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46)화 (46/292)
  • 46화 

    하얗고 가느다란 맨손을 빤히 내려다보기만 하자, 로렌이 먼저 제 손을 거리낌 없이 잡아챘다.

    팔이 심하게 다치긴 한 모양인지 로렌이 붙들고 위아래로 흔드는 손에 따끔한 감각이 돌았다. 그녀는 내키는 만큼 악수를 하더니 자신을 내팽개치고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하.”

    이미 응접실에 들어앉았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도대체 뭘 하는지 벽 너머로 절그럭절그럭 소리까지 들려왔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작은 벌레가 시야를 가로질러 날아갔다.

    헨리는 멋대로 제집을 차지한 로렌의 뒤를 천천히 쫓았다. 구둣발이 마룻바닥을 강박에 가깝게 규칙적으로 울렸다.

    비바람이 몰아쳤는지 현관이 거세게 닫혔다. 그때까지 현관이 열려있었는지도 몰랐다. 이게 다 무작정 들어온 로렌 허슬러 때문이었다. 헨리의 시선이 현관에 잠시 머물렀지만, 이내 그는 다시금 응접실로 향했다.

    그사이 비에 젖은 발자국이 현관 앞 복도에 새로이 찍힌 걸, 헨리는 미처 보지 못했다.

    * * *

    “차, 드시겠어요?”

    “일단 팔 먼저 보고요.”

    로렌 허슬러는 거침없이 레인코트를 벗었다. 그 행위가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와서 할 만한 행동이 아니라는 건 둘째 치고, 헨리는 레인코트 안에서 드러난 그녀의 옷차림에 조소를 감추지 못했다.

    가슴골이 훤히 드러난 드레스였다. 창관에서 레이디 흉내를 내는 창부들이나 입을 법한, 농익은 분위기를 한껏 머금은 붉은 드레스는 사람을 치료하러 온 의술사의 차림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처음엔 귀족의 알량한 자비로 날 동정했다고 생각했는데. 잘못 생각한 게 아니었다. 지금의 로렌 허슬러는 그저 남자가 필요한 천박한 여자일 뿐이었다.

    오랜 과거에 묻어두었던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붉은 원피스. 독한 향수. 당돌한 태도.

    당장이라도 저 발칙한 여자를 목 졸라 죽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헨리는 말없이 주머니 속의 성녀 상을 으스러지듯 주물렀다.

    가방에서 원통형의 기계를 꺼내 들고 낯선 형태의 의술 도구들을 응접실 테이블에 늘어놓고 나서, 로렌은 검붉은 머리칼을 한쪽으로 쓸어넘기며 다가왔다.

    “벗어볼래요?”

    그 말에 헨리는 군말 없이 셔츠를 벗었다. 그가 상의를 벗자마자 등을 뒤덮은 붉은 궤양이 드러났다. 질겁해서 비명이라도 지를 줄 알았는데. 의술사가 맞긴 한 가보다. 로렌 허슬러는 생각보다 담력이 센 모양이었다. 등 뒤에 선 여자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아니면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나저나 어쩌다 이렇게 다쳤어요? 딱 보니까 부딪히거나 넘어져서 쓸린 것 같은데.”

    그녀의 손길이 천천히 어깨를 타고 내려와 잔뜩 부은 팔에 닿았다. 찰과상이 넓게 자리한 피부엔 궤양 말고도 피딱지가 가득했다. 남은 한 손이 제 뒤통수를 느긋하게 쓰다듬는 것을 느끼며, 헨리는 로렌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의사라면 이런 식으로 궤양에 손을 대지는 않지.

    그녀는 지금 자신을 유혹하는 중이었다.

    어설프게 제 벗은 몸을 더듬는 손길이, 그녀가 막 타락에 눈을 떴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다른 남자들은 이 같잖은 유혹을 풋풋한 정염으로 착각하고 동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이런 속임수는 통하지 않는다.

    비 오는 바깥에 오래 있어서 그런가. 그녀의 피부는 창백했다. 무엇보다 목덜미에 닿았던 그녀의 손이 지나치게 차가웠다.

    체온이란 게 원래 이렇게까지 낮을 수가 있나?

    헨리는 로렌의 손을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로렌은 그의 정신을 빼앗기라도 하듯, 정체 모를 원통형 기계를 조작해 거대하게 만들어 다친 제 팔에 끼워두곤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번쩍이는 녹색 빛 이후에 팔이 투명해진 것을 보곤 헨리는 경악했다. 뼈, 혈관, 근육, 신경. 그 모든 것이 로렌 허슬러의 의지에 따라 선명하게, 또는 흐릿하게 비쳤다.

    그 후 치료는 순식간에 끝났다.

    “뼈에 금이 가긴 했는데, 딱히 제가 더 해줄 건 없고. 크게 다친 건 아니었네요. 맥박도 정상이고, 손가락 잘 구부러지죠?”

    “…이게 끝입니까?”

    “네. 더 해드릴 건 없네요. 이대로 팔 움직이지 말고 얌전히 뼈가 붙길 기다리면 돼요.”

    실제로 로렌이 그에게 해준 건 부목을 여러 개 덧대어 팔을 고정시키곤 어깨 보호대를 해준 게 전부였다.

    “실망했어요? 치료해 준다고 해놓고 고작 이런 것뿐이라?”

    “…미스 허슬러가 아니었다면 이런 치료조차 못 받았을 텐데요.”

    “그래요, 그럼.”

    개판이군. 이 정도 치료는 알고 지내던 의사에게도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따위 부목 때문에 이 시간에 날 찾아온 게 아니란 건 잘 알겠어.

    헨리는 로렌이 곧 본색을 드러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로렌 허슬러는 뜻밖에 도로 레인코트를 입기 시작했다.

    “볼일이 끝났으니 전 이만 가보도록 할게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헨리는 다급하게 일어났다.

    “이렇게 가시는 겁니까?”

    “그럼 뭘 더 할까요?”

    나긋하게 되물어오는 목소리 위로 로렌의 눈꺼풀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살랑거린다.

    레인코트 속으로 도로 숨어버린 붉은 드레스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방금 전 제 어깨를 만지던 은근한 손길이 의도된 유혹이 아니었단 말인가?

    아니면.

    ‘지금 자신을 붙잡아달라고 하는 건가?’

    못이기는 척 남아서는 어쩔 수 없이 하룻밤을 묵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요망한 년.

    “…차, 드시고 가세요.”

    차를 권하는 헨리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빛났다.

    【 최고의 함정수사 】

    “부디 편히 드시길.”

    “…잘 마실게요.”

    궐련의 연기처럼 숨 막히는 공기가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응접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오래된 은촛대만이 연약한 불빛을 이리저리 흘렸다. 손님을 대접하기엔 지나치게 어두웠으나 누구도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두 개의 찻잔과 두 개의 찻주전자. 이상한 광경에 묘한 긴장감이 늪처럼 고여 들었다.

    “맛이 없으신가요? 귀한 입맛엔 잘 안 맞으실 수도 있겠네요.”

    “귀한 입맛이라니, 누가 그래요?”

    구정물에 억지로 입술을 적시는 표정이었으면서. 하지만 헨리는 더 이상 로렌의 비위를 맞출 생각이 없었다.

    “글쎄요, 켈튼 저택에 기거하시는 분이라면 귀한 분이시지 않을까요.”

    “…순경님.”

    “당신이 라크시스 옌 경과 함께 메이덜린 경찰서에 나타났을 때, 슈나이더 경사님이 아르카나 경찰 쪽에 거주민 정보를 요청하셨죠.”

    구태여 뒷조사까지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만. 그렇게 덧붙이자 로렌 허슬러, 아니 시아 켈튼의 낯에 만연해 있던 여유로움에 금이 가는 것이 보였다.

    “레이디 켈튼. 왜 탐정인 척하셨던 거죠?”

    “…탐정 맞아요.”

    로렌은 본인이 시아 켈튼임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사무소도 없던걸요.”

    “탐정은 모두 사무소가 있어야 하나요?”

    “대부분은 가지고 있죠. 의뢰인의 방문을 위해서요.”

    귀족은 귀족이라는 건가. 경찰서에 왔을 때도 그렇고, 말끝 하나 지지 않으려는 그녀의 오만함 하나는 인정해 줄 만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켈튼이 가진 자산이면 작은 사무소쯤이야 금방 차리고도 남을 텐데.”

    꺾으면 부러질 것 같은 저 손가락이 떨리고 있는 게 훤히 보이지 않는가.

    귀족이건 매춘부건 결국 힘의 논리 앞에서는 무의미하다는 거다. 나약한 죄인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감지한다.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으며, 눈앞의 존재가 얼마나 냉정하고 잔인하며 위험한지를.

    우위에 있는 건 이제 나야, 로렌.

    “옌 경이 그런 건 안 해주덥니까?”

    로렌은 결국 찻잔을 내려놓고, 토해내듯 한숨을 쉬었다.

    “…헨리 순경님.”

    헨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로렌에게 다가갔다. 찻잔을 치우곤 테이블에 비스듬히 앉아 그녀와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 보았다.

    “마력 신호 일련번호, 라크시스 옌 경의 번호와 동일하더군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침묵이 흘렀다. 상황이 잘못된 것을 이제야 파악했는지 로렌은 아까와는 달리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쏘아보았다.

    머리 굴리지 마, 로렌.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여.

    “그리고 당신은 켈튼저에 머무는 입장이면서도 라크시스 옌의 피후견인 신분이었지.”

    “설마 저에 대해 조사하느라 늦은 시간까지 경찰서에 있었어요? 그래서 자정이 다 돼서 날 부른 거고?”

    아무렴 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심판을 할까. 네가 내 심판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아니면 그조차도 받지 못할 진창에 빠져있는지.

    로렌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경찰이 그렇게 멋대로 뒷조사를 하고 다녀도 되나요?”

    “신사가 다 큰 여인을 피후견인으로 두는 관계만큼이나 불온한 것도 없는 걸 알까 몰라.”

    “무례하군요. 헨리 순경님은 사람을 붙잡아 놓고 이런 식으로 모욕을 주시는 분이었나요?”

    “레이디 켈튼, 처음엔 당신이 순진한 여인인 줄로만 알았는데.”

    로렌이 헨리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챘다.

    “헨리 순경.”

    체급의 차이 때문에 멱살이 들어 올려지지도 않는데 파들파들 목깃을 잡고 있는 모양새가 우습다. 화가 잔뜩 난 모양인지 로렌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로렌을 올려다보며 헨리가 키들키들 웃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발랑 까졌잖아. 술란 출신인 걸 핑계로 아무에게나 웃음을 흘리고.”

    “어디까지 내 뒷조사를 한 거죠? 이건 불법이에요.”

    “라크시스 옌과는 이미 정을 통했나? 하, 피후견인이라니! 부정해. 불결하고 엉망진창이로군!”

    “헨리. 내가 레이디 켈튼인 걸 알고도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가?”

    “당신이 켈튼이든 뭐든 상관은 없지. 어차피 내가 널 죽일 텐데.”

    “켈튼 가에서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경찰은 무슨, 당장 광장에 목이 걸릴 거라고.”

    헨리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커다란 체구에 로렌은 맹수 앞에 놓인 쥐인 양 초라하게 움츠러들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멱살을 잡은 로렌의 손이 쉽게 떨어져 나갔다.

    로렌의 머리 위로 헨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내가 죽였다는 건 아무도 알아낼 수 없어.”

    순간 번개가 쳤다.

    이지러지던 로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미친 듯이 몰아치는 비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리며 연이어 번개가 내리꽂혔다. 창문을 반쯤 등진 헨리의 얼굴이 빛과 어둠으로 양분되어 광기를 비추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헨리의 흰 이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설마 당신이 재키…….”

    “맞아. 내가 신의 사도, 재키 레이븐이야.”

    0