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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47)화 (47/292)

47화 

* * *

폭풍우를 견디지 못한 경첩이 결국 뜯어지고 말았다. 훤히 뚫린 창문으로 쏟아지는 비바람에 결국 촛불마저 꺼졌다.

“…그럴 줄 알았어.”

로렌은 비에 젖은 생쥐처럼 떨면서도 반항하고 있었다.

“헨리, 당신이 재키 레이븐일 줄 알았다고.”

“탐정이라면서 이 정도도 추측 못하면 섭하지. 뭐, 알아도 이미 늦었지만.”

“넌 끝이야, 재키 레이븐.”

같잖은 협박을 들어주며 노는 것도 슬슬 질렸다. 재키 레이븐은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슬슬 어지럽지 않아?”

“…차에 뭘 탔구나.”

“이런, 너무 둔한 거 아냐?”

생각보다 약이 늦게 드는군. 의술사라더니 역시 마법사는 다른 모양이야.

그때 로렌의 몸이 바닥에 힘없이 허물어졌다.

“사실 찻주전자를 보고도 순순히 차를 들이켜는 데에 진작 실망하고 있었어. 탐정 아가씨.”

재키는 다리가 풀린 로렌을 일으켜 소파에 앉혔다. 그녀가 손을 휘저어 저항했지만 잠꼬대나 다름없는 무력한 팔짓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샤샤리아에 취한 것처럼 로렌이 소파에 늘어졌다. 붉은 옷을 입고 반쯤 풀린 눈이 꼭 창관에서 자주 보던 창녀 같았다.

켈튼의 영애가 아니라.

“넌 특별히 예쁘게 전시해 줄게. 레이디는 처음 죽여보거든.”

재키는 한 손으로 로렌의 목을 짓눌렀다.

“컥, 끄윽.”

포크만도 못한 이런 가느다란 목은 한 손으로도 충분했다. 로렌의 낯빛이 어두운 응접실 안에서도 파랗게 질린 것이 보였다. 그녀는 착실히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넌 본보기가 되는 거야.”

“무, 슨 컥, 본보기…….”

“불신자들은 심판을 받는다. 귀족도 더 이상 예외는 없어.”

로렌의 눈동자가 반쯤 돌아갔다. 움푹 파인 살결 속으로 꺼져가는 맥동과 뼈가 만져지는 것 같다.

살인은 언제나 기꺼웠다. 이 세상엔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으니까. 신은 당신의 신실한 종에게 법보다 위대한 명분을 주었다.

“레이디 켈튼. 네 시체 위엔 뭐라고 적어줄지 궁금하지 않아?”

질척하게 손에 달라붙는 땀이 로렌의 마지막 발악처럼 느껴졌다.

“고귀함이 흘린 피는 더 이상 푸르지 않나니. 순결을 버린 여인은 지옥의 문턱에서 추락할지어다.”

광기 어린 살인, 그 미친 듯한 쾌락에 함몰된 재키에게서 자지러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그래?”

돌아갔던 로렌의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았다.

죽어가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차분한 음성.

재빨리 조르던 목을 놓았으나 아무런 상흔도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싸한 기분이 전신을 엄습해 왔다.

철컥.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차가운 총구가 재키의 뒤통수에 닿았다.

재키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수십의 메이덜린 경찰과 슈나이더 경사를 뒤로한 채.

“누가 본보기가 될까?”

몰아치는 폭풍우를 맞으며 로렌 허슬러가 리볼버를 겨누고 있었다.

* * *

슈나이더 경사가 헨리의 손목에 수갑을 채움으로써 재키 레이븐은 마침내 검거되었다.

“…헨리 던로. 당신을 존속살해 및 연쇄살인 혐의로 체포합니다.”

5층까지 모든 조명을 남김없이 켜서 밝힌 28번지의 집은 재키 레이븐의 가면을 잃고 발가벗겨진 나약한 범죄자를 닮아있었다.

반항도 도주도 없었다. 다만 같은 경찰서에서 함께 일해왔던 슈나이더 경사와 해밀턴 경장은 충격이 큰 듯 보였다.

라크시스의 지휘 아래 구둣발 소리가 일사불란하게 계단을 울렸다. 위층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고함들은 아마도 재키 레이븐이 남긴 살인의 증거들을 발견했다는 외침일 것이다.

헨리는 여전히 자신의 살인이 들통난 것이 믿기지가 않는지 혼이 나간 얼굴로 서있었다.

슈나이더는 갈피를 잃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왜 그랬어, 인마. 왜 사람을 죽이고 그랬어.”

모두가 착잡한 기분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모르간 광역 경찰청이 생긴 이래 줄곧 실적을 쌓아가고 있던 경찰 내부에서 희대의 연쇄 살인마가 나온 사건이었다. 당장 슈나이더 경사와 해밀턴 경장은 동료에 대한 배신감에서부터도 헤어나오지 못한 모양이니까.

로렌 허슬러의 목을 조르던 광인의 표정을 저들도 봤어야 하는데. 시아는 아까와는 딴판으로 처연하게 서있는 헨리를 흘긋거렸다.

“어째서, 내가…….”

헨리는 집 밖으로 끌려 나가면서도 계속 중얼거렸다. 누가 보면 억울하게 살인 누명이라도 쓴 줄 알겠어. 무기질적인 눈동자로 바닥의 무늬를 좇으며 같은 말만 반복하는 탓에 해밀턴 경장은 집 안으로 도로 돌아와 헨리에게 덮어줄 외투를 챙겨서 나갔다.

아직까진 재키 레이븐과 헨리 던로가 머릿속에서 매치되지 않겠지. 해밀턴 경장을 이해할 순 있었다.

재키 레이븐을 태운 마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끝났어.’

문득 리볼버의 금속성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시아는 조용히 총알을 빼냈다. 방금 전까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방아쇠를 당길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비록 상대가 재키 레이븐이었대도 말이다.

헐벗다시피 한 옷차림으로 비바람을 맞았더니 몸이 으슬으슬했다. 벗어둔 레인코트라도 입으려고 옷을 찾던 중에 은은한 숲 향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익숙한 체향이었다.

“괜찮아요?”

“…라크.”

라크시스가 어느새 말없이 다가와 있었다. 줄곧 현장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이름이 불리자 시아에게로 고개를 기울여 주었다.

잔잔하나 격랑하는, 모순적인 짙푸른 눈동자에 자그마한 여자가 오롯이 담겨있다. 헐벗어 추위에 떨고 있지만 살인마를 겨냥하던 권총만큼은 단단히 쥐고 있었던 바로 그 여자가.

큼직한 코트에 둘러싸여 있으니 마치 모닥불 앞에서 담요를 두르고 앉아있는 것만 같은 안도감이 들었다. 뒤늦게 사지 말단에 뜨끈하게 피가 몰렸다. 아무래도 자신은 괜찮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아는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저야 괜찮죠. 저 대신 오토마톤이 박살 났지만요.”

그녀가 눈짓한 곳에는 시체처럼 널브러진 오토마톤이 있었다.

목을 조르던 모양 그대로 목 부분의 동판이 찌그러진 오토마톤엔 재키 레이븐의 살인 시도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저 오토마톤은 미스터 비렌체와 요르문의 작품이었다.

“…미스터 비렌체도 대단하네요. 어떻게 저런 걸 만들어서는.”

인간의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감각을 공유해 주는 오토마톤이었다. 평범한 오토마톤에 메이슨이 발명했던 기계 의수(여전히 이름은 별로였다)의 기술을 접목했다나 뭐라나.

프로토타입이라며 기계 의수의 성능을 의심할 땐 언제고 이런 원격조정 오토마톤을 만들어내다니. 요르문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그가 애초에 모든 걸 독학해 온 사람이란 것을 감안하면, 메이슨 비렌체는 진짜로 천재 발명가가 맞는 것 같았다.

“제작 지시는 제가 했습니다만.”

라크시스가 부루퉁한 낯으로 덧붙이며 메이슨에 대한 감탄을 단박에 끊어냈다.

“환영 마법도 제가 적용한 거고요.”

“네네. 라크도 대단하네요.”

“…이렇게 성의 없고 안 듣느니만 못한 칭찬이라니.”

“와아! 역시 고대 마법사라니까. 어떻게 저런 발상을 다 했어요? 라크 아니었음 저 자리에 오토마톤 대신 제가 있었을 텐데. 재키 레이븐은 라크가 다 잡은 거라니까요.”

“…….”

어색한 시선이 오고 간다. 한동안 두 사람은 침묵했다.

그렇게 말없이 한참을 나란히 서있었을까. 분주히 움직이는 경찰들과 너저분한 사건 현장을 보고 있다가 문득 알아챈 것이 있었다.

사람이 한 손으로 저렇게 쇳덩이를 찌그러뜨릴 수가 있나?

시아는 무심결에 제 목덜미를 더듬었다.

폭풍우를 등진 살인마의 번득이는 눈빛이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감각과 시야를 공유하는 오토마톤을 조종했기 때문이었다.

시아는 가만히 라크시스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라크시스는 그 기울임을 말없이 받아주었다.

* * *

대략 두 시간 전, 켈튼의 저택.

‘헨리의 약혼녀가 실종되었다고요?’

헨리의 신상이라며 라크시스가 가져온 자료들엔 뜻밖의 정보가 있었다.

‘수상한 건 그가 실종된 약혼녀를 찾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이 마법사는 경찰서 털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건가. 아무리 황제에게 받은 특권이 있다지만 이런 사건 정보는 보안 서류일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시아는 메이덜린 경찰이라는 활자가 떡하니 박힌 실종자 명부를 받아 들었다.

스칼렛 포드.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보면 알겠지만 던로가에선 약혼을 극구 반대했었습니다. 미스 포드는 창관 출신의, 부모도 친척도 없는 고아였으니까요.’

헨리는 던로 남작가의 차남이었다. 장자가 아니었기에 작위를 물려받진 못했으나 그 외에 가문의 일원으로서 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누려왔던 모양이었다.

그랬기에 그만큼 집안에서의 간섭도 심하게 받았을 것이다.

‘와, 공금 횡령에 연인과 야반도주까지. 어떻게 이 비싼 랭험 지구에 사나 했더니 다 아버지 회삿돈이었구나.’

‘아주 제대로 사고를 친 거죠.’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던 약혼녀가 실종됐는데도 찾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라크시스는 이렇게 말했다.

‘헨리 던로가 재키 레이븐이라면 말입니다. 보수적이고 결벽적인 성격상 약혼녀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들었을 겁니다.’

‘아.’

재키 레이븐이 남기고 다닌 편지를 보건대, 그는 광적으로 교리를 믿는 극보수주의 국교인일 것이다. 그런 성격이라면 헨리는 점점 창관 출신인 약혼녀를 믿지 못하고 집착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신문 배달부며 청과상에게 으레 건네는 인사조차 다른 남자에게 던지는 추파라고 느껴질 만큼.

‘미스 포드의 실종이 어쩌면 살인… 사건일 수도 있겠네요.’

‘그가 재키 레이븐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겁니다.’

미친놈. 아직 헨리가 재키 레이븐이라는 것이 확실한 것도 아닌데 목구멍까지 욕이 왈칵 올라왔다.

‘그럼 이 붉은 드레스는 미스 포드의…….’

‘미스 포드가 연상될 만한 것을 구해온 겁니다. 그녀가 일하던 창관의 동료들이 알려준 것이니.’

라크시스가 향수며 붉은 드레스, 목걸이 따위를 품에서 꺼내 내밀었다.

‘이것 때문에 창관까지 갔다고요?’

‘함정은 완벽할수록 좋으니까요.’

그렇게 대답하는 라크시스의 만면엔 뿌듯함이 가득했다. 아니면 성취감에 가까우려나.

다시 말하지만 그는 겉보기엔 황궁에 기거하며 고급 사치품에만 손댈 것 같은 귀족적인 사람이었다. 창관이 늘어선 뒷골목 시궁창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외모였다는 말이다.

이럴 때마다 요르문 님이 왜 저 고대 마법사와 친구였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라크도 보통 사람은 아니네요.’

‘그 말은 칭찬으로 받아두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다 말고 라크시스가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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