제국의 치안이 아주 잘 유지되고 있어. 내무장관의 이름으로 우선 감사를 표하지.’
‘레이디 켈튼에게는 황제 폐하께서 친히 훈장을 내리실 걸세. 조만간 레이디 켈튼과 황궁에서 보도록 하지.’
애써 평정을 유지하면서 전화를 걸었던 차탈이었다. 아직까진 라크시스와 켈튼가가 중립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라크시스의 꿍꿍이가 뭔진 몰라도 일단은 척을 질 수 없었다.
라크시스도 지금처럼 정치에서 한 발짝 물러나 편하게 지내려고 한다면 일부러 자신을 적대하려 들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차탈 세페란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 이상 이쪽에 간섭하려 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 옌 경.’
‘난 두 번 말하지 않아. 재키 레이븐을 잡은 건 메이덜린 경찰이고, 시아 켈튼의 뒷조사를 하는 인간을 내버려 두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남의 일상을 시시콜콜 훔쳐보는 취미도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옌 경. 지금 자네가 이 나라의 황족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알고나 있…….’
‘황제 폐하께서 회임을 하셨다지. 축하하네. 곧 어여쁜 조카가 생길 테니 말이야.’
그럼 이만. 라크시스는 그렇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미칠 것 같았다.
뭐가 어떻고 어때? 감히 내게 간섭하지 말라?
게다가 황제의 회임 소식은 황실의 극비 사안이다. 무탈하게 임신 초기를 넘기고 안정적인 시기에 접어들고 나서 공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자신이야 황궁에 심어둔 눈과 귀가 많았지만, 라크시스는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만 했다.
라크시스가 황궁에 본인의 사람을 심어뒀다는 건 곧 황위 계승에 관여하겠다는 말과도 같았으니까.
“감히!”
차탈은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 위를 쓸어버렸다.
유리 재떨이와 서류, 값비싼 장식품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쏟아진 잉크가 카펫에 검은 얼룩을 남기기 시작했다.
“전하! 고정하십시오!”
제프리가 제 팔을 붙들며 애원하자 그제야 이성이 천천히 돌아왔다.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 화만 내봤자 변하는 건 없다. 계획을 수정하고 새롭게 등장한 변수를 처리하는 것만 해도 할 일이 잔뜩이니까.
차탈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기를 반복했다. 라크시스가 이렇게 나온다면 이쪽은 무엇을 준비하는 것이 좋을까.
혈혈단신인 고대 마법사에겐 복잡한 혈연관계도, 가문 대 가문으로 묶인 빚도 없었다. 권력에 관심이 없으니 벌려둔 정치 싸움도 없었고. 무엇보다 라크시스는 아슬하게나마 법의 테두리를 철저하게 지키는 인간이었다.
심지어 무력으로도 상대할 방법이 없는 고대 마법사는 사실상 약점이 없는 완전무결한 존재였다.
‘하지만 방금 놈이 약점을 직접 드러내지 않았는가.’
아르카나 중앙역 기공식에서 처음 봤던 여자.
시아 켈튼.
애초에 켈튼의 방계라는 말을 믿은 적은 없었다. 라크시스가 숨겨둔 여자라고 생각해서 뒷조사는 해두었는데.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레이디 켈튼은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 같았다. 가족은 물론이고 그 흔한 고향 친구나 이웃조차 없었다. 심지어 기공식에 나타나기까지 그녀를 목격한 사람조차 없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또다시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것도 켈튼의 저택에서. 그 후엔 몇 달 동안 죽은 사람처럼 없어졌다가 위조된 신분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났다.
술란의 거대 무역회사 사장의 외동딸. 켈튼의 방계. 캘커티 남작. 갈리프도흐 의학 박사 및 회복학과 박사.
고대 마법사 라크시스 옌의 유일무이한 피후견인.
이정도 신분을 위조하는 건 라크시스 옌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했다.
무엇 때문에 신원 불명의 여자 하나를 위해 이런 짓까지 하는가. 캘커티 남작 위는 분명 황제에게 직접 받아냈을 텐데. 그러나 그렇게 신분을 만들어주고도 라크시스는 시아 켈튼을 절대 밖에 내보이지 않았다. 뒷조사를 할 때마다 여자가 지워낸 듯 자취를 감출 수 있는 것도 고대 마법사의 마법 때문일 터.
그러니 시아 켈튼은 라크시스의 약점일 것이다.
‘숨기려 하는 것은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공격이 된다.’
차탈은 비릿하게 웃었다. 깨진 재떨이 조각에 찔린 손에서 피가 뚝뚝 흘렀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제프리.”
“…전하.”
“모르간 타임즈에 연락하지. 아니, 수도의 모든 신문사에 당장 전보를 보내.”
재키 레이븐을 검거해 낸 묘령의 여인에 대해 기사를 싣도록 말이야.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차탈의 눈빛에 제프리는 피를 닦아내던 손을 흠칫 물렸다.
“자극적일수록 웃돈을 얹어준다고 전해. 가명을 쓰는 탐정 로렌 허슬러가 누구인지, 그녀가 어디 출신이고 무엇을 먹으며 사생활이 어떠한지, 저 멀리 남대륙의 가멜인조차 궁금해할 정도로 말이야.”
“가십을 만들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상대는 켈튼가입니다. 그냥 레이디 켈튼이라고 밝히시진 않으시고요?”
“그걸 미리 알려주면 섭하지 않겠나.”
“…예?”
되묻는 제프리의 얼굴에 해소되지 못한 의문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