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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48)화 (48/292)
  • 48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창관은 조사차 들른 게 전부입니다만.’

    갑자기 그런 말을? 그것도 나한테?

    ‘그런 건 변명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알죠?’

    ‘…그렇습니까?’

    되묻는 목소리의 높낮이가 이상했다. 진심으로 묻고 있는 건가. 굳이 변명할 필요가 없는 건 맞잖아. 가만히 있으면 반은 간다고. 라크시스가 말하지 않았으면 이쪽도 아무 생각 없었을 것이다.

    ‘됐어요. 그건 그쪽 사생활이니까 제가 뭐라 할 것도 아닌데요.’

    ‘…….’

    사생활을 존중해 주겠다고 했을 뿐인데 라크시스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내가 말을 잘못한 거라도 있나. 그의 눈썹이 까딱까딱 기우는 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결국 어색한 공기를 먼저 깨뜨린 건 시아였다.

    ‘…그래서, 헨리의 집에 가면 오토마톤은 어디에 어떻게 놔둘까요?’

    * * *

    “시아.”

    셔터를 터뜨리는 소리며 온갖 말소리에 주변이 시끄러운 와중에도 시아, 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음형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듣는 진짜 이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행히 아무도 못 들은 것 같았다.

    “로렌이라고 안 불러도 돼요?”

    “시간 다 됐어요.”

    놀라서 제 팔뚝을 잡아당긴 시아를 달래듯 떼어놓곤 라크시스는 품 안의 회중시계를 꺼냈다.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시아 켈튼의 두 번째 시간 여행이 30분 정도 남아있었다.

    “여기, 당신 가방.”

    이제는 무한대의 짐이 들어가는 마법 가방이 되어버린 슈트 케이스를 턱 내민다. 시아는 오토마톤을 넣어왔던 탓에 찌그러진 옷가지들을 정리하곤 가방 안에 숨겨두었던 검은 망토를 꺼내 들었다.

    “자, 여기요.”

    “그냥 가져가시죠.”

    “이 망토를요? 이거야말로 대놓고 마도 시대의 물건인데.”

    가짜 로렌 허슬러를 상대하는 헨리의 뒤에서 오토마톤을 조종할 때 썼던 투명 망토였다. 실용성에선 인체 투영 기계보다 쓸데가 많을 것 같았지만.

    ‘이 망토를 쓸 일이 많으면 어쩌자는 거야!’

    몰래, 숨어서, 들키면 안 되는 짓을 할 때나 뒤집어쓸 망토를 대체 왜 주는 건지.

    “다시 말하지만 전 평범한 의술사예요. 일기장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출근길 마차에 있었을…….”

    “아쉽네요.”

    “…네?”

    라크시스가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아쉽다니, 뭐가 아쉽다는 거야? 그 바람에 망토를 두고 실랑이를 벌였던 것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뒤이어 그에게서 튀어나온 말은 뭐가 아쉽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됨과 동시에, 시아의 말문을 막아버리고 말았다.

    “술이라도 한잔했으면 했는데.”

    “…술 별로 안 좋아한다면서요.”

    “술보다는 차를 좋아한다고 했었죠. 무심하긴.”

    아닌데. 술은 분명 즐기지 않는다고 했었다.

    “저도 아쉽긴 하네요. 며칠 사이에 엄청난 일들을 겪었는데 회포라도 풀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느새 라크시스의 손엔 위스키 병이 들려있었다.

    “마실래요?”

    지금? 여기서? 30분 동안? 진심으로?

    진담이라기엔 장난스럽고 농담이라기엔 진지한 얼굴이다.

    황당한 제안에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신기하게도 입에선 둥글고 부드러운 거절이 튀어나왔다.

    “아뇨. 저 몇 시간 후면 출근인걸요. 술 마시고 환자를 볼 순 없잖아요.”

    “…그렇군요.”

    “다음에도 기회가 있잖아요. 당장 닷새 후면 또 여기 오는걸요.”

    라크시스는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살짝 벌리다가 주저했다. 눈 앞머리에 미묘하게 힘이 들어가 그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그가 삼킨 말이 궁금했지만 물어도 알려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거기다 왠지 알고 나면 자꾸만 신경이 쓰일 것 같고.

    시아는 일부러 힘차게 말하며 그의 팔뚝을 가볍게 두드렸다.

    “기억해 둬요. 오늘 일들. 다 까먹으면 술 마실 재미가 안 나니까요.”

    “그쯤이야.”

    “재키 레이븐이 어떻게 됐는지도 말해줘야 돼요?”

    “알겠어요.”

    아득한 저 멀리서부터 시야가 하얗게 번져오기 시작했다.

    시계를 봤을 땐 분명 30분 정도 시간이 남아있었는데. 라크시스와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였는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나.

    옷이라도 갈아입어 둘 걸. 시아는 재빨리 가방을 꽉 잠그곤 집어 들었다.

    “라크, 저 갈게요.”

    그러고 보니 내가 시간 여행을 하는 모습을 누군가가 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마차 안에서든 켈튼의 저택에서든 시간 여행을 할 땐 언제나 혼자였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겐 안부 전해줘요. 요르문이라든가 요크 부인께요.”

    라크시스에겐 어떻게 보이려나.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요란하게 사라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내가 인사를 건네고 나니까 시간 여행이 시작된 걸 눈치챈 것 같았다.

    “왜 말이 없어요. 저 진짜 갈게요?”

    이제 진짜 막바지였다. 오래된 케르딕 하우스의 내부가 소용돌이치며 하얀 빛에 잠식되었고 남은 건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라크시스의 얼굴뿐이다.

    “다음에 봐요……!”

    마지막까지 인사 한번 없네.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곧 그럴 생각을 할 겨를도 없어졌다.

    시아는 흰 빛에 휩싸여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그녀가 떠나고 난 자리에 남은 건 나지막한 인사말이었다.

    “…조심히 들어가요. 시아.”

    예상보다 이른 이별이었다. 이별이라고 하기엔 그렇게 애틋한 사이는 아니었기에 이별이 적절한 단어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시아가 사라지는 모습은 뜻밖에 오랜 기억 속에 묻어놨던 슬픔을 불러오고 말았다. 겉모습은 그대로인데, 그녀를 구성하는 마력이 마치 영혼이 흩어지듯 서서히 흐릿해졌기 때문이었다.

    눈을 깜빡이고 나니 마치 지워낸 것처럼 시아가 사라지고 없었다.

    평소의 라크시스였다면 일기장의 시간대에서 어긋난 시간 여행에 의문을 먼저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따라 기묘한 쓸쓸함이 그의 사고를 붙잡고 늘어지면서, 라크시스는 한참을 제자리에 붙박인 듯 서있었다.

    시아의 목소리가 귓전에 남아 맴돌았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잖아요. 당장 닷새 후면 또 여기 오는걸요.’

    당신은 그렇겠지. 나는 반년을 기다릴 테고.

    라크시스는 위스키 병을 없애버렸다. 문득 샤샤리아가 간절해졌다. 저택에 돌아가 만사를 제쳐두고 파이프의 연기 속에 잠식되고 싶어졌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충동이 불쾌하게 느껴질 때쯤이었다.

    “고대 마법사님!”

    멀리서 슈나이더 경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언제부터 이런 데 미련을 가졌다고. 덕분에 상념에서 깨어난 라크시스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늘상 짓던 고대 마법사의 표정을 뒤집어썼다.

    “네. 말씀하시죠.”

    “알려주신 곳에서 재키 레이븐의 편지와 살인 기록을 찾았습니다. 녹음해 두신 내용과 일치하는 편지도 있었고요.”

    슈나이더는 재키 레이븐이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남기던 편지와 편지지, 펜을 들고 있었다. 그가 꺼내 든 녹음기에선 재키 레이븐이 오토마톤의 목을 조르며 했던 말들이 흘러나왔다.

    로렌 허슬러를 죽이고 남기려고 했던 편지와 정확히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여기, 이단의 성서도 한 번 봐주시죠. 아무래도 재키 레이븐은 이 구절에 꽂혀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놈의 사이비는 어째 계속 불어나서 문제를 일으키는지 원…….”

    슈나이더가 펼쳐 내민 성서에 라크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붉은 잉크로 도배하다시피 동그라미를 친 간음, 순결과 같은 몇몇 단어가 거슬린 탓도 있었지만.

    ‘저주로군.’

    그 단어에서 희미하게 저주의 냄새가 느껴진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저주는 이미 사멸된 마법일 텐데.

    저주는 살아있는 생명을 담보로 하는 악질적이고도 이기적인 마법이다. 사용하기 까다롭고 무엇보다 자칫 잘못하면 시전자의 목숨마저 앗아가는 심각한 부작용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구사하는 자가 사라져버렸다.

    저주보다 위력이 강하고 효율이 좋은 마법이 넘쳐나는 시대다. 그런데 굳이 저주를 사용한단 말인가?

    라크시스의 심기를 거스른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단 황혼 국교회.

    국교회와 이름이 비슷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이단인 줄 모르고 지나치기 쉬웠다. 슈나이더가 보여준 성서 역시 반쯤 기울어진 태양과 달이 기이하게 뒤섞인 표식이 아니었다면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교리 역시 국교회를 기반으로 교묘하게 만들어져 모르는 사람은 두 교회가 같은 집단인 줄 알기도 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빛을 상징하는 국교회의 주신 디아우스가 아닌, 황혼 국교회에선 태고의 어둠을 숭상했으니까.

    그리고 황혼 국교회의 신도들은 교주를 어둠의 현신으로 여긴다고 했다. 사이비의 전형적인 특징인 교주 신격화였다.

    사이비 종교와 저주. 벌써부터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하, 참. 고대 마법사님께서도 서에서 목격하셨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왜, 최근에 있었던 실종 사건 기억나시죠? 앤더슨 부인이 밤낮으로 서에 찾아오고 그랬던…….”

    “기억납니다.”

    “용의자였던 빈민 구제원 원장 있잖습니까. 그자의 집에서도 황혼 국교회 성서가 발견됐었습니다.”

    슈나이더는 전보다 협조적인 태도로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그간 라크시스를 그저 물정 모르는 높으신 분으로만 생각했다가 이번 재키 레이븐 검거로 거하게 뒤통수를 맞고, 편견을 한 꺼풀 벗겨낸 탓이었다.

    “황혼 국교회에서 세뇌라도 시킨 건지. 똑같이 붉은 잉크로 굶주린, 가난한, 자비, 이웃 뭐 이런 단어에 종이가 뚫어지도록 동그라미를 쳤더군요.”

    라크시스는 멈칫했다.

    같은 저주다.

    그것도 같은 수법으로 교묘하게 만들어진, 자신 정도 되는 마법사가 아니면 알아채기 어려운 미약한 저주였다.

    골치 아프게 됐군. 어지간한 범죄 사건이면 이쯤하고 발을 빼려 했는데.

    저주가 연관된 걸 알게 된 이상 못 보고 지나치기도 어렵게 됐다. 고대 마법사인 자신이 아니라면 해결하기도 어렵거니와, 어차피 황실이든 의회든 경찰이든 누군가는 제게 도움을 요청할 테니까.

    그런 그의 속을 까맣게 모르는 슈나이더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미스 허슬러는 어디 갔습니까? 내무장관님께서 무척이나 궁금해하시는데.”

    현 내무장관은 노든 대공인 차탈 세페란테였다. 그간 라크시스와 요르문의 뒤를 끊임없이 밟아온 의뭉스러운 황족이자 마법사.

    라크시스는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잔뜩 날 선 반응을 보였다.

    “여기서 장관이 왜 나오지?”

    “모르간 광역 경찰청이 내무부 소속이니까요. 재키 레이븐 검거 소식이 들어가자마자 연락이 왔었습니다.”

    멀리서 순경 하나가 수화기를 들고 허둥지둥 뛰어왔다.

    “경사님! 노, 노든 대공 전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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